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발이 달라서(눅14:1-14)
첫째, 예수님은 사람과 사물을 나의 자녀로(아들) 나의 사명(소)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회만 되면 고치셨고 돌봐주셨다.
그러나 반대의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욕했고 시비를 걸었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생각의 출발이 다르면 관계도 달라진다.
대우도 달라진다.
목이 말라도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체하고
배가 고파도 남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고
죽어가도 모른체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자녀가 아니고 나의 사명이 아니고
내가 이겨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고 내가 밟고 내가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면 출발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고
세상은 우리를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대한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경쟁이고 싸움이고 전쟁이다.
그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그러나 주님은 욕을 먹어도 안식일에 영혼을 고치시고
육신을 고치시고 병을 치유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고 세상은 우리를 경쟁의 대상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자녀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이 죽으셨다.
우리를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살려야 하는 대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세상을 출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잔치를 청할 때 너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다시 불러서 더 많이 베풀 수 있고
다시 더 많이 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청하지 말라고 했다.
부모로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그저 부모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더욱 귀하다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경쟁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의 관계에서 잔치를 베풀라 하신다.
다시 청함 받을 사람들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받을 수 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고 했다.
그것이 더 부모의 마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행의 출발이 경쟁으로 출발한다면
주의 일을 경쟁의 관점,
저 사람보다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더 하고
더 인정받고 더 높아져야 하는 관점에서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경쟁이 없는 곳은
더 이상 돌려 받을 것이 없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
일에 헌신하고 베푸는 것이다.
셋째, 경쟁의 마지막은 뭔가? 내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잔치는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높은 자리에 내가 앉아 굴림 하려 하고
폼 내려 하고 자랑하려 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아예 방지 하기 위해서 낮은 자리에 처음부터 앉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과 사람들이 높여주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해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높다는 것을 자리로 확인시켜주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함에 수 없는 자리를 기록한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나 보다 늘 더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높아도 나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부끄럽게 되지 말고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높이시고
사람들이 높여줄 때가 진짜 높아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높아짐의 법칙은
타락한 세상에 반대로 세우셨다.
그 법칙들은,
살려면 죽고 죽으면 산다.
높아지려면 낮아지고 낮아지면 높아진다.
경쟁하려면 싸우고 섬기면 평화가 온다.
세상은 경쟁으로 사람과 사물을 이해하고 주님은 아들로 사명으로 보신다.
그래서 세상은 죽이기 위해서 잠깐 우리를 살리고
주님은 살리기 위해서 잠깐 우리를 죽이신다.
세상은 완전히 쳐 박아 버리기 위해서 잠깐 높이고
주님은 완전히 높이기 위해서 잠깐 낮추신다.
세상은 서열을 세우기 위해서 경쟁해서 싸우게 하고
주님은 존귀케 하기 위해서 경쟁하지 말라고 거저 주라고 하신다.
세상은 늘 경쟁의 대상으로 사람을 이해하라고 이기라고 싸우라고 말하고
주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섬기라고 하신다.
출발이 다르면 사는 것도 다르고 마지막도 다르다.
주님은 사랑해야 할 자녀로 대하고 우리는 경쟁해야 할 죽여야 할 대상으로 대한다.
그 출발이 변하지 않으면
사람을 향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주님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주님처럼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늘 보던 그 사람을
우리는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가?
주님은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신다.
신앙이 깊다는 것은
첫째, 예수님은 사람과 사물을 나의 자녀로(아들) 나의 사명(소)으로 본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회만 되면 고치셨고 돌봐주셨다.
그러나 반대의 사람들은 기회만 되면 욕했고 시비를 걸었고 비판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들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여겼다.
생각의 출발이 다르면 관계도 달라진다.
대우도 달라진다.
목이 말라도 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른체하고
배가 고파도 남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고
죽어가도 모른체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자녀가 아니고 나의 사명이 아니고
내가 이겨야 하는 경쟁의 대상이고 내가 밟고 내가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면 출발이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고
세상은 우리를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대한다.
그래서 세상의 끝은 경쟁이고 싸움이고 전쟁이다.
그것이 세상의 방법이다.
그러나 주님은 욕을 먹어도 안식일에 영혼을 고치시고
육신을 고치시고 병을 치유하신다.
주님은 우리를 자녀로 대하고 세상은 우리를 경쟁의 대상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자녀를 위해 싸우지 않고
자신이 죽으셨다.
우리를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죽어서라도 살려야 하는 대상으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세상을 출발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잔치를 청할 때 너를 경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한다.
그들은 다시 불러서 더 많이 베풀 수 있고
다시 더 많이 돌려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청하지 말라고 했다.
부모로서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그저 부모의 마음으로
나눌 수 있고 다시 받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더욱 귀하다는 것이다.
둘째, 주님은 경쟁이 아니라 거저 주는 사랑의 관계에서 잔치를 베풀라 하신다.
다시 청함 받을 사람들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다시 받을 수 없는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 주님의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벗이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한 이웃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저는 자들, 맹인들을 청하라고 했다.
그것이 더 부모의 마음에 가깝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행의 출발이 경쟁으로 출발한다면
주의 일을 경쟁의 관점,
저 사람보다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더 하고
더 인정받고 더 높아져야 하는 관점에서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마음,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신다.
경쟁이 없는 곳은
더 이상 돌려 받을 것이 없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사람들,
일에 헌신하고 베푸는 것이다.
셋째, 경쟁의 마지막은 뭔가? 내가 높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잔치는 베푸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 높은 자리에 내가 앉아 굴림 하려 하고
폼 내려 하고 자랑하려 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아예 방지 하기 위해서 낮은 자리에 처음부터 앉으라는 것이다.
자신이 높아지는 것과 사람들이 높여주는 것은 다르다.
사람들은 자리에 연연해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높다는 것을 자리로 확인시켜주려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함에 수 없는 자리를 기록한다.
기억해야 하는 것은 나 보다 늘 더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높아도 나 보다 더 높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결국 자리를 내어주게 되고 부끄럽게 되지 말고
겸손하게 낮은 자리에 앉아 하나님이 높이시고
사람들이 높여줄 때가 진짜 높아질 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주님의 높아짐의 법칙은
타락한 세상에 반대로 세우셨다.
그 법칙들은,
살려면 죽고 죽으면 산다.
높아지려면 낮아지고 낮아지면 높아진다.
경쟁하려면 싸우고 섬기면 평화가 온다.
세상은 경쟁으로 사람과 사물을 이해하고 주님은 아들로 사명으로 보신다.
그래서 세상은 죽이기 위해서 잠깐 우리를 살리고
주님은 살리기 위해서 잠깐 우리를 죽이신다.
세상은 완전히 쳐 박아 버리기 위해서 잠깐 높이고
주님은 완전히 높이기 위해서 잠깐 낮추신다.
세상은 서열을 세우기 위해서 경쟁해서 싸우게 하고
주님은 존귀케 하기 위해서 경쟁하지 말라고 거저 주라고 하신다.
세상은 늘 경쟁의 대상으로 사람을 이해하라고 이기라고 싸우라고 말하고
주님은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용납하고 용서하고 섬기라고 하신다.
출발이 다르면 사는 것도 다르고 마지막도 다르다.
주님은 사랑해야 할 자녀로 대하고 우리는 경쟁해야 할 죽여야 할 대상으로 대한다.
그 출발이 변하지 않으면
사람을 향하여 주님의 마음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주님과 다른 길을 가는 것이다.
주님처럼 사랑의 대상으로 사람을 대해야 한다.
가장 가까운 사람,
내가 늘 보던 그 사람을
우리는 경쟁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가?
주님은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신다.
신앙이 깊다는 것은
종교적, 교회 생활이 깊이 관여한다는 것이 아니다.
신앙이 깊다는 것은
주님의 이 출발이 같아짐을 의미한다.
* 2009년 은빈이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내가 지나온 이 영적 세계를 은빈이가
잘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아픔도 외로움도 지나야하는 이길을
넉넉하게 풍성하게 기쁨으로...더 보기
* 2009년 은빈이와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내가 지나온 이 영적 세계를 은빈이가
잘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아픔도 외로움도 지나야하는 이길을
넉넉하게 풍성하게 기쁨으로...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