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마지막 시험( 눅17:1-10)
실족케하는 문제중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이다.
실족케하면 연자맷돌 매고 바다에 떨어져 죽을 만큼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그 실족과 관련된 3가지 주님의 관점을 생각해야한다.
1. 작은자에게 한것이다. 해도 안해도 미미한 자에게 한 것이다.
2. 스스로 조심해야한다.
3. 용서와 믿음의 관계이다.
다른 사람이 문제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구할때 용납하고 이해하고 받아주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와 실족이다.
가장 큰 실족의 이유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실족이다.
세상의 마지막 문제는 누가 용서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늘의 일은 용서이다.
세상은 재판하려하고 하늘의 뜻은 용서하려한다.
실족의 결정적 문제는 용서이다.
일흔번의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하늘의 사람만이 가능한 일니다.
실족의 마지막은 용서하지 않아서이다.
왜 실족케 하는 것이 연자 맷돌매고 바다에 떨어져 죽을만큼 큰 일인가? 하늘의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족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이고 하늘의 마지막 일은 용서 즉 하나님의 백성 마지막의 증명은 용서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지막 증명인 용서를 통과하지 못하면 지옥백성이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뭔가?
용서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뭘것 같은가?
용서이다.
그 뜻이 예수님을 통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으로 하늘의 뜻을 구한다.
자꾸 더 큰 능력을 구해서 이 땅에서 이름을 내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한다.
아니다.
진정한 능력은 십자가의 용서이다.
예수님의 진정한 능력은 십자가의 용서이다.
우리는 세상에 높아지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용서의 능력을 날마다 구해야한다.
우리다 구할 주기도의 일용할 양식은 이 용서를 이룰수 있는 하늘의 양식이다.
우리는 용서를 선택이라 여긴다.
아니다.
용서는 의무다.
종의 의무는 주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일하고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종이라했다.
그 종의 의무는 용서다.
할일을 했다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의 다름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다.
세상은 용서를 선택으로하고 우리는 용서를 종의 의무로한다.
이상한것은 예수님께서 일흔번에 일곱번을 용서하라했더니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구한다.
용서와 믿음이 무슨 상관인가?
용서의 핵심은 믿음이다.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용서다.
주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용서가 없는 믿음은 없다.
용서를 이야기하니 제자들은 믿음없음을 탄식한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한다.
용서의 핵심이다.
믿음이 있으면 무슨일이 생기나?
초자연적 일이 일어난다.
세상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이 일어난다.
뽕나무를 명하면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는 일이 일어난다.
초자연적 기적이다.
해가 하늘에 멈추고 달이 골짜기에 머무는 일이다.
하늘의 일 즉 용서를 지난 믿음은 세상의 일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이는 비결이다.
용서하지 않는 곳에는 능력이 없다.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냐한다.
용서의 감정이 풀려야 하늘의 일이 이루어진다.
하늘의 뜻은 이땅에서도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은 무엇인가?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악이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악이다.
우리는 날마다 악에 거한다.
왜 하나님이 선하신가?
용서를 구하면 모든 자를 용서하신다. 그것이 선이다.
그 용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에,
그 용서의 완성인 십자가를 이루셨기에 선하시다.
십자가가 위대한 이유는 몇시간 십자가에 피흘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길어봐야 하루동안 다른 죄인들도 달렷던 십자가가 아니다.
수천년을 인내하고
준비하고
하늘에서 이미 용서를 결정하고
이 땅에서 용서의 삶을 사신 그 용서의 세월과
죽음으로 그 용서를 완성하신 것이 용서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신 완료적 용서이기에 위대하다.
실족은 나의 실수나 나의 성질이나 나의 못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기에 실족한다.
다른 사람도 실족하고 그로인해 내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때 임한다.
기적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다.
용서를 통해서 오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 하늘의 뜻인 용서의 응집체인 십자가가 나를 통해 증명되기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다.
모든것에 성공해도 믿음에 실패하면 연자맷돌 매는 것이다.
실족의 이유는 실수가 아니라 용서의 실패이다.
그 용서의 핵심은 믿음이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용서할 수 있다.
그것을 믿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용서이다.
욥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 아는가?
용서이다.
자신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던 친구들을 향한 화목제 즉 용서이다.
그 용서의 강을 지날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수빈이가 밥먹는데 다빈이가 좀 달란다.
수빈이 먹을꺼 주면서
"언니 고맙다고 말해"
다빈이 "고마워~"
수빈이 왈
"뭘~~"
???
ㅎㅎㅎㅎ
수빈이 너무 웃긴다^^
실족케하는 문제중 가장 어려운 것은 용서이다.
실족케하면 연자맷돌 매고 바다에 떨어져 죽을 만큼 심각한 문제다.
그런데 그 실족과 관련된 3가지 주님의 관점을 생각해야한다.
1. 작은자에게 한것이다. 해도 안해도 미미한 자에게 한 것이다.
2. 스스로 조심해야한다.
3. 용서와 믿음의 관계이다.
다른 사람이 문제 있을 때가 아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용서를 구할때 용납하고 이해하고 받아주지 않음으로 인해 생기는 상처와 실족이다.
가장 큰 실족의 이유는 용서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실족이다.
세상의 마지막 문제는 누가 용서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늘의 일은 용서이다.
세상은 재판하려하고 하늘의 뜻은 용서하려한다.
실족의 결정적 문제는 용서이다.
일흔번의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은 하늘의 사람만이 가능한 일니다.
실족의 마지막은 용서하지 않아서이다.
왜 실족케 하는 것이 연자 맷돌매고 바다에 떨어져 죽을만큼 큰 일인가? 하늘의 일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늘의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실족의 마지막 단계는 용서이고 하늘의 마지막 일은 용서 즉 하나님의 백성 마지막의 증명은 용서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마지막 증명인 용서를 통과하지 못하면 지옥백성이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뭔가?
용서이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이 뭘것 같은가?
용서이다.
그 뜻이 예수님을 통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능력으로 하늘의 뜻을 구한다.
자꾸 더 큰 능력을 구해서 이 땅에서 이름을 내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한다.
아니다.
진정한 능력은 십자가의 용서이다.
예수님의 진정한 능력은 십자가의 용서이다.
우리는 세상에 높아지기 위한 능력이 아니라 용서의 능력을 날마다 구해야한다.
우리다 구할 주기도의 일용할 양식은 이 용서를 이룰수 있는 하늘의 양식이다.
우리는 용서를 선택이라 여긴다.
아니다.
용서는 의무다.
종의 의무는 주인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일하고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종이라했다.
그 종의 의무는 용서다.
할일을 했다고 고백하라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의 다름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다.
세상은 용서를 선택으로하고 우리는 용서를 종의 의무로한다.
이상한것은 예수님께서 일흔번에 일곱번을 용서하라했더니 제자들은 우리에게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구한다.
용서와 믿음이 무슨 상관인가?
용서의 핵심은 믿음이다.
무엇을 믿는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용서다.
주님이 나의 죄를 용서하심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본질이다.
용서가 없는 믿음은 없다.
용서를 이야기하니 제자들은 믿음없음을 탄식한다.
믿음을 더해달라고 말한다.
용서의 핵심이다.
믿음이 있으면 무슨일이 생기나?
초자연적 일이 일어난다.
세상의 일이 아닌 하늘의 일이 일어난다.
뽕나무를 명하면 뿌리채 뽑혀 바다에 심기는 일이 일어난다.
초자연적 기적이다.
해가 하늘에 멈추고 달이 골짜기에 머무는 일이다.
하늘의 일 즉 용서를 지난 믿음은 세상의 일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움직이는 비결이다.
용서하지 않는 곳에는 능력이 없다.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냐한다.
용서의 감정이 풀려야 하늘의 일이 이루어진다.
하늘의 뜻은 이땅에서도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악은 무엇인가?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 악이 무엇인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 것이 악이다.
우리는 날마다 악에 거한다.
왜 하나님이 선하신가?
용서를 구하면 모든 자를 용서하신다. 그것이 선이다.
그 용서 모든 죄를 용서하셨기에,
그 용서의 완성인 십자가를 이루셨기에 선하시다.
십자가가 위대한 이유는 몇시간 십자가에 피흘이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길어봐야 하루동안 다른 죄인들도 달렷던 십자가가 아니다.
수천년을 인내하고
준비하고
하늘에서 이미 용서를 결정하고
이 땅에서 용서의 삶을 사신 그 용서의 세월과
죽음으로 그 용서를 완성하신 것이 용서의 위대함이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죄를 이미 용서하신 완료적 용서이기에 위대하다.
실족은 나의 실수나 나의 성질이나 나의 못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지 않기에 실족한다.
다른 사람도 실족하고 그로인해 내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때 임한다.
기적이 아니다.
능력이 아니다.
용서를 통해서 오는 십자가의 능력이다.
그 하늘의 뜻인 용서의 응집체인 십자가가 나를 통해 증명되기를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다.
모든것에 성공해도 믿음에 실패하면 연자맷돌 매는 것이다.
실족의 이유는 실수가 아니라 용서의 실패이다.
그 용서의 핵심은 믿음이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 용서할 수 있다.
그것을 믿지 못하니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것은 용서이다.
욥의 마지막 시험이 무엇인지 아는가?
용서이다.
자신을 향해 욕하고 저주하던 친구들을 향한 화목제 즉 용서이다.
그 용서의 강을 지날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다.
*수빈이가 밥먹는데 다빈이가 좀 달란다.
수빈이 먹을꺼 주면서
"언니 고맙다고 말해"
다빈이 "고마워~"
수빈이 왈
"뭘~~"
???
ㅎㅎㅎㅎ
수빈이 너무 웃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