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용서입니다.
예수를 믿고 용서를 알지 못한 사람은 십자가 죽음,
십자가 보혈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진정한 십자가의 의미는 고난을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용서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 죽기까지 용서하신 십자가입니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원하는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의 방향은 십자가 즉 용서입니다.
왜 우리가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하는가?
용서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용서 받은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우리가 받은 엄청난 축복은 용서입니다.
그 용서가 내 영혼에 흐를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이유는
용서받지 못할자가 용서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원천은 용서입니다.
사람들은 자꾸 십자가의 아픔을 묵상하고 고난을 묵상합니다.
아닙니다. 고난이 아니라 아픔이 아니라 용서를 묵상해야합니다.
그래야 사랑이 됩니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내가 얼마나 많이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위함이라.
우리의 모든 허물 모든 죄악을 용서하신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용서의 현장을 밟고 우리의 성공을 위해 이용합니다.
십자가를 우리 성공의 부적으로 이용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을 내가 세상에서 유명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용서의 처절한 몸부림이요
용서의 완성이요
용서의 모델입니다.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은 용서를 만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의 십자가는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하늘에서 이우어진 뜻은 용서입니다.
아담 이후에 깊고도 찬란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역사는 용서를 향하여 흘러왔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겠느냐라고 물으신 예수님의 답은 더 많이 용서 받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쟁이 입니다.
하나님을 안다하면서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 받았다고 하면서
참 용서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시작은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십자가는 용서여야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하신 십자가의 이유입니다.
왜 삼일 일까요?
죽음가운데 삼일 입니다.
삼일의 의미는 완전한 죽음입니다.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완전한 용서를 지나야 완전한 부활을 만납니다.
완전히 죽음은
나 자신에 대하여
이웃을 향하여
세상을 향하여
완전한 용서를 의미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완전한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문제는
다른 사람보다 적게 용서 받았다고 여기는 생각의 게으름입니다.
생각의 게으름은 우리를 십자가 앞에 온전히 서지 못하게하고 고난만 묵상해서 다시 더 많이 고난을 받아야 예수를 잘믿고
더 땀흘려야 더 수고해야 십자가다운 삶이라 생각합니다.
여기까지가 생각의 한계 복음의 한계로 묶어버립니다.
생각의 게으름입니다.
십자가는 열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은 십자가를 율법으로 돌리려합니다.
십자가는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의 현장,
완전한 뜻을 이루신 현장이 십자가입니다.
부활주일 전입니다.
고난이 아닙니다.
고난늘 넘어 죽음을 묵상하고
죽음을 넘어 용서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이루신 것은
완전한 용서입니다.
십자가는 용서입니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의 다른 이름은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려하지 용서의 강을 지나지 않으려합니다.
요단강의 의미는 과거의 내가 완전한 용서의 강을 지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죽이시는 것입니다.
나를 십자가로 용서의 강을 건너게 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은 용서를 만나야 부활을 만납니다.
그 용서가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은 빵이 아닙니다.
먹을것 입을것을 이방인처럼 구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육신의 빵을 위해 기도하라고만 가르치셨다고 생각하면 주님의 깊은 뜻을 모르는 것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늘의 양식입니다.
하늘의 뜻을 이루는 용서를 위해 필요한 영적인 양식입니다.
주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이라 하셨습니다.
하늘의 양식입니다.
세상의 영은 육신의 양식,
육체를 위한 일용할 양식으로 제한합니다.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양식입니다.
용서에 필요한 영적,
하늘의 양식.
아버지의 뜻입니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다름없는 교회의 가벼움을 버려야합니다.
육체를 채우는 기도에서
영혼을,
하늘의 뜻을 채우는 기도로 방향성을 바꾸어야합니다.
십자가를 자꾸만 우리의 뜻을 이루기 위한 가벼움에서
참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현장이기를 기도합니다.
십자가는 용서의 자궁입니다.
십자가는 단회적 묵상이 아닌
날마다 구해야할 내 삶의 용서의 강이 되어야합니다.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의 참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