사랑은 공간이다(눅17:20-25)
문둥병자 한명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바리새인이 하나님나라가 어느때에 임하는지 질문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때를 말하지 않고 장소를 이야기한다.
왜 바리새인은 때를 묻고 예수님은 장소를 말할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잘못되어서 그렇다.
바리새임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은 형체 즉 조직이나 세상적 나라로 보이는 형상으로 이해를 했다.
그래서 더 좋은 조직이나 더 잘 만들어진 제도나 법을 통해 이루는 형체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토피아로 이해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한마디로 '사람'이다.
태초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고 잃어버린것은 사람이다.
믿음이다. 믿음을 잃고 전부 즉 하나님의 나라가 사라졌다.
이것은 형체나 조직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이다.
사람속에 어떤것을 잃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예수님은 무엇으로 정의 하셨나?
하나님의 나라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정의 하셨다. (롬14:17)
그래서 복음을 잘 알지 못하면 자꾸 바리새인처럼 큰 조직과 큰 형체의 어떤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한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사역을 조직으로, 일을 잘해서 어떤 실적을 많이 세우려한다.
이것이다 세상적이요 바리세적 하나님나라의 이해에서 오는 결과다.
예수님은 형체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본질 잃어버린것을 회복하러오신 예수님의 대상은 사람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조직이 아니라 오직 사람 즉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속이라고 정의 해주셨다.
그래서 성령의 정의도 '너희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라고 신약성경 여러곳에서 증명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은 오직 내안에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있을때이다.
의도 없고 평강도 없고 희락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은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한 새 계명은 사랑이다.
하나님에 대해 사람에 대해...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는 모든 것은 조직과 형체를 이루려는 바리세적 신앙의 증명이다.
어린아이 같지 아니하면...
자꾸 어른이 되려한다.
뭔가 이루고 세우고 내 실적을 드러내고 높이려한다.
자꾸 어른이 되려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되라하신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사람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주를 위한 열심과 영광과 나라는 오직 사람이다.
사람은 사랑이다!
때를 구하는 자의 오류는 세상나라처럼 형체를 구하고
그래서 나의 실적을 추구하고
공간을 구하는 예수님은 나와 관계하는 공간을 구하신다.
하나님과 만나는 공간을 통해
우리안에 하나님의 나라라는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안에 우리라는 공간이 세워지고 그 공간속에 하나님의 나라는 확증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공간이다.
사람은 사랑할 공간을 만들때 참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형체가 아니라
공간이다.
*드롱콥교회입니다.
파니전도사의 순교의 피가 흐르는 곳입니다.
구제품을 전달했습니다.
많이 울었던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피와 생명으로 세워집니다.
주를 사랑하는 공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세워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