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이야기를 하다 왜 갑자기 등불이야기인가? (눅11:33)
오늘 본문은 등불로 시작해서 빛, 그리고 온 몸이 밝아야 한다고 하신다.
왜 등불로 시작해서 빛으로 와서 몸이 밝아야 하다고 연결하고 계시는가?
... 등불이면 등불이고 빛이면 빛이고 몸이 밝으면 몸이 밝아야 한다고 하시지
이 세가지를 연결해서 말씀하시는가?
이유는 기도부터 시작된다.
기도를 통해 주기도를 가르치셨다
그 주기도를 푸는 것은 성령이라 했다.
그래서 성령을 구하는 것이 기도의 핵심이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귀신을 좇아 내시는 이야기로 전환된다.
이 이야기는 소유권과 주권이 완전히 인정되는 상태까지 가야 기도의 완성이라 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예수님을 보고 세상 사람은 예수님을 아는 어머니가 복이 있다고 하자
예수님은 존재론적 가치가 아니라 행위론적 가치 즉 듣고 행함이 진정한 복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어제는 함께 포함하여 올린 요나의 표적이다.
행함의 근본은 죽음 즉 요나의 표적이다.
예수님은 세상이 원하는 행함의 오류를 잘 아신다.
행함은 결국 율법으로 간다.
행위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간다.
은혜로 얻은 구원을 행위로 얻는 율법의 구원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너무 잘 아시기에
이제는 그 모든 것을 완전히 이루는 것
즉 죽음을 세상에 대하여 이기는 법을 설명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을 열심이나 수고의 최고점에서 이루는 구원이 아니라
죽음을 이루는 구원의 법을 걸으셨고 완성하셨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오늘 본문부터 내일까지 말씀을 연결해서 설명하시는데
그 첫째 설명이 등불에 관한 이야기이다.
왜 등불을 설명하시는가?
등불의 핵심은 보는 것이다. 눈이다.
등불을 그릇 안이나 어떤 곳에 숨겨놓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유는 보게 하기 위해서다.
봐야 빛의 역할을 하는데 그 등불이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 자신을 말씀하신다.
요나의 표적, 솔로몬을 본 남방여왕, 니느웨 사람들이 본 요나의 전도 등은 보는 등불이 었다.
그 등불의 그림자는 요나이고 솔로몬이고 실체는 예수님이다.
예수님이 등불이다.
그래서 그들이 마지막 때에 증거하고 그 증거하는 그것보다 더 큰이가 여기있다라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설명한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31,32)
무엇을 설명하기 위하여 기도부터 이렇게 길게 설명하는가?
성령은 무엇을 설명하기 위함인가?
진정한 복의 실체,
진정한 등불의 실체,
요나와 솔로몬을 통해 말하려는 실체,
그리고 그 등불의 빛으로 봐야 하는 실체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 실체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그 실체인 예수그리스도를 눈으로 보라는 것이다.
"네 눈이 성하면 온 몸도 밝을 것이요"(34)
진정한 복이 무엇인가?
그것은 듣고 행하는 것이라 했다.
그런데 듣고 행하려면 전제가 있다.
들을 대상,
행할 말씀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실체를 볼 때,
느낄 때,
체험할 때 가능한데
그것을 눈으로 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눈은 듣고 행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빛은 그리스도이시다.
그 빛을 본 사람이 빛이 되는 것은 그 빛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이다.
오늘 본문 말씀의 전제는 빛 되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연결해서 그 빛이 참 빛이 되기 위해
우리 속이 완전히 깨끗하고 온전하여 지기 위해 설명하는 내용이
내일 나오는 바리새인과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문제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누가 듣고 행하는가?
보는 사람이다.
눈이 볼 것을 봐야 듣고 행한다.
보지 못하면 빛이 오지 못한다.
본다는 것은 육체적 눈을 의미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영적으로 본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축복이다.
내가 부 할 때는 영적 눈이 띄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눈을 뜨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고
영적인 눈을 떠야 할 필요를 못 느끼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하고,
슬픈 일이 찾아오고
기도할 일이 찾아오고
심령이 아플 때 육체의 성소를 지나
영적인 지성소에 이르는 것이다.
마당 뜰만 밟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눈물이다.
그 눈물이 진정한 영적 성소를 보게 하고
육체의 성소를 지나
영적 지성소에서 빛 되는 주님을 만나고
보게 되고 듣게 되고
행하는 축복이 찾아오는 것이다.
듣는 축복은
가난할 때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축복의 시작은 심령의 가난이다.
이 가난이 없는 사람은 절대 볼 수 없고
그래서 들을 수 없고
그래서 행할 수 없다.
오늘 예수님은
기도로 시작해서(주기도)
기도의 조건인 심령의 가난함(벗의 간청함)을 지나
기도의 본질인 성령을 지나
기도의 핵심인 소유권과 주권을 지나
참된 복을 설명하시면서 듣고 행하는 복이 진정한 복된자라 설명했다.
그리고 그 복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요나와 솔로몬을 니느웨 사람을 증인으로
그림자로 설명하시면서
등불 즉 빛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볼수 있는 눈을 설명했다.
왜냐하면
듣고 행하는 복의 시작은 그리스도를 볼수 있는 눈이다.
그 눈이 없으면 아무것도 들을수도 행할수도없는 것이다.
그 볼수 있는 눈의 조건은
가난한 심령,
가난한 마음이다.
그리고 그 빛이 내 몸 전체를 밝히는 것은 본 그 빛이 내 안에 온전하게 비치는 것인데…
그 비췸이 없는 빛은 아무것도,
그냥 어둠이라는 말인데
그 빛이 내 안에 전부 비치는 방법은 바로...
내일하자….
* 의료선교팀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이들이 빛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