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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이 없는 이유

기쁨이 없는 이유

 

 

 

 

 

 

 

기쁨이 없는 이유(눅15:3-10)

아담 이후 하나님의 역사는 회복을 위한 역사이다.

회복이라는 말은 뭔가 상실되고 파괴되고 잃어버렸다는 것을 전제한다.

... 하나님은 인류를 잃어버림 또는 파괴로 전제하고 우리를 보신다.
그래서 어제 나는 찾아오시는 예수님, 하나님으로 전제했다 .

그런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율법사들은 문제가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관점의 차이가 나온다.
관점의 차이 즉 시작이 다르니 모든 사물을 보고
구원을 보고 물질을 볼 때
그 끝이 다 달라지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 이야기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류를 보시는 관점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회복의 관점으로 보시고
우리는 우리를 유지의 관점에서 본다.

하나님은 인류의 주체인 인간을 하나님을 떠난 하나님 형상의 상실로 보시고
우리는 우리를 도덕적 윤리적정도의 문제로 본다.

이렇게 시작이 다르니 예수님의 모든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죄인들을 영접하고 함께 잡수시는 예수님의 목적은 회복이다.

그러나 유지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의 체제와 조직과
삶의 방식을 유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꾼으로 보고 엿보고 수군거리는 것이다.

차의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일반사람은 오일만 주입하려 하고
기술자는 엔진을 다 뜯어 모든 문제를 수리하려 한다.

이제 곧 차가 퍼져서 운행이 안 되는데 차를 운전하는 운전자는
오일만 대충 넣어서 타고 다닐 때까지 타려 하고
차 주인은 엔진을 완전히 분해해서 고치려 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입장에서 엔진을 분해하고
엔진 속에 들어가 앉아 죄인과 함께한 예수님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또 예수님의 입장에서 분명 엔진이 곧 터지는데
오일만 넣어서 겨우 차를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출발점이 다른 상황에서 우리가 이해할 것은 예수님의 관점이다.



첫째, 예수님은 인류를 잃어버린 자로 정의하신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께 남은 것은 무엇인가?

온 세상을 창조하고 그 모든 세상을 사람에게 주셨다.
그런데 그 사람이 사단에게 넘어갔으니 하나님께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하셨고,
예수님은 죽으셨고,
성령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성삼위 하나님께서 자신의 전부를 걸고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시는데 사력을 다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역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겨우 밥 먹고
같이 놀고 있는 정도로 생각하니
참 답답하기가 말로 다할 수 없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예수님 입장에서 기가 찰만도 하다.

인류는 잃어버린 자들의 집합체입니다.
사는 것 자체가 잃어버린 곳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살아도 그것이 잃어버린 삶이다.
뭔가 찾아도 뭔가 가져도 뭔가 되어도 뭔가 성취해도
그것 자체가 잃어버린 삶이다.

이 인류는 잃어버린 도성이다.

그러니 마음에 채움이 없고
무엇을 해도 외로움에
그리움에 채울 수 없는 허전함으로 수 없는 시간을
뭔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다.

헤매봐야 잃어버린 도성이다.

한번 길을 잃은 인류는 스스로 그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 잃은 인류에 길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우리의 주님이시다

길을 찾게 해주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을 만나면
그제야 길을 발견하고 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떤 방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다른 길을 찾으려 한다.
다른 길은 또 다른 잃어버림이다.




둘째, 회복에 대한 기쁨이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것을 찾음에 대한 기쁨이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지 설명하신다.

원래 있던 99의 기쁨보다 더하다 했다.
이것은 원래 99이 주던 기쁨이 적다는 말이 아니라
그 기쁨보다 더욱 크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기쁨은 회복이다.
그 기쁨의 이유는 인류전체,
하나님의 것 전체를 잃어버린 상실과 아픔의 반전이다.
예수님의 사역은 잃어버린 것을 찾는 것이요,
잃어버린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결국 창조 때 세상을 만들고
그 세상을 사람에게 다 주셨듯이
결국 사람의 회복이다.

만물의 회복은 사람의 회복 이후에 친히 하실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표현하기를 잃은 양을 찾고 벗과 이웃을 불러서
나와 함께 즐기자 내가 잃은 양을 찾았노라고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한다.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고 역시 벗과 이웃을 불러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셨다고
그 기쁨을 함께 나누자고 한다.

잃어버린 상실이 클수록 찾음에 대한 기쁨이 더욱 크다.
예수님은 그것을 너무 잘 아신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잃어버린 것을 찾음에 대한 기쁨이다.
이것이 참 기쁨의 본질이다.

예수님의 기쁨과 우리의 기쁨이 다르다.
예수님의 기쁨은 찾음에 대한 기쁨이고
우리의 기쁨은 누림에 대한 기쁨이다.

잘 유지되면 기쁜 것이다.
별일 없으면 기쁜 것이다.

아니다.

우리의 기쁨이 찾음에 대한 기쁨으로 변화될 때
진정한 예수님의 이 기쁨을 알게 되고
전부를 걸어서 찾고 싶은 열정이 살아난다.

유지하려 하지 말고 찾아 나서서 찾은 자의 기쁨을 회복해야 한다.
이 기쁨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을 누린지가 언제인가?

이 하늘의 기쁨을 이기지 못한지가 언제인가?
수혈성 기쁨말고 창조적 기쁨이 우리 안에 솟아나야 한다.
그 기쁨이 자신의 전부를,
피 한 방울까지도 드릴 수 있는 찾은 자의 기쁨
창조적 기쁨이다.



셋째, 이 기쁨의 본질은 뭔가?

그 기쁨의 핵심은 회개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눅15:10 )

나 주님의 기쁨되기 원한다는 찬양을 종종 부른다.
하나님의 진정한 기쁨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오직 회개이다.

부흥이 언제 오는가?
회개를 통해서 온다.

찾아감의 마지막은 회개이다.
기쁨의 본질은 회개이다.
부흥의 씨앗은 회개이다.

삭개오의 구원은 회개를 통해서 왔다.
물질을 내 놓았다는 것은 그에게 그것이 전부였던 사람인데
그 전부를 내 놓았다는
회개의 모습이 있었기에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다.

우리에게 참 하늘의 기쁨이 없는 것은
이 회개를 내가 경험해 보지 않은 것이요
나의 찾아감을 통해 회개하는 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요
하늘의 기쁨을 내가 보지 못한 것이다.

기쁨은 회개를 통해서 온다.

이 기쁨은 나만 누리는 기쁨이 아니라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들의 기쁨의 영광을 통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은 오직 회개이다.
그리고 찾아감을 통한 회복의 열매인 회개의 기쁨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더 없이 기쁜 때는 나의 회개를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감격이 내 안에 있을 때이고 한 영혼 영혼 직접 만나며
복음을 통해 회개하고 예수를 믿는 그 현장과 그 시간이
더 없는 기쁨의 시간이었다.

이것이 없으니 자꾸 머리로만 예수를 믿고,
행사를 통해 일을 벌이고,
회개 할 것 없는 사람들과 그냥 밥 먹고 놀고
좋은 이야기 하면서 누리는 유지의 기쁨 속에 숨으려한다.

회개를 지난 기쁨의 삶이 복음의 삶이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기쁨의 삶이다.

회개의 현장을 지나야 기쁨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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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회복 1편)


* 워터발교회 예배입니다.
올해 건축을 해야합니다.
시청과의 협의 설계 등록 재정 등등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이되며 교회에 큰 은헤와 영광이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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