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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의 실체(눅9:44-48)

두려움의 실체(눅9:44-48)

 

 

 

 

 

 

두려움의 실체(9:44-48)

 

갑자기 제자들이 누가 크냐 변론이 일어났을까?

 

그것은 두려움이다.

 

사람이 하는 말하는 것에는 가지가 있다.

자기 자랑과 다른 사람 !

말의 중심을 가만히 살펴보면 한가지다.

 

두려움!

 

내가 세상에서 버림 받지 않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래서 자기 자랑은 인정 받고 싶은 욕망의 부산물이요,

다른 사람을 욕하는 것은 다른 사람보다 자신이 낫다는 감정적 표현이다.

 

마음 중심에는 다시 버림 받고 싶지 않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므로 얻는 유익들을 누리기 위한 두려움이 자리잡고있다.

 

돈을 찾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돈이 있어야 사람들 속에 인정받는다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속에 포장하고 있는 있는 진짜 감정은 두려움이다.

 

세상이 나를 버리지 못하게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대접받는 방법으로 돈을 얻으려 한다.

 

그런데 오늘 제자들이 갑자기 자리를 연연해하며 변론이 일어났나?

제자들에게 자리는 돈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께서 죽는다 하니까 두려움이 밀려온다.

두려움은 예수님이 죽으실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자신들의 자리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그림자가 찾아오자 자신들이 세상에서 버림 받을까 하는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 당할 같은 두려운 감정이 그들 사이에 찾아온 것이다.

 

지금껏 예수님을 따르며 쌓은, 그래서 세상에서의 자신의 입지와 영광과   세상으로부터의 인정이 사라지는 순간앞에 찾아온 것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리싸움을 하고 있다.

 

그에 대해서 예수님은 자리에 대해서 깊은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계신다.

두려움의 해결과 세상에서 자리로 오는 문제의 답을 주시고 계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동일화되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 누가 크냐를 변론하는 제자들에게 누가 큰지를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9:48)

 

 

세상은 높은 사람과 함께 있는 사람, 높은 사람의 라인에 있는 사람을 , 높은 사람이라 한다. 그래서 그런 사람과 사진을 찍고 교제하면 자신이 높은 자리 높은 사람으로 착각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늘 높은 사람, 사람이라 하는 세상의 사람이 아니라 별볼일 없고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작은 아이를 영접하고 대접하면 예수님을 대접한 것으로 치고, 예수님을 대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한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가?

그것은 세상의 원리는 높은자가 높은자다.

그런데 세상 사람으로 살면서 세상 원리를 벗어나는 생각으로 살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세상의 원리와 전부 반대로 간다.

세상 사람은 절대 할수 없는 작은 자를 섬기는 !

원리를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세상에 새롭게 심으시는 것이다.

율법을 주셔서 이스라엘 나라의 기초를 삼으신 것처럼

이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원리로

세상과 반대되는 원리 작은 자를 섬기는 것으로 주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이어도 세상의 원리

높아지려는 마음을 없애지는 못한다.

그것이 세상의 영이 우리 세포에 심어놓은 원리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기 전에 죽어야 하고 부인해야 한다고 먼저 말씀하셨다.

 

우리가 배우고 익히고 몸으로 체득한 세상의 원리, 높아짐의 원리,

가짐의 원리, 약육강식의 원리 등을 부인하고 세상에 대하여 완전히 죽어야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 살수 있는 것이다.

 

높아짐이 그렇다.

세상에서 높아짐은 섬김을 받는 자가 자다.

대접 받는 것이 높은 자다.

많이 가진 자가 힘있는 자다.

 

그런 세상에 하나님은 낮은 자가 사랑 받고

섬기는 자를 크게 하시고

대접이 아닌 베푸는 자를 귀하게 여기시고

있는 자가 아니라 가난하고 병들고 아프고 배고픈 자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원리를 새롭게 재정하셨다.

 

 

이런 하나님 나라에서

아직도 세상의 나라의 법칙을 붙잡고 사는 사람은 아직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지 않은 자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는 다는 말은

이런 세상의 원리를 못박아 죽이고

그런 세상의 원리에 반응하는 나는 없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과 함께

새로운 원리로 새로운 삶으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따라

사는 삶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내용의 마가복음에서 이야기 뒤에 나오는 것이

작은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 매고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릇이라도 주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는다 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사는 삶은 하나님이 반드시 책임지시지만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은 모른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불법을 행한 자들을 향하여 경고하셨다.

그럼 불법이 뭔가?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만든 하나님 나라의

세상과 반대되는 원리이다.

하나님 나라를 받치는 원리인 것이다.

 

 

불법을 행한 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천국은 자리가 아니다.

천국은 원리이다.

작은 자로 시작되는 천국,

누룩이다.

겨자씨다.

 

세상 나라의 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바뀔

그것이 미미해 보이나 엄청난 파워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제자들이 자리를 연연해 하나?

세상의 원리에 잡혀서다.

그런 세상의 원리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두려움을 하나님 나라의 원리 속에 평강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주셨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평강이다.

평강은 "기적다음에 오는 (8:40-48)에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원리로 살면 평강이 찾아온다.

자리가 아니라 평강이다.

평강으로 임하는 하나님 나라는 작은 속에 숨겨놓았다.

 

작은 자가 보이지 않으면 아직 당신은 천국 백성의 원리를 모르는지 모른다.

 

,

높은 ,

높아질 ,

많아 것에 대한 우리의 눈이

 

작고,

낮고,

초라한

그래서 신경을 써도 되고

써도 되는 그들 속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이 여러분의 이웃이 되기를

나의 이웃이 되기를 소망해 본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