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향성과 하향성(눅11:27-28)
어떤 유명한 사람을 보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하고 사는 사람, 저 사람의 가족,
저 사람을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은 참 좋겠다~
오늘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여인이 큰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당신을 낳은 태와 젖이 복이 있다.
즉 당신의 엄마는 참 좋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슨 말인가?
당신 같은 아들 가진 엄마가 참 부럽고 좋겠다는 것이다.
능력도 행하고,
힘도 있고,
하는 말마다 권세가 있고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니 당연한 소리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인가?
사람들의 수고의 대가가 무엇인가?
자녀이다.
자녀를 통해 뭔가 한번 누려보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늘 그렇다.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남편을 통해,
자식을 통해 한번 복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무엇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자녀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존재론적 복을 요구한다.
내가 아는 사람, 자녀, 남편 아내가 잘나가면
그것이 곧 나의 복이라 말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무르면 세상과 다름이 없다.
세상은 나의 혈연 관계를 통해 자랑을 누리고
그것이 나의 복으로 여기는 것에 그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무엇이 복이라고 하는가?
복은 관계론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론적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적 복은 행위론적 복에서 온다는 것이다.
좋은 자녀를 가진 사람이 복은 받은 것도 맞지만
좋은 자녀를 가졌다고 진정한 복이 아니라
좋은 자녀가 사는 삶을 함께 따라 살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안다고 다 복을 누리는가?
아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때로 복이긴 하지만
진정한 복은 행동이 따를 때 복이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으로 안위하고 위안 삼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은 행위론적으로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라 말한다.
이세상을 악한 세상이라 하셨고,
이 세상이 구하는 것은
이런 예수님의 이적, 즉 표적만을 구한다라고 하셨다.
세상은 늘 표적을 구한다.
그 표적을 구하는 사람을 아는 것으로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그 표적을 가진 것으로 내가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꾸 표적을 구한다.
어떤 표적?
잘 나가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인기를 누리는 것~
높아지는 것이다.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어떤 것,
유명해 지는 어떤 것이다.
세상의 복은
그런 표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면
그런 표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나의 가장 친한 사람으로 가지는 것 둘 중에 하나다.
그런 표적을 구하는 세상에서 보여줄 표적은 오직 하나다.
죽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의미하나 ?
죽음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세상을 이긴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표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살려고 하고 더 큰 표적을 구한다.
더 많이 모으려하고 그래서 더 인기 있으려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표적을 구하는 욕심이 숨겨져있다.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늘 상향성의 본성이 잠재하고 있다.
그 상향성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표적구함을 향하여
오늘 예수님은 오직 요나의 표적 즉 하향성의 표적만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날도 표적을 구하는 세상을 향하여
하향성 즉 자꾸 내려가는 표적을 구하라 하신다.
복이 무엇인가?
상향성을 향하는 세상에서
하향성을 추구하는 인생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그것은 하향성의 표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세상에게 우리가 보여줄 것은 하향성이다.
그것이 복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상향성의 복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서 더 나아가 하향성의 삶 즉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향성의 삶을 사셨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함께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먹고 마셨으며
음부에까지 내려가셨다.
그것이 하향성이다.
삭개오는 높은 자리에서 산 죄인이다.
그는 그래서 내려왔다.
나무에서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이다.
상향성을 추구하던 그가
이제는 하향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하향성을 추구한다.
상향성을 향하여 나아가면 사람들을 이용하던 인생에서
하향성을 향하여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삶으로서의 결단을
주님은 구원으로 연결하시는 것이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도다~
구원이 없는 상향성의 삶,
기쁨이 없는 상향성의 수고,
하나님의 인정이 없는 열심과 땀은
이제 요나의 표적처럼 하향성을 향하여 내려가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세상은 소리친 여인처럼
상향성의 기회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회를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기회로 삼으셨다.
아래로 내려가는 기회를 잡는 것
그것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의 본질이다.
*베레나 교회 학생들입니다.
의료선교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눈을 마주치는현장이
하샹성을 향한 표적의 시작입니다.
어떤 유명한 사람을 보면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한다.
저 사람하고 사는 사람, 저 사람의 가족,
저 사람을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은 참 좋겠다~
오늘 예수님을 보면서 어떤 여인이 큰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 당신을 낳은 태와 젖이 복이 있다.
즉 당신의 엄마는 참 좋겠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무슨 말인가?
당신 같은 아들 가진 엄마가 참 부럽고 좋겠다는 것이다.
능력도 행하고,
힘도 있고,
하는 말마다 권세가 있고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니 당연한 소리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이 세대를 표현하는 말이다.
사람들의 관심이 무엇인가?
사람들의 수고의 대가가 무엇인가?
자녀이다.
자녀를 통해 뭔가 한번 누려보겠다는 것이다.
세상은 늘 그렇다.
내가 아는 사람을 통해, 남편을 통해,
자식을 통해 한번 복을 누려보자는 것이다.
세상사람들의 복의 개념이 무엇인가?
내가 아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의 자녀가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것을 복이라고 말한다.
존재론적 복을 요구한다.
내가 아는 사람, 자녀, 남편 아내가 잘나가면
그것이 곧 나의 복이라 말한다.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런데 거기서 머무르면 세상과 다름이 없다.
세상은 나의 혈연 관계를 통해 자랑을 누리고
그것이 나의 복으로 여기는 것에 그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무엇이 복이라고 하는가?
복은 관계론적인 것이 아니라 행위론적이라는 것이다.
존재론적 복은 행위론적 복에서 온다는 것이다.
좋은 자녀를 가진 사람이 복은 받은 것도 맞지만
좋은 자녀를 가졌다고 진정한 복이 아니라
좋은 자녀가 사는 삶을 함께 따라 살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를 안다고 다 복을 누리는가?
아니다.
예수를 안다는 것이 때로 복이긴 하지만
진정한 복은 행동이 따를 때 복이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다는 것으로 안위하고 위안 삼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은 행위론적으로 듣고 지키는 것이 복이라 말한다.
이세상을 악한 세상이라 하셨고,
이 세상이 구하는 것은
이런 예수님의 이적, 즉 표적만을 구한다라고 하셨다.
세상은 늘 표적을 구한다.
그 표적을 구하는 사람을 아는 것으로 내가 얼마나 복을 받았는지
그 표적을 가진 것으로 내가 세상에서 잘나가는 사람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세상은 자꾸 표적을 구한다.
어떤 표적?
잘 나가는 것~
돈 많이 버는 것~
인기를 누리는 것~
높아지는 것이다.
표적의 의미는 세상에서 높아지는 어떤 것,
유명해 지는 어떤 것이다.
세상의 복은
그런 표적을 일으키는 사람이 되는 것
아니면
그런 표적을 일으키는 사람을
나의 가장 친한 사람으로 가지는 것 둘 중에 하나다.
그런 표적을 구하는 세상에서 보여줄 표적은 오직 하나다.
죽는 것이다.
요나의 표적은 무엇을 의미하나 ?
죽음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다.
세상에 대하여 죽어야 세상을 이긴다.
그것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표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살려고 하고 더 큰 표적을 구한다.
더 많이 모으려하고 그래서 더 인기 있으려하고,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표적을 구하는 욕심이 숨겨져있다.
아니라고 하지만 우리의 내면에는 늘 상향성의 본성이 잠재하고 있다.
그 상향성을 향하여 가는 우리의 표적구함을 향하여
오늘 예수님은 오직 요나의 표적 즉 하향성의 표적만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날도 표적을 구하는 세상을 향하여
하향성 즉 자꾸 내려가는 표적을 구하라 하신다.
복이 무엇인가?
상향성을 향하는 세상에서
하향성을 추구하는 인생이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하셨다.
그것은 하향성의 표적이다.
우리에게 필요한것은
세상에게 우리가 보여줄 것은 하향성이다.
그것이 복이다.
세상은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상향성의 복을 부러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에서 더 나아가 하향성의 삶 즉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하향성의 삶을 사셨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셨고,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함께 내려오셨고
죄인들과 먹고 마셨으며
음부에까지 내려가셨다.
그것이 하향성이다.
삭개오는 높은 자리에서 산 죄인이다.
그는 그래서 내려왔다.
나무에서 내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상징이다.
상향성을 추구하던 그가
이제는 하향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삶의 하향성을 추구한다.
상향성을 향하여 나아가면 사람들을 이용하던 인생에서
하향성을 향하여 자신의 것을 내려놓는 삶으로서의 결단을
주님은 구원으로 연결하시는 것이다.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도다~
구원이 없는 상향성의 삶,
기쁨이 없는 상향성의 수고,
하나님의 인정이 없는 열심과 땀은
이제 요나의 표적처럼 하향성을 향하여 내려가는 수고를 거쳐야 한다.
세상은 소리친 여인처럼
상향성의 기회를 부러워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 기회를
더욱 아래로 내려가는 기회로 삼으셨다.
아래로 내려가는 기회를 잡는 것
그것이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삶의 본질이다.
*베레나 교회 학생들입니다.
의료선교를 마치고 사진을 찍어다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들의 눈과 눈을 마주치는현장이
하샹성을 향한 표적의 시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