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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눅15:1-2)

수군거림(15:2)과 엿보는 것(14:1)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죄인의식과 의인의식이다.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 수군거리거나 엿보지 않는다.
내 문제가 급한데 다른 사람의 문제를 가지고 따질 여유가 없다.
그런데 내가 의인이라고 여기고 나는 저 죄인들과 세리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수군거리고 엿보는 사람이 된다.

세상적기준으로 내가 멀쩡하면 나는 의인이라는 것이다.
수군거림과 엿보는 것의 핵심은 나는 문제가 없는데 너희는 지금 문제라는 것이다.
그런 의식이 내 안에 즉 세상적 기준으로 의인의식이 있을 때 우리는 수군거리게 되고 엿보게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누가복음 13장부터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이같이

다 망한다는 말씀으로 시작되어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를 문제 삼은

회당장과 떠나기를 원한 바리새인의 이야기로 해서 계속 이어지는 같은 문제들이다.


13장부터 15장에 이르기까지 성경본문을 보는 관점은 무엇이어야 하나?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과 의인의식을 가진 자들의 싸움이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은 가는 곳마다 죄인을 부르시고 고치셨다.
그런데 의인의식을 가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님을 거부했고 수군거렸고 엿보고 내쫓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의인이고 당신은 틀렸다는 것이다.
당신은 문제라는 것이다.

살면서 비판은 필요하다.
하지만 비판은 필요하지만 분별은 더욱 필요하다.
비판은 자신에게 해야 하고 분별은 사람을 향하여 해야 한다.
비판의 배경은 나는 의인이고 당신은 죄인이라는 출발이 다른 것이다.
분별은 너와 내가 같은 죄인이지만 잘못을 잘 헤아려 같이 돌아서자는 것이다.

의인의식을 가진 죄인과 죄인의식을 가진 의인이 존재한다.

주님은 아무리 죄를 많이 지어도 죄인 의식을 가진 의인들을 용납하신다.
그러나 아무리 죄가 없어 보여도 의인의식을 가진 죄인은

망하라고 멸망한다고 내어 쫓긴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13장-15장까지의 흐름이다.

이 수군거림과 엿보는 것의 실제 문제가 무엇인가?

주님은 죄인의 편에서 생각하고 마음을 공감하신다.

우리는 사람을 볼때 늘 이런 마음이 없다.
비판 잘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주님이 이런 사람의 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주님이 이런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주님은 엿보고 수군거리지 않고 고치시고

공감하시고 함께 아파하고 그리고 함께 생활하신다.

수군거리고 엿보는 사람은 절대 "함께"라는 단어를 모른다.
함께는 아픔의 공감을 아는 사람,
내가 아파 본 사람,
내가 죄인이라고 절절히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가지는 선물이다.

의인의식으로 점철된 의식속에 이 죄인을 공감하시고
함께라는 선물을,
임마누엘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리 가 만무하다.

그러나 죄인의식을 가진 사람들속에 함께 아파하고 함께 하고픈

예수님의 소식은 복음이고 기쁨이고 축복이 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수근거림과 엿?을 통해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신다.

이단은 끝이 달라서 이단이다.
그런데 시작이 다르면 그것도 이단이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과 다른 시작을 하고 있다.

늘 비판하고 문제를 삼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의 공통점은 아픔이 많은 사람이다.
가시가 많은 나무의 특징은 가지가 약하다는 것이다.
자신이 약하니 가시고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다.

수근거리고 엿보는 사람의 속은 늘 불안하다.
허전하다.
외로움이다.

그런데 그것을 수근거림이나 엿?이나 비판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확인 받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더 큰 사람을 만나면 그들이 포용되어 더욱 충성하는 사람이 되는데

같이 비판하고 같이 수근거리고 같이 엿보면 같이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수근거리고 엿보는 사람을 보면 생각한다.

그들의 마음속은

"나 좀 사랑해줘"라는

말의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비판하고 수근거리고 엿보는 사람을 보는가?

당신도 비판하고 수근거리고 엿보지 말라.
그들의 문제는 참 사랑을 받지 못했고
참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이 더욱 약하기에 가시를 내고 그들의 과거를 보면
힘든 과거를 가진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주님과 같이 그들을 이해하는 공감이 필요하다.
더욱 더 많이 사랑을 주어야 그들의 마음이 바뀐다.

종종 이런 사람을 만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더 많은 사랑이 필요한 사람이다라고…

기억해야한다.
주님은 그들을 나무랐지만 결국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님의 책망만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려 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어느 순간 죄인의식을 가진 의인에서
의인의식을 가진 죄인으로 변해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의식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찾아감이다.

예수님은 늘 아픔을 공감하시면서 찾아감을 선택하셨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 부르셨고,
18년동안 귀신들린 여인을 찾아 부르셨고 (13장),
수종병든 자를 데려다가 고치셨고(14장),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먹으셨다(15장).

성경의 역사는 죄인을 찾아오신 하나님의 역사이다.

아픔을 공감하고 그들과 함께 있기를 원하신 예수님은 찾아가셨다.

그러나 수근거리고 엿보는 자들의 공통점은 절대 찾아가지 않는다.
아니 찾아 오는 사람도 흠을 잡아 내어 좇는다.
잘하는 것은 보고 있질 못하고
어떻게든 흠을 잡아 문제를 삼는다.

이런 사람은 칭찬은 형식이고
수근거리고 엿보면서 죽어가는 사람을 더 죽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천국 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고 선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마23:1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찾아감이 없는 사람은
찾아 오는 사람들의 아픔과 마음을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하는 사람은 찾아가게 된다.
그것에 예수님의 마음,
죄인의식을 가진 의인의 마음이다.


예배는 많은데,
말씀은 많이 아는데
찾아가지 않는 우리의 신앙은 벌써 의인의식 속에 갇혀있다.

찾아가야 마음이 생기고
찾아가야 공감이 더욱 불 붙는다.

앉아서,
교회 안에서 머무는 신앙은 결코 생명이 없다.
아니 있는 불도,
생명도 죽이게 된다.

찾아가야 산다.
찾아감을 잃어버리고 책상에 앉아서
예배당에 앉아서
머리로 하는 모든 것은
의인의식속에 갇힌 나를 명확히 보여주는 모습이다.

예수를 따른 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 한다는 것은
이 예수님의 찾아감을 따르는 것이다.



둘째, 찾아감은 환영하고 같이 먹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식사 손님이 곧 나의 수준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보다 수준 낮은 사람과 식사를 잘 안하려 한다.

그래서 내가 환영 받는 자리는 좋아하지
그들이 환영할 자리는 좋아하지 아니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환영 받는 자리를 찾아가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죄인을 환영하고 영접했다.

자리를 바꿔야 한다.
내가 환영하고 맞아야 한다.
내가 환영 받는 자리는 사양해라.

그것이 죄인의식을 가진 자의 자세이다.

우리가 회복해야할 것은 찾아감의 영성과 환영의 영성이다.
찾아감 없는 수근거림과 엿봄은 내 영혼을 마르게한다.
그러나 찾아가며 내가 보기에 약해보이는 자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을 환영하는 마음은 우리의 영혼을 풍성하게 한다.
거기에 더 풍성한 하늘의 상급과 이 땅에서의 기쁨의 누림이 있다.



셋째, 사람들의 평가이다.

사람들이 나를 평가할 때 나는 누구와 함께 있는 자로 평가하는가?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고 음식을 먹는 죄인들의 친구로 평가되었다.

나는 어떤가?
나는 부자들과 똑똑한 사람들과 나를 환영하는 사람들과
내 이름이 나는 사람들과만 있는 사람은 아닌가?

내를 영접할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영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있다고 소문이 나야한다.

교회가 환영할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환영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몰려와야 한다.

마음이 가난하고,
인생의 아픔이 있고,
슬픔의 시간을 지나는 사람들로 채워져야 한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가?
기존의 교인들은 환영을 받으려고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환영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다시 채워 질것이다.

교회는 고사하고 나는 자꾸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
나는 자꾸 수준이 높아지고
이름이 높아지고
인기가 올라가면 결국 예수님과 멀어지는 나를 보게 된다.

나는 나이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고
이름도 없고
인기도 없으니 예수님과 가까운가?

아니다.

내 안에 환영해야 할 얼굴이 기억되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예수님과 먼 사람이다.

다들 산다고 바쁘다.
기도하기는 이런 환영하는 일들로 좀 바쁘면 좋겠다.
교회가 이런 약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일로 좀 시끄러우면 좋겠다.
믿는 자들이 이런 약한 자들,
힘없는 자들을 영접한다고 바쁘면 좋겠다.

바쁜 이유?
다 내 이름 높아지려는 속셈이다.
그것 말고는 없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곧 나의 평가가 되고 싶다.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서목사는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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