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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나라에 맞는 새 원리(눅9:18-27)

새로운 나라에 맞는 새 원리(눅9:18-27)

 

 

 

 

 

 

 

 

 

새로운 나라에 맞는 새 원리 (눅9:18-27)


1. 눅9장 전후의 사건들의 목적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그것은 제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한 것이 일차적이다.

 

무슨 훈련을 위해서 인가?
오늘 마지막 결론을 위한 훈련이다.

앞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가?
믿음이다.
기적은 믿음대로 되는 것이다.
믿음으로 역사를 이룬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운행되는 나라로 만드시고
잃어버린 에덴동산의 믿음을 회복하기 원하셨다.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였다.
믿는 대로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죽음도 이기는 것은 믿음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의 믿음으로 온다.

그래서 죽음을 넘는 구원의 역사는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혈루증여인과 회당장 야이로 사건으로 믿음을 말하였다.

그 믿음이 있으면 무엇이 오는가?
권능, 능력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능력이 아니다.
믿음이다.
우리는 권능을 능력을 힘을 달라고 하지만
주님은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셨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눅22:31-32)


우리는 능력을 먼저 구하고 주님은 믿음을 먼저 구한다.
주님은 믿음을 먼저 보시고 능력을 주시고
우리는 능력을 통해 믿음을 증명해 보이려 한다.
그것이 문제다.

주님은 오직 우리에게 믿음을 구하신다.
믿음으로 말씀하신다.

믿음이오면 능력이 오고 능력이 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믿음도 없고
능력도 없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한다.
아니다.

믿음 없는 열심은 결국
자신의 바벨탑을 쌓게 된다.
그래서 제이 제 삼의 아담이 되어
자신의 나라 자신의 왕국의 권세를 알리고
이름을 알리고 싶어한다.

원래 하나님 나라의 원리는 믿음으로 이루어가는 나라였다.
아담과 하나님은 다른 율법이나 열심이나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관계하는 원리이다.

그런데 아담이 그 원리를 잃자 하나님은
다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사라진 믿음을
원하시고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다.



그리고 오병이어 사건을 통해 먹고 마심은
하나님이 책임지심을 보여주셨다.
먹고 마심에 대한 믿음이 없는 사람은
결코 복음을 위한 헌신의 삶을 살지 못한다.
그것이 믿음의 증명이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왜 그냥 믿음을 통해
권세와 능력과 힘으로 하나님 나라를 세우면 되는데

오늘 말씀은 죽어야 한단다. ^^
그리고 자신을 부인해야 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야 한단다.
이게 왜 또 필요한가?
그냥 믿음이면 되지 왜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급기야 제 목숨을 잃어야 한다고 말하는가?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세상을 이기는 권세와 능력이 온다.
권세가 올 때 문제는
능력이 올 때 문제는
힘이 생길 때 문제는 자기가 왕이 되고
자기가 스스로 힘이 생긴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것이 아담이다.

아담의 문제는 하나님이 힘을 주었더니
자기가 스스로 힘이 생긴 것으로 착각했다.
그래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힘이 생기면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자신이 세운 어떤 결과를 통해 왕이 되려 한다.


그래서 그 문제가 다시 하나님 나라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마지막 단계를 말씀하신다.


훈련과 하나님 나라에서 온전하게 사는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가?

자기부인과
십자가와
자기를 위해서 사는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첫째, 자기부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제 아담에게 말씀하지 않았던 것을 요구하신다.
능력과 믿음이 회복되고 하나님이 다시 하나님 나라를
우리 안에서 지키기 위해서 주신 영적 원리다.

자 다시 믿음이 회복되고
그래서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고 권세와 힘을 주시면
사람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
아담처럼 자신이 왕이 되려 한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또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과 권세와 먹을것 입을것을 다 채워주시면서 이전의 에덴동산, 즉 하나님 나라의 모습으로 회복을 주시는데
거기서 문제는 역시
그 권세를 받은 사람 즉 아담이다.
제자들이다.

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자기 부인이다.
이 능력이 이 믿음이 먹을 것 입을 것이 나의 능력으로 왔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이것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자신의 능력, 힘, 권세를 부인해야 한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로부터가 아니라는 고백 그것이 자기 부인이다.

자신의 생각의 원천.
힘의 원천, 능력의 원천이 자신이 아님을 부인하라는 것이다.


둘째, 십자가를 지고이다.

십자가는 세상에는 답이 없다는 것의 고백이다.
세상의 방법은 답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세상에 답이 있다면 하나님은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십자가는 세상에 답이 없다고 고백하는 삶이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방법으로 살겠다는 고백적 삶을 살라는 것이다.

세상에 답이 없으니 주님은 십자가를 택하시고 죽으셨다.
주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죽음이다.
그래서 앞에서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삼일만에 살아남을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세상에는 없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십자가는 고난이다라는 말도 하는데 아니다
고난이 되기도 기쁨이 되기도 하는데
그 의미는 하나님의 방법을 택하라는 것이다.

셋째, 나를 좇을 것이니라 이다.

예수님이 왜 중요한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를 갈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이 아니면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도없고
그 나라에서 살수도 없다.
산다는 것은 단회적 고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삶, 즉 하나님이 제정하신 이 땅에서의
예수님이 사셨던 삶의 방식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을 좇는 다는 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사신 삶의 원리를 좇아 나도 그렇게 사는
날마다는 삶, 순간 순간의 삶의 현장을 말한다.



그리고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덧붙여서 말씀하시는 내용이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9:24)


잘 기억해야 한다.
이 세상의 시작은 자기가 살고자 시작한 나라다.
아담이 왕이 되고 하나님이 되고자 시작한 세상의 나라이다.
그 세상나라의 원리는 자신이 살고 남을 죽이는 나라다.
(창세기 3장의 내용을 다 설명할수 없다 이 원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되었다. 다음에 기회 되면….)

그런데 그 세상나라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데 중심 원리는
죽는 것이다.
내가 죽어야 내가 살고 세상이 변하는 원리를 심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다.
그것은 단순히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영적 원리, 하나님 나라의 운행 원리로 세우셨음을 말한다.

예수님과 함께 장사 지낸바 되고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롬6:4]


그리고 단회적인 구원을 지나 하나님 나라의 삶은
날마다 죽는 것이다.


고전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 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그래서 오늘 본문은 죽어야 한다고 한다고 말씀한다.

눅9:24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리고 덧붙이는 말씀이
천하를 얻고자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하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 예수님과 말을 부끄러워하면 그도 아버지와 천사들 앞에서 부끄럽게 될 것이라고 한다.


무슨 말들인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영에, 세상의 원리에 익숙하고 그것이 전부라고 여기고 산다.

그런데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이 새로운 영적인 원리가
그들의 생각에 말도 안되고 그렇게 살기에 어리석고 부끄러운 이야기라는 것이다.



세상은 열심히 하라고 한다.
그러면 길이 열린다고 한다.
세상은 최선을 다하면 뭔가 된다고 한다
아니다.
세상은 최고가 되라고 한다.
그래야 세상에서 알아주고 높아지고 이름을 떨친다고 말한다.
그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그런데 주님은 오늘
그것에 대해서 정면으로 반대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능력이 없고
내가 높지 않고
내가 가지지 않았고
나는 없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나는 다른 어떤 사람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섬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방법 즉 세상이 원하는 영적인 방법과 길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그리스도의 방법을 따라 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자들이 고백한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의 핵심이다.

그것을 고백한 사람은
그리스도가 산 그 영적인 원리인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과
자기 목숨을 위해서 살지 않는 삶을 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이신다.
세상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 살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죽이신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어떻게 내는가?

눅9:27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그렇게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사는 삶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그 새로운 피조물들이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사니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그 하나님 나라를 볼 사람이 얼마 가지 않아 있다는 것이다.


기대한다.

세상의 원리대로 열심히 살아야
그래서 많이 쌓아야
그래서 높이 되어서 이름을 떨쳐야 된다는 원리에서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세상에서 이 원리를 당당하게 여기고
세상 원리 포기하고 당당하게 사는
그래서 살기 위해 죽을수 있는 사람들이 세우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

나는 그 나라가 보고 싶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