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부끄러운 십자가(눅9:28-36)

부끄러운 십자가(눅9:28-36)

 

 

 

 

 

 

부끄러운 십자가(눅9:28-36)


첫째, 부끄럽지 않는 삶.

부끄러운 삶은 무엇인가?
... 부끄러운 삶은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삶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과 말씀의 원리대로 살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예수님의 삶의 방식은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 고난 당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바보 같은 삶이다.
그것을 부끄러워하면 마지막에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떡하든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높아져야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고
주님은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십자가를 가야 부끄럽지 않다고 합니다.

어떤 방법이 부끄럽지 않은 삶인가?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런 삶을 살기로 작정하시고
더 깊은 기도의 자리에 나아갈 때
예수님은 그 용모와 옷이 광채가 났다.


자신이 죽을 것을 알고 산으로 가서 죽음을 준비하는 기도를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얼굴이 변화되고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다.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는 것이 영광이 된다.

둘째, 언제 우리가 영적으로 외적으로 영광스럽게 되나?

더 깊은 십자가의 자리 고난의 자리에 들어갈 때이다.

이 세상에서 세상은 고난 없이,
십자가 없이 영광을 누리려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와 죽음에 더 깊이 나아갈 때
영광스런 영적 육체적 광채를 발하셨다.

우리의 영광의 광채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고
십자가에 더 가까이 나아갈 때 나타난다.


하늘에서 두번 소리가 났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와,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말씀하신 이후
그것을 마음으로 준비하는 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이다.

하늘의 이 소리는 하나님의 확증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영광스런 소리는
내가 고난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는 요단강 세례의 자리요,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확증의 소리는
죽음을 이야기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확증할 때 나는 소리이다.



왜 우리에게는 이런 영광스러움이 없는가?
고난을 확증하는 기도가 없다.
십자가를 향하는 집중적 기도가 없다.

그런 기도가 없을 때 우리는 장소에 연연하다.
왜 이 장소에 있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장소에 연연한다.

베드로의 말이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하는 것과 같다.
좋은 곳에 있어야 한다면 왜 있어야 하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그곳에 사명이 있다면 고난이 있고 십자가가 있다면 있어야 한다.


기억해야한다.
우리의 영광은 고난과 십자가와 자기부인이다.
빛인데도 빛의 광채가 나타나지 않는 삶이 되는 것은
십자가와 세상에 대하여 죽는 확증적 기도와 마음이 없어서이다.

예수님의 빛과 광채가 더욱 빛나는 것은 십자가를 향한 확증과 집중적 기도이다.

이 시대는 고난 없이 영광을 누리려한다.
이 시대는 십자가 없이 광채를 발하려한다.


제자들은 자고 예수님은 죽기를 각오하는 기도를 하시고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 하셨다.

왜 우리가 게으른가?
왜 우리가 늘 잠자는가?

십자가가 내 어깨에 없어서이다.
죽으러 가는 사람이 잠이 올 수 없다.
고난이 올 것을 아는 사람이 계산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죽으려 하지 않고 더 잘 살려는 사람이
더 자려하고
십자가가 아니라 영광만을 구하니 더 높아지려 한다.

왜 엘리야이고 왜 모세일까요?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일까요?

모세는 홍해를 건넌 사람입니다.
즉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완성자입니다.

엘리야는 한마디로 죽음에 대하여 평생을 고민하다간 사람입니다.
(이부분은 다음에 한번 다루기로하고…)
그 고민의 한계를 넘어서 유일하게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간 사람입니다.

그 인간의 죽음의 한계를 이제 예수님께서 넘으시는 시간입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구원과 죽음을 넘는 부활을 보여준 장본인들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가 부분적으로 상징적으로 이루어 놓은
구원과 부활에 대하여 완성하시려는 사역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세 명이서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십자가는 구약에서 그림자로 있는 것을
본인이 실제적 형체로 이루어야함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그것이 세상으로는 부끄러운 죽음이고 십자가입니다.
세상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서 죽어야 하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세상에서 죽는 것 그것이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 부끄러운 일을 하시려 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죄인에게 죽어야 한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입니다.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죽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능력 있는 전능자로 힘 한번 쓰지 않고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능력 있는 있는데 쓰지 않는 것 그것이 힘든 일,
조롱과 부끄러움을 참는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셋째, 십자가가 부끄러운 것입니다.

전쟁에서 패하면 할 말이 있지만
파리와 싸워 내가 죽으면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 부끄러운 일을 주님이 하려 하고
우리에게 하라 하십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눅9:26)


그 일이 부끄러운 일이니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그의 말을 들으라 확증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는 다는 것은 정말 자존심상하고
상식적이지 않고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의 택함 받은 자니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왜 길인가? 진리인가?
그것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그 하나님의 유일한 길인 부끄러운 십자가를 향하여
더 깊은 기도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거기에 영광이 있고 광채가 있고 거룩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세명이 옆에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왜 이 세명입니까?
이 부끄러운 십자가를 지고가야할 사람들입니다.
베드로는 초대교회를 이끌고 십자가를 질것을 예견된 사람입니다.
야고보는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그리고 요한은 가장 오랫동안 마지막까지 살면서 신약의 모든 성경을
마무리할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많은 사명을 가진 십자가와 죽음의 증거와 그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 어디를 가든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본 자가 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보고 십자가를 보고 부활을 본 자가 그 길을 갑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해하지도 못하는 자리에 장소에
비록 잠을 잘지라도 함께 있게 하십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지금은 잠을 잡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보이면,
이 하나님의 방법, 세상에 부끄러운 방법이,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이 알아질 때,

그때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영광스런 빛과 광채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합니다.
오랫동안 잠들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세상에 대하여 나의 부끄러움이
하나님께는 세상에 빛을 전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우리 모두가 알도록…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