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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최고의 기쁨, 최고의 슬픔

인생 최고의 기쁨,  최고의 슬픔

 

 

 

 

 

 

 

인생 최고의 기쁨,  최고의 슬픔(첫째 아들은 요나다)  (15:25-32)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기쁜 일이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슬픈 일이 된다.

 

오늘 돌아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는 인생 최고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인생최대의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있다.

 

첫째 아들은 이렇게 분노하고 슬픔 가운데 있는가?

첫째 아들이 놓친것이 무엇인가?

 

첫째, 수고의 대가는 반드시 물질로 온다는 착각이다.

 

수고의 대가를 첫째 아들은 물질이라고 여겼다.

둘째 아들이 와서 아버지가 소를 잡으니 그는 노하였다.

화가 났다. 그가 화가 것은 당연하다.

자기는 아버지의 명을 어긴적도 없고 집을 나가지 않고 섬겼는데

나는 소는 커녕 염소 새끼라도 적이 없고 벗과 함께 즐기게 한적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삶의 본질을 대가로 보았다.

내가 어떤 일을 했으니 어떤 결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복의 근원인 아버지가 아니라

자신의 수고와 섬김의 대가를 주시는 분으로 아버지를 정의했다.

아버지로부터 떨어지는 수고의 결과를 기대하고 살았다.

 

그가 화가 났던 것은 수고의 대가,

노력의 대가,

 섬김의 가가 물질로 보상되지 않았음에 대한 분노였다.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 겨우 마리를 잡아도 분노하였다.

것도 아니다. 오직 소를 잡았다는 종의 이야기에 화가 것이다.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밖에 서서 분을 내고 있다.

 

충분히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하면 그렇게 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성과 합리로 접근하는 관계,

이성과 합리로 시작한 관계가 아니다.

 

그냥 선택이고,

그냥 피로 맺어진 관계이다.

 

시작을 선택과 언약과 피로 맺어진 관계에

대가를 전제한 수고와 섬김과 헌신은

결국 허무만 남게 된다.

 

그래서 세상은 이성과 합리로 접근하고 결과는 허무다.

세상은 오직 가지만 남는다.

쾌락주의 아니면 허무주의다.

 

세상에서 찾을 있는 것은 오직 가지,

 허무와 쾌락이다.

 

 

둘째, 나에게 없는 것은 생각하고 아버지께 없는 것은 생각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수고 했는데 나에게 남는 것이 뭔가라는 착각,

내가 이렇게 섬겼는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있냐는 오해,

내가 이렇게 잠도 안자고, 명이라는 명은 순종하고

수고했는데 나한테는 이런 대우를 하면서

어떻게 저런 악한 자를 위해서는 소가 말이고

가락지는  말이며 좋은 옷은 어찜이뇨라는 분노와 슬픔과 화가 있다.

 

모든 마음의 배경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주종의 관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고만큼 대우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인이 아니시니 상속은 이미 허락되어진 것이고

수고가 아니라 수고보다 좋은 것으로 이미 보장을 상태이다.

 

그런데 단지 지금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다른 사람,

어렵고 힘든,

상처받고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 작은 마리로

이렇게 분을 내고 화를 내는 것이 어찌 문제가 안되겠는가?

 

오늘 본문 속에서 나는 요나를 본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욘4:9- 11)

 

 

이것이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우리는 작은 박넝쿨로 화를 내고 죽기까지 분을 낸다.

작은 마리에 우리 인생의 축복 전부를 엎어버린다.

 

내가 것이 없어도 하나님은 전부 주기로 작정하고 시작했고

우리는 손에 잡힌 것이 없으니 아무것도 안받은 것으로 착각하고

분을 내고 화를 내고 죽기까지 열을 낸다.

 

하나님은 그래서 죽기까지 관계를 죽음으로 증명하시고

첫째 아들은 죽기까지 화를 내고 분을 낸다.

그래서  첫째 아들은 요나다.

 

니느웨에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이만여 명인데 그것을 아끼지

않니하겠느냐라고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만 생각하고 하나님이 잃어버린 ,

하나님께서 가지기 원하시고 회복하기 원하시는 것은 생각도 없다.

 

첫째 아들의 문제는 자신이 이미 받았지만 당장 손에 없는 것으로 화를 냈다.

그러나 아버지는 분명히 말한다.

내가 가진 것이 것이다.

이미 하나님은 첫째 아들에게 것을 주었다.

그러나 첫째 아들은 자신의 것을 누리지 못하고

종으로 아버지를 대하고 살았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를 주인으로 대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은 고생하며 생각한 것은 아버지의 집이다.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다.

 

그래서 첫째는 먹고 싶은 , 가지고 싶은 것을 한번 못하고 그냥 고생만 했다.

우리는 당당히 요구하고 당당히 말하고 당당히 이야기 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고 싶은거지 주인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를 주인으로 생각하니 내가 계산적으로 대하고

결국 아버지가 없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셋째,  그가 놓친 것은 아버지의 마음이다.

 

그의 실수는 아버지와 함께 있지만 아버지가 아니라 주인으로 대했고

주인을 대하니 절대 아버지의 마음을 없는 것이다.

 

요나가 놓친 것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을 전부 걸고라고 회복하고 싶은

그래서 하나님이 회복하고 싶은 그분의 기쁨을 요나는 모른다.

그리고 첫째 아들도 모른다.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는 돌아가는 것이 기쁨이지만,

첫째 아들의 입장에서는 무엇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해드리고 공감해 드리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아들이다.

 

우리는 수고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한다.

열심히 해서 뭔가 이룬것으로 하나님께 인정 받으려한다.

시작이 문제다.

하나님은 일이 아니라 마음과 함께 울고 웃는 아들을 원한다.

그것이 어린아이다.

 

우리 인생의 가장 슬픈일이 뭔가?

우리 인생에 가장 기쁜 일이 뭔가?

하나님과 반대는 아닌가?

 

하나님이 기뻐하면 나는 슬프고

하나님이 슬프면 나는 기뻐하는 요나와 같은 인생은 아닌가?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

 

하나님의 기쁨,

나의 기쁨...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