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믿음의 한계 (눅9:38-43)
제자들은 세상의 것 전부를 다 버리고 내려놓고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제자의 길이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살려 하지 않고 죽기를 각오하고 주를 따라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포기해도 한가지는 목숨 걸고 가져가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믿음이다.
우리는 내려놓음을 잘 해야한다고 한다.
... 그래서 잘 내려놓으려 노력한다.
자기 부인도 잘 하려 노력한다.
십자가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헌신도하고 수고도 한다.
그런데 그러면서 하는 또 한가지는
믿음도 포기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주의 뜻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뜻을 내려놓으면서 믿음도 살짝 내려 놓는다.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서지 않고 주의 뜻이라는 명목으로
주께서 하실 일도 포기한다.
주님은 일을 하시기 전에 우리의 믿음의 과정을 지나신다.
주님께서 이땅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책망하시것을 빼고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을 책망한 유일한 이유는 믿음이 없음이다.
풍랑을 만났을때,
산상수훈에서,
그리고 믿음 없이 고침을 받으려는 사람들이다.
고쳐진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믿음을 따라 고침을 받았다.
주님이 고치기 전에 확인한 것은
오직 하나다.
믿음이다.
네가 누구냐가 아니라 너의 믿음이 무엇이냐이다.
네가 얼마나 직위가 높으냐,
네가 얼마나 똑똑하냐,
네가 얼마나 돈이 많으냐
네가 얼마나 병이 깊냐로 묻지 않으셨다.
오직 믿음이다.
그래서 오늘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 때문에 예수님은
심하게 책망을 하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눅9:41)
이유는 한가지다.
믿음 없음이다.
이 아버지는 제자들에게 먼저 보였다.
그런데 고치지 못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믿음 없음이다.
그 귀신들린 아버지가 믿음 없이 그냥 아프니까 데려왔다.
그냥 문제가 있으니까
상태가 심각하니까
용하다니까 어떻게 한번 도움을 받으려고 제자들에게 데려왔다.
첫째,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믿음에만 반응한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 능력의 원리이다.
오늘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에게 말씀하신 것은
믿음없음 이다. 믿음이 없으면 당연히 패역하게 된다.
패역이라는 말은 왜곡되어 있다는 뜻이다.
잘못 해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
하나님의 뜻이 왜곡된 세대를 말한다.
하나님의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자신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해석하고 판단하고 자신의 뜻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세대가 패역한 세대이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는 세상을 향하여
믿음 없이 자신의 뜻을 이루려는 세상을 책망하시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자들에게도 해당이 된다.
왜 제자들이 이들을 고치지 못했나?
같은 사건 같은 이야기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나온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아이의 아버지도 믿음이 없었고,
너희도 믿음이 적다.
즉 너희도 하나님을 덜 신뢰 했다는 것이다.
아들의 아버지는 믿음으로 온게 아니다.
그냥 뭐라도 할수 있다면 도와 달라는 마음으로 왔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9:22)
그러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9:23)
그러자 아들의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다.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막9:24)
이 믿음이 적다는 말은
덜 신뢰하다라는 뜻이다.
즉 찾아온 사람도 믿음이 없고
고치는 제자도 믿음이 적어 하나님을 덜 신뢰하니
거기에 무슨 고침이 있는가?
예수님은 오직 믿음으로만 이야기 한다.
둘째, 제자들이 신뢰가 떨어진 것은 상태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믿음을 통해서 온다 했다.
그런데 덜 믿게 하고 덜 신뢰하게 하는 주범이 뭘까?
더 악한 환경이나 더 악한 병의 상태다.
제자들이 본 것은 심한 귀신들린 아이이다.
발작하고 고함치고 몸을 물에 불에 상하게 하는 귀신을 생각해보라.
이 사람을 내가 고친다고 생각하면 믿음이 오겠는가?
믿음은 환경에 반응 하면 사라진다.
베드로가 풍랑이 일 때 바다를 걸었다.
그런데 바다에 다시 빠진 것은 풍랑을 볼 때이다.
환경을 보면 있던 믿음도 사라진다.
어려운 상태의 환자를 보면 있던 믿음도 사라진다.
오늘 상태는 바로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사탄의 전략은 환경을 자꾸 보고 계산하게 하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걸림돌은 제자들의 계산이었다.
오늘 이 사람이 그렇다.
아들이 어릴 때부터 귀신에 들려 죽을 고생을 하고 그 정도가 너무 심한 상태이다.
그러니 아버지도 제자도 다 겁을 먹고 안 된다는 생각 속에 고치니 고침의 역사가 없는 것이다.
그럼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믿음이 어떻게 오는가?
셋째, 기도이다.
기도만이 믿음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하고
믿음의 눈뜨게 하고
믿음을 내 안에 유지하게 한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9:29 )
말씀을 들을 때는 될 것 같지만
그 마음이 유지 되지 않는 것은 기도로 믿음에 불을 지켜내지 못해서 그렇다.
기도는 환경이 아니라 기준을 잡게 한다.
기도는 생명을 우리 안에 있게 한다.
기도만이 믿음에 반응하게 한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면서 수 많은 것을 구하고 가진다.
그러나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고
유일하게 하나님이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화려한 설교도,
율법적 노력과 수고도 아니다.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는 것으로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믿음으로만 대화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유일한 통로는 믿음의 대화법이다.
우리 믿음이 한계는 무엇인가?
믿음 빼고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고
믿음 빼고 하나님과 대화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