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적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이 되는 것이다. (눅11:45-54)
이 세대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표적을 구하는 세대이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많은 표적을 보여줘도
또 표적을 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그런 표적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 즉 죽음만이
진정한 표적이라고 말씀하셨다.
표적을 구하는 세상에서
오직 표적만을 구하는 세상에서
진정한 표적은 자신의 죽음으로
세상의 모든 욕구와 욕망을 이기는 표적이다.
표적을 구하는 세상과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너희가 표적이 되어라고 하시는 것이다.
표적을 구하는 세상에
자신이 스스로 죽음으로 표적이 되시는 것이다.
오늘 바리새인에게 겉으로 가르치고 겉으로 그런척 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표적이 되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던 율법사들도 스스로 찔림을 받아
왜 우리까지 모욕을 하느냐고 대항한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에게만 표적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라고 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신다.
그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존경하고 따르는듯하지만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과 같이
당시 사람들은 표적만 구하고
이제는 무덤을 만들어 조상들을 따르는 무리가 되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었다.
아니 박해하고 죽이는 사람들이 될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 세대의 문제는 표적을 구하는 세대이다.
그러나 표적을 구하면 결국
선지자를 죽이고 사도를 죽이고 결국 예수님을 죽인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표적을 구하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로서 표적을 구하면 결국
예수님도 죽이고
선지자도 죽이고
사도도 죽이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주님은 무슨 표적을 구하라고 하시는가?
이 세대를 향하여 주시는 유일한 표적은
요나의 표적이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자신이 표적이 되었다.
세상에 대한 진정한 표적은 자신의 죽음이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여줄 유일한 표적이다.
더 큰 기적과,
더 놀라운 이력과,
더 높이 쌓은 실력을 이 세대는 구한다.
또 그렇게 표적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세대가 이 세대이다.
그러나 주님은 결국 보여주고 싶은 표적은
자신의 표적 즉
죽음이다.
세상에 대하여 날마다 죽는 표적만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보여줄 표적이다.
표적은 구하는 것이 아니라
표적은 내가 되는 것이다.
조상부터 흘린,
창세 이후로 흘린 피는 표적을 구하기 때문에 흘렸다.
사람들은 봐도 보지 못한다.
수 많은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도
이 표적을 구하는 욕망이 죽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을 죽인다.
누군가를 죽이고
그들은 순교했다고 참 귀하게 죽었다고
무덤도 만들고 기념도하지만
결코 그들이 추구했던 요나의 표적,
스스로 표적이 되어 죽음을 따랐던 그 길은 가지 않고
또 다른 표적을 구하고 살아간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지도 모르고,
수 많은 사람들 죽이면서도
또 표적을 구하고 죽일 자들을 찾아 다니는 세상이다.
주님은 그런 세상을 향하여
오직 하나의 표적이 되셨다.
요나의 표적이다.
세상은 내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라고 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표적을 구하므로
내가 하나님이 됨을 보여주려 한다.
내가 주인 되고 내가 표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으로 서려 한다.
요나의 표적만이 답이다.
어떻게 요나의 표적이 되어야 하나?
첫째,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나의 실수, 나의 과거를 인정해야 한다.
사람은 왜 죽지 못하는가?
나의 길,
나의 생각,
나의 방향이 맞다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사람은
자신의 일에 소신이 있고, 확신이 있고 거기다 믿음까지 있으면
이런 사람은 여러 사람 죽인다.
믿음, 소망, 사람이 아니라
소신, 확신, 믿음으로 산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지 않고 다른 사람을 죽인다.
내가 틀릴 수 있다고 여기고 사람들 앞에 서야 한다.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세상에 대하여 요나의 표적의 삶을 사는 시작이다.
둘째,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실수는 자꾸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운다.
짐을 지운다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표적을 구한다는 것이다.
짐은 지우는 것은 일을 맡긴다는 것인데
그 일을 통해 나는 짐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내가 짐을 진다는 말이다.
내가 표적이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어려운 일일수록 내가 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죽는 시작이다.
다른 사람은 다 죽으라 하고 나는 죽는 일에 결코 서지 않는다.
조금 더 땀 흘리고 조금 더 헌신하고 조금 더 낮아지는 자리는
처음부터 마음이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보내고,
다른 사람을 세우고,
다른 사람을 민다.
그래서 나는 선교사가 되기 싫고
가장 쉬운 돈만 조금 보내서 내 짐을 지우는 것이다.
내가 교회 일은 하기 싫고 돈만 줘서 대신 시키는 마음이다.
지금 한국은 돈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고
땀과 함께 물질이 가고 수고의 자리에 가야 한다.
셋째, 지식의 열쇠는 행함의 문을 통과해야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눅11:52)
한국처럼 지식이 높은 나라도 없다.
일반 세상 지식뿐 아니라 성경도 얼마나 잘 아는지 목사 하기 힘들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지식의 열쇠를 통해 행함의 문을
통과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바리새인, 율법사들이 문제가 뭔가?
왜 화가 있다고 책망을 받는가?
알지만 하지 않아서다.
지식의 열쇠는 행함의 문을 통과해야 된다.
몰라서 못하나?
아니다.
알아도 내가 표적이 되지 않고
그 지식의 열쇠로 다른 사람들만 움직이고
행함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표적을 구하고 표적을 따르는 것 같지만
세상은 결국 요나의 표적이 되는 곳으로 모이게 되어있다.
예수님이 그랬고,
사도들이 그랬고,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다.
그것을 알아도
세상의 영은 우리를 유혹한다.
표적을 자꾸 구하라고.
표적을 구해서 그것으로 우리가 왕이 되라고 한다.
아니다.
진정한 왕은 죽음, 즉 요나의 표적이 되어야 된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다.
우리는 마지막에 온 세상을 심판하는 자리에 함께 앉아 있을 것이다.
겨우 먹는 표적,
겨우 입는 표적,
겨우 마시는 표적만 구하다
이 왕 자리를 놓칠 것인가?
표적을 구하지 말고 표적이 되어야 한다.
요나의 표적이…
그것만이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음이다.
*자유의 상징 넬슨 만젤라 대통령이다.
무력으로 억압에 항쟁하며
27년을 감옥에서 지내며
남아공에 자유를 가져왔다.
날마다 자신을 죽임으로
진정한 왕이되고
노벨평화상으로 세상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날마다 죽어야
요나의 표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