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 의문(눅8:49-56)
의문1. 왜 예수님의 방문은 야이로의 딸이 죽을 때를 넘기셨나?
예수님이 죽은 자도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함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시는가?
우리의 믿음으로 어떤 일까지 일어나게 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이신다.
눅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딸의 구원, 부활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회장장 야이로의 믿음이다.
얼마나 큰 문제냐가 아니라 얼마나 큰 믿음이냐이다.
문제를 뛰어넘는 믿음을 요구하신다.
예수님께서 어떤 일까지 행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우리의 믿음으로 어떤 일까지 벌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의 이야기들을 보면 다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믿음을 가질 때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 전 사건은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다.
이미 알듯이 그 여인이 나은 것은 온전히 그녀의 믿음이다.
믿음만이 12년의 병을 낫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얼마나 오래 된 병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믿음으로 그것을 이긴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아가 얼마나 큰 문제인가가 아니라 그 큰 문제도 이길 수 있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사건이다.
의문2. 왜 두려워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는가?
눅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우리가 어떤 일을 당할 때 느끼는 것은 두려움이다.
끝났다는 두려움 이제 내가 끝이라는 두려움이다.
믿음의 반대말이 뭐라고 여기는가?
합리와 이성이라했다. 그럼 그 합리와 이성의 끝은 무엇인가?
두려움이다.
계산을 해보면 세상을 이기지 못한다. 세상을 절대 이길 수 없는 것이 사람이다.
세상의 영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의 방법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그 합리와 이성의 마지막 한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이 믿음을 갖지 못하게 하는 주범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불신앙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믿음을 가지기에 가장 걸림돌은 두려움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폭풍이 부는 바람 속에서 가졌던 것은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구원해 달라고 외치는 것이다. 바로 두려움이다.
믿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그것이 우리를 믿지 못하게 한다.
두려움에 나를 맡겨야한다. 그래야 보인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이 믿음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것은 한마디다.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그러나 그전에 하신 것은 왜 무서워하느냐라는 말씀이다.
마8: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믿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두려움이다.
세상이 끝났다는 끝의 마음이 우리를 두려워하게 한다.
사단은 그 마음을 우리에게 심었다.
사단은 그 마음으로 우리가 주를 보지 못하고 바람을 보고 풍랑을 보고
병든 몸을 보고 죽은 육신을 보고 세상이 끝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그런 두려움의 마음이 가득찬 상황에서 주님은 믿음을 요구하셨고 그 믿음을 기반으로
죽은 아이를 살리셨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한계 없음을 요구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믿음으로만 일하시는데, 그 믿음이 얼마만큼 일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으로 죽음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세상의 끝은 죽음이다. 그런데 이 죽음도 믿음으로 이길 수 있음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의문3. 죽은자도 살리는 예수님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나?
예수님은 만약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면
이 일을 그 부모에게 세상에 알리라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세상에 알리지 말라고 경계하셨다.
눅8:56 그 부모가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경계하사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산자와 죽은자를 말씀으로 명령하고 움직이는 분이다.
본인도 알고 천지도 안다. 그런데 왜 굳이 이 일을 보여주시는가?
그것은 믿음의 분량으로 죽음도 넘을 수 있음을 다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분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은 믿음으로라야 죽음을 넘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능력 있는 예수님 자신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한 자들에게
믿음으로 어떤 일까지 벌어지는지 증명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회당장 야이로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데리고 들어가셨다.
만약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주시는 것이 목적이면 사람들을 다 데리고 들어가셨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몇 사람만 데리고 들어가셨다.
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인가?
이들에게 요구한 것은 이 믿음이다.
초대교회를 이끌 베드로, 그리고 첫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야 할 첫 순교자 야고보,
그리고 마지막 계시록을 기록해서 마지막 사명을 감당할 사도요한이다.
믿음의 사건을 보는 것은 그것을 감당해야 할 사명으로 연결된다.
예수님의 목적은 세 제자들 즉 베드로와 야고보와 사도 요한에게
죽음도 이기는 믿음을 증명해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3년의 목적은 공생애 이면서 제자들의 훈련이다.
그 훈련 중 하나가 죽음도 이기는 믿음이다.
죽음을 이겨야 세상에서 어떤 것도 두렵지 않다.
그것을 본 후 제자들이 본격적인 사역에 뛰어든다.
왜 이렇게 이야기를 하나?
이 사건 이후 바로 나오는 이야기는 제자들에게 이런 역사를 일으키는 현장으로
내 보내시며 능력과 권세를 주신다.
눅9:1 예수께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눅9:2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
예수님의 믿음으로 죽음을 이기는 것을 보여주신 훈련은 사명으로 연결된다.
그렇게 수 많은 기적 속에 살면서도 사명으로 연결되지 않는 우리의 신앙은 아무것도 아니다.
왜 세상으로 사명을 향하여 나아가지 못하는가?
세상을 이기는, 죽음을 넘는 부활의 믿음이 아직 내 안에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넘어야 하는 마지막 관문은
죽음도 이기는 믿음이다. 그것을 본 자들이 제자이고 사도들이다.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
즉 세상의 마지막 무기인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이기는 믿음이다.
우리는 늘 두려워한다.
실패에 대한, 버림받음에 대한, 아픔에 대한, 죽음에 대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영혼가운데 있다.
그것을 넘어야 하나님 나라가 보인다. 그것을 넘어야 길이 보인다. 그것을 넘어야 사명이 보인다.
사명은 죽음의 두려움을 넘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