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라. (눅9:10-17)
우리가 할 것과 하나님이 할 것을 하나님은 아신다.
먹고 마시고 하는 문제는 하나님이 해결하신다.
오늘 사건과 가장 유사한 사건이 광야의 만나 사건이다.
광야 만나는 하나님의 힘,
하나님의 것으로 산다는 상징이다.
...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는 상징이다.
사람이 사람의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나머지는 다 따라온다는 것이 상징이다.
만나는 예수그리스도다.
예수그리스도안에 먹고 마시고 입는 전부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 때 광야와 같이 살아야 하는데
가나안처럼 산다.
그것은 내가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실수는 가나안에서 광야의 신앙고백 즉,
나는 하나님의 나라 위해서 살고
하나님은 내 먹을 것 입을 것 위해서 산다는 원리를 잊은 것이다.
가나안에서 광야처럼 살아야 하는데 가나안에서
가나안의 원리 즉,
세상의 법칙을 따라 산 것이 문제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권세로
전도하고 난 후에 무리들이 다 따라와서
남자만 오천이 된 사람들이 빈들에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후
주린 후에 일어난 기적이다.
제자들에게 보여주신다.
무리는 모른다.
어디서 이런 음식이 났는지.
그러나 제자들은 안다.
어떻게 생겼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난 후에 이런 기적이 생겼는지!
복음이다.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전도하고 난 후에 생겨난 일이다.
제자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을 한 후에
예수님들 그들에게 먹을 것을 채우시는 역사이다.
제자들의 생각에 복음을 위해 살면
먹을 것은 따라오는 구나라고 생각하도록 예수님은 실물 교육을 하시는 것이다.
상식적 수고는
믿음적 고백과 연결되어야 한다.
무슨 말인가?
할 수 없지만 가능하다고 믿고
내 할 일만 하면 된다.
광야로 나가기만 하면 만나가 있다.
그게 비상식이지만 상식이다.
광야에 만나가 없다.
그런데 있다고 믿고 가면 있다.
나가지 않은 자는 얻지 못한다.
물고기 두 마리 떡 다섯 개로 오천이 먹을 수 없다.
그런데 있다고 믿고
그냥 하나님께 드리면 된다.
그것이 상식적 수고이다.
그 상식적 수고는 믿음적 고백과 연결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식적 수고가 아니라
큰 일을 위해서 큰 수고를 하려 한다.
그래서 못한다.
큰 수고를 위해 큰 믿음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니다.
큰 역사는 하나님이 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큰 역사를 위해 큰 사람이 먼저 되려 한다.
그것이 세상적 합리이다.
세상적 이성이다.
너같이 부족한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느냐고 세상은 조롱하고
세상적으로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야유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세상과 반대되게 운행하신다.
우리는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일생의 수고가 바뀌었다.
역할이 바뀐 것이다.
내가 할 일과 하나님이 할 일을 착각한 것이다.
우리는 먹을 것, 입을 것 마실 것을 위해서 산다.
그리고 기적과 능력은 하나님이 하라고 한다.
겉으로 보기는 맞다.
그런데 아니다.
기적은 우리가 행하고 먹을 것 입을 것은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능력을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리고 먹을 것은 예수님께서 주셨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은 불가능한 우리를 통해 능력을 세상에 보여주도록 하셨다.
나의 능력이 아니다. 다만 우리를 통해서 나온다.
그런데 먹고 마심은 하나님이 채우신다.
그것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건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질문한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제자들에게 질문하기 위한 서론이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질문한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는가?
베드로의 놀라운 대답이 나온다.
주를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이 말의 의미는 이미 다 아니 넘어가고
베드로와 제자들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는 근거는
예수님께서 영적 육적인 모든 부분을 통합하고 관할하고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의 사건은 구약의 사건과 연결이 된다.
잠깐의 묵상을 통한 글이라 모두다 연결해서 기록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할 일과 하나님의 할 일에 대해 다시 정리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세상에 능력을 보여주시기 원하신다.
그러나 나를 통해서, 훈련된 나를 통해서 보여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더욱 훈련하고 포기하고 해야 하는데
그 훈련과 영적 깊이는 내일 나오는 본문과 연결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문제로 고민하지 않기를 원하신다.
먹고 마심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것에 자유하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서 광야의 원리를 잊은 이유는 하나다.
잘 살기 위해서…
잘 사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다.
나는 다만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 수 있는 그릇으로 준비되는 것이다.
그 준비는 더욱 높은 경지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 반대이다.
하나님의 일과 나의일이 다시 정리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