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다음에 오는 것! (눅8:40-48)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군중으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과 일대일로 즉, 인격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회장장 야이로이고 하나는 이름없는 여인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리 즉 군중속에 있다는 것이고, 군중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군중속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달랐기에 예수님이 그 많은 군중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가?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고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이 속한 군중 속에는 그런 문제를 가진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다.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사람들만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인가?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생각에 전부를 바칠 만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해서이다.
외딸과 자신의 병으로 고생하는 두 사람이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다.
한마디로 누가 군중 사이에서 튀어나와서 예수님께 엎드리고- 그것은 체면을 내려놓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인간적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런 기적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문제가 정말 절박하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은 주님께 나아가는 고속열차다.
그래서 아픔은 세상의 희망을 내려놓고 오직 한줄기 빛만 보게 되는 터널이다.
그런데 실은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주님께로만 인도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있어도 주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은 나아오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주님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자신의 문제가 절박하고 어렵고 힘듦이 있어서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라도
군중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군중가운데 예수님께 일대일로 나아가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은 오직 한가지
믿음이 있다.
둘째, 두 사건의 모든 공통점은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 따라 사건이 일어난다.
이름없는 여인에게 기적을 행하고 난 후에 말씀하셨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회당장 야이로에게 죽은 자를 고치기 전에 말씀하셨다.
눅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행위는 행위를 낳는 동기가 있다. 그 동기의 근본에는 그 사람의 신념과 이념과 믿음이 있다.
사람들은 이념과 이론과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움직인다.
세상은 그렇다.
합리와 이성이다. 시대가 악할수록 나타나는 특징은 합리와 이성의 대가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합리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이유는 이 세상은 합리와 이성을 좇아 태어난 세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잃은 것은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언어는 오직 믿음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믿음의 언어에 따라 세상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변하는 것이다.
합리와 이성으로 세워지는 세상 나라 속에 새롭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회복하는 나라이다.
세상적 아픔과 절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설득방법이다.
세상적 아픔이 없어도 그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다. 놀라움이다.
그러나 더 깊은 영적인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절망이다.
처절히 절망할 때 인생을 주 앞에 가치 있게 보게 되고 헌신하게 되고 행복과 평화를 붙잡게 된다.
셋째,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마지막은 무엇인가?
평화, 평강이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우리 마음의 상태는 무엇일까?
평화, 평강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평강이었다.
[눅24: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요20: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과 삶의 평강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기적인가? 축복인가? 먹는 것인가 마시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이다.
[롬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받은 것은 병 나음이 아니다.
그녀가 주님께 받은 것은 결국 평강이다.
기적을 구하지 말고 평강을 구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나라이다.
군중에게는 평강이 없다.
오직 주를 일대일로 만난 사람, 아픔의 과정을 지나서 주를 일대일로 만난 사람속에는
강력한 마음의 상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평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평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약의 수없는 말씀속에 이 평강이 들어있다.
너무 많이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다.
오늘 그 평강중 하나가 우리의 마음에 있기를 기도한다.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군중으로 예수님을 보는 사람과 일대일로 즉, 인격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사람이다.
...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이 나온다.
하나는 회장장 야이로이고 하나는 이름없는 여인이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리 즉 군중속에 있다는 것이고, 군중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군중속에서 예수님의 기적을 체험한 사람은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달랐기에 예수님이 그 많은 군중가운데 은혜를 베푸시는가?
첫째, 그들은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있었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고 자녀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들이 속한 군중 속에는 그런 문제를 가진 사람이 없었을까? 아니다. 있었다.
그런데 왜 유독 이 사람들만 예수님 앞으로 나온 것인가?
그들의 문제가 그들의 생각에 전부를 바칠 만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해서이다.
외딸과 자신의 병으로 고생하는 두 사람이 군중 속에서 튀어나온다.
한마디로 누가 군중 사이에서 튀어나와서 예수님께 엎드리고- 그것은 체면을 내려놓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부끄러움을 내려놓고 인간적인 방법이 없다고 생각할 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런 기적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하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나의 문제가 정말 절박하다고 여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직 내가 할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절망은 주님께 나아가는 고속열차다.
그래서 아픔은 세상의 희망을 내려놓고 오직 한줄기 빛만 보게 되는 터널이다.
그런데 실은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주님께로만 인도한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문제가 있어도 주님께 나아오지 않는 사람은 나아오지 않는다.
이유는 무엇일까?
주님이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주님만이 답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아서이다.
아무리 자신의 문제가 절박하고 어렵고 힘듦이 있어서 주님께 나아오는 사람들이라도
군중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한다.
군중가운데 예수님께 일대일로 나아가 기적을 경험하는 사람은 오직 한가지
믿음이 있다.
둘째, 두 사건의 모든 공통점은 믿음을 요구한다.
믿음 따라 사건이 일어난다.
이름없는 여인에게 기적을 행하고 난 후에 말씀하셨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회당장 야이로에게 죽은 자를 고치기 전에 말씀하셨다.
눅8:50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행위는 행위를 낳는 동기가 있다. 그 동기의 근본에는 그 사람의 신념과 이념과 믿음이 있다.
사람들은 이념과 이론과 합리적으로 생각해서 움직인다.
세상은 그렇다.
합리와 이성이다. 시대가 악할수록 나타나는 특징은 합리와 이성의 대가들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찾으시는 것은 합리와 이성이 아니라 믿음이다.
이유는 이 세상은 합리와 이성을 좇아 태어난 세상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잃은 것은 믿음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언어는 오직 믿음의 언어로 말씀하시고
믿음의 언어에 따라 세상이 다시 하나님 나라로 변하는 것이다.
합리와 이성으로 세워지는 세상 나라 속에 새롭게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믿음으로 회복하는 나라이다.
세상적 아픔과 절망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음을 고백하게 하는 하나님의 설득방법이다.
세상적 아픔이 없어도 그것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 성령이다. 놀라움이다.
그러나 더 깊은 영적인 자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절망이다.
처절히 절망할 때 인생을 주 앞에 가치 있게 보게 되고 헌신하게 되고 행복과 평화를 붙잡게 된다.
셋째, 그래서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마지막은 무엇인가?
평화, 평강이다.
눅8:48 "예수께서 이르시되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우리 마음의 상태는 무엇일까?
평화, 평강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평강이었다.
[눅24: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요20: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요20:21]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20: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결국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주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우리 마음과 삶의 평강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기적인가? 축복인가? 먹는 것인가 마시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이다.
[롬14:17]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받은 것은 병 나음이 아니다.
그녀가 주님께 받은 것은 결국 평강이다.
기적을 구하지 말고 평강을 구하라.
그것이 하나님이 원래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나라이다.
군중에게는 평강이 없다.
오직 주를 일대일로 만난 사람, 아픔의 과정을 지나서 주를 일대일로 만난 사람속에는
강력한 마음의 상태가 나타나는데 그것은 평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 평강을 유지하는 것이다.
신약의 수없는 말씀속에 이 평강이 들어있다.
너무 많이 일일이 기록하지 못한다.
오늘 그 평강중 하나가 우리의 마음에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