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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생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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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생존(눅13:10-17)

하나님은 생명으로 살고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산다.
하나님은 생명을 불어 넣는 일을 하시고
우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서 산다.
...
아담의 선악과 사건은 스스로 살기 위해서 더 높아지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삶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자신만을 위해서 사는 인간에게
형벌로 스스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내 버려두셨다.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생명이 없고 오직 붙어 있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생존하는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간 스스로의 선택이고 결과이다.

그러니 어떤 일의 기준은 늘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자신의 목숨을 지켜야하는
생존의 삶을 산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스스로 있는 생명의 근원으로 하나님의 존재는 생명이고
그분의 터치가 있는 곳에는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어제도 묵상했지만 우리의 회개는 곧 생명으로의 복귀이다.
생명이 아니라 육체의 목숨을 위하여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문제가 중요합니다.

나는 괜찮고 다른 사람은 안되는 것은
나는 생존을 위해서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생명의 회복과 풍성한 삶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생명의 공급을 거저 받는 것입니다.


[사55:1]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음입니다.

내 안에 생명이 없으면
나는 생존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어떤 것이든 뺏어야 하고
잘되는 것은 용납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없는 자의 특징은

첫째, 모든 삶이 생존을 위해서 삽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잘됨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합니다.
그래서 배가 아픕니다. 아니 잘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래야 내것 내 배를 채울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문제로 여기는 것보다 본질적으로
나의 잘됨보다 다른 사람의 잘됨이 생존의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남들이 잘되면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는 뭐하는거지, 나는 뭐지,
나는 왜 이렇지라고 생각하는 것이 생존에 매여서 그렇습니다.

둘째, 생명이 없는 사람은 생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나귀나 소에게 안식일에 물을 먹이지만
자기의 일이 아니면 당장 사람이 죽어도 돌아보지 않습니다.
생존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것을 단지 천국 가는 것으로만 여깁니다.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생명과 풍성한 삶을 말합니다.
이전에는 내가 공급해야 하는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심을 믿고 그 믿음으로 실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 말씀으로 겨자씨를 말합니다.
생명으로 수 많은 새들이 와서 먹고 노는 것을 말합니다.

겨자씨가 크게 자란 것 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작은 것에서 크게 자라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찾아오고 생명의 순환을 말합니다.

이 하늘의 생명의 풍성함을 믿지 못하니 아직 나의 생존을 위해 살고
다른 사람의 생명으로 가는 것을 싫어하고 아니 미워하는 것입니다.

셋째, 감정이 반대로 반응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아는 자,
그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생명이 찾아옴을,
생명을 회복함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생명이 없는 생존의 사람들은
남들이 기뻐할 때
싫어하고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말합니다.

너무 자신의 생각을 많이 피력하는 사람,
너무 자신의 기준을 많이 주장하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생존의 위협안이 있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언제 다른 사람의 잘됨을,
언제 다른 사람을 돌아보지 않고,
언제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지 아십니까?

내 안에 생명이 말라가고 내 안에 생명의 풍성함이 없을 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12장에서부터 연결해서 계속 영혼과 생명에 관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영혼과 생명에 있어서 가장 좋지 않은 것이
없으면서 있는 척 하는 것,
안 하면서 하는 척 하는 것입니다.

겉은 속입니다.
그러나 속, 내 마음은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될 때 내가 기뻐하는지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을 돌리는지
봐야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이 잘될 때 진정으로 기뻐하고 하나님께 함께 영광을 돌리면
내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보며
잘되는 것을 이성으로 합리로 또 다른 어떤 명분으로 따진다면
나는 아직 내 안에 생명이 없는 외식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잘됐어~ 그런데 그 사람은 이게 문제야~~"
이런 생각이라면 이런 말을 아직도 한다면 아직 하나님의 본성인
생명이 내 안에 머물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생명은 있지만 생명의 풍성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의 특징은 뭘까요?

첫째, 적극적입니다.

예수님은 18년 동안 귀신들려 꼬부라져서 조금도 펴지 못한 여인을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고치셨습니다.

우리는 어려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거야,
하나님의 고치실거야 나는 기다려야지 하나님이 하시겠지~

믿음이 참 좋은것처럼 보입니다.
아닙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을 원합니다.
내가 함께 참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생명을 살리는 것이고
생명을 얻고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보고도 가만히 있는 것은 내 안에 믿음이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 모든 중심은 세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만하면,
일만하면 사람들을 망하게 하고
좌절하게 하고
아프게 하고
실망하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은 영입니다.
말을 통해 내 영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모든 말은 세움이 되어야합니다.
모든 행동은 세움이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섬김이고 그래서 헌신이고 그래서 봉사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세움입니다.

우리는 다 비판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 문제가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움을 전제로한 것 이어야합니다.
세움이 없는 말과 수고는 헛된 것이고 다른 사람을 더욱 악한 곳으로
인도하는 자입니다.

셋째, 내가 말한 곳에 내가 일한 곳에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병에 놓임을 받는 여인도, 그것을 지지하고 바라보는 무리도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어떤 이유도, 어떤 현실도 우리의 기쁨을 막지 못하게 해야합니다.
생명으로 일하지 않은 곳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오늘 내가 열심히 살았는데 기쁨이 없나요?
생명으로 살지 않고 생존으로 살아서입니다.

생명으로 산 곳에는 기쁨이 존재합니다.
기쁘지 않은 모든 것은 죄입니다.
믿음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생명이 더욱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은 기쁨을 가져다 줍니다.
생명으로 일한 현장에는
나에게 기쁨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줍니다.

생존을 위해 살지 않고,
생명으로 사는
그래서 나의 것만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일도 기쁨으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요10:10]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이 아니면 우리는 도적이 됩니다.
영적인 세계는 생명이든지 도적이든지 둘중에 하나입니다.

나는 생명으로 살고 싶습니다.
나도 모르게 도적이고 싶지 않습니다.


* 지난 4/10-13일까지 선교사컨퍼런스가 있었습니다.
주강사였던 대학연합교회 김형민목사님입니다.
시집도 한권 선물 받았습니다.
순수한 믿음을 보았고, 강력한 복음을 들었고,
그분을 쓰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Pastor 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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