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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흙이다

사람은 흙이다

 

 

 

 

 

 

 

 

사람은 흙이다(눅12:13-21)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첫째, 물질을 주관하는 분으로만 생각한다. 
 
사람들의 실수는 영혼을 주장하는 분을 물질에 묶어두려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과 영혼을 능히 멸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물질에 머물러있다.

예수님을 겨우 물질적 복에만 국한시켜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이 신앙이 있다라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고 물질의 복을 받고 세상적으로 잘됨이
예수님의 일로 제한한다.

겨우 공부 잘하는 것,
직장에서 잘되는 것,
돈 잘 벌어서 선교하는 것,
겨우 그 정도로 예수님을 이용하는데 그친다.
우리의 기도가 그 증거이다.

그런데 얼마나 포장을 잘하는지 기도도 삶도 참 거룩해 보인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룩이라 하고 외식이라 한다.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일수록 포장을 잘하고
겉과 속이 다르다.
겨우 물질적인 것을 구하면서 예수님을 잘 믿는 것으로
포장하고 살기 때문이다.

포장의 귀재들 나셨다~


둘째,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는 것에 하나님을 이용한다.

사람들의 목적,
사람들이 추구하는 목표를 정말 잘 살펴보면
잘 먹고,
잘 마시고,
그래서 즐기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고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재물을 쌓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한다.

실수가 뭔가?
하나님께 사용 당해야 할 우리가
우리의 목적 우리의 재물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데 있다.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은
우리를 통해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데
우리의 거룩한 이름을 내기 위해
예수님의 이름을 하찮게 이용한다.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누구인가?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하나님께 많이 이용당하는 자이다.

우리의 한계는
육체에 머물러 있고
우리의 관심은 늘 육체이다.

고상한척하고
거룩한척하고
있는 척 하지만
결국 그들의 관심은 늘 육체이다.

그래서 사람은 두려워한다.
육체를 위해서 살기 때문이다.

육체를 위해 살지 않는 자는 두려움이 없다.
육체에 메이지 않기 때문에
영혼의 자유함을 누린다.

뭘 먹을지
뭘 마실지
뭘 입을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영혼에 자유함을 누린다.



세째, 유산을 나누게 해달라는 자와
부자의 공통점은 육체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 영혼이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영혼도 보이지 않는다.

내 영혼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복도 보이지 않고 불행도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나의 육체의 쌓은 쾌락만 느끼고 보인다.

영혼에 관심이 없으면 육체가 신이 된다.

영혼에 언제 관심이 생기는가?
가난한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할 때이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할 때이다.

심령의 가난은 영혼의 소리를 듣는다.
육체,
물질에 감각이 살아 있는 사람은
영혼의 감각,
영혼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내 영혼의 소리도 듣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영혼의 아픔과 슬픔의 소리도 듣지 못한다.

부자여도 영혼의 소리를 알고 듣고 보이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나 부자가 영혼의 소리를 듣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

그것은 오직 성령에 매임을 받을 때 가능하다.

심령이 가난할 수 있도록 나의 영혼을 묶어야 한다.
매임바 되어야 한다.

내가 매임바 된 자는 울어야 할 현장이 있고
영혼이 있고
이유가 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흙이다.
그 말은 사람은 본질적으로 육체적이라는 것이다.
그 육체에 생기가 들어가야
영혼의 소리가 들리고
영혼의 생명이 생긴다.

하나님의 생기는
하나님의 일을 할 때만 생긴다.

그래서 21절 후에 22절부터
그 흙인 육체에 생기를 넣는 방법을 설명하신다.


흙,
육체는 생기가 들어갈 때
흙이 아니라 영혼이 되는 것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