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통하십니까?
예수를 믿는 사람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나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
결국 이 두 종류에 우리 모두는 해당이 된다.
나를 위하여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오직 자신의 주어진 일을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모른다.
열심도 특심이고,
헌금도 봉사도 누구보다 잘한다.
그러나 일의 결국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사는 의미를 못느끼는 사람이고
좌절하고 실망하고 급기야 교회까지 떠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고,
사람들까지 얼마든지 이용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자신의 것이 결국 손해를 본다해도
예수님의 뜻을 위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이다.
자신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하시려고 하시는 일을 이루는데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내가 좀 손해보고
내가 좀 희생하고
내가 좀 더 일한다 해도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잘못된 형통의 관을 가지고 있다.
형통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
성경에서 형통에 대해 가장 강하고 확실하게 말씀하는 사람이 있다.
요셉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다고 말한다.
[창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요셉과 함께한 형통이 우리가, 특히 한국 사람이 알고 있는
하는 일마다 잘되는 것,
거침 없이 사업이 번창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공부하는것 마다 좋은 성적이 나오고
직장을 갔더니 좋은 사람만 기다리고 있고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면 복이 굴러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다.
요셉과 함께한 형통은 원어적인 의미로
'뚫고 나가는 힘'을 말한다.
영어성경에는 행운이라고 표현하기도하고
번영이라고 하기도하고
성공이라고 하기도한다.
그러나 원어성경은 짜라흐(jlx)는
나아가게 하다,
돌진하게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
요셉과 함께한 형통은 그냥 일이 잘 된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 때문에 모든 일을 돌진하여 나아가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형통의 진정한 의미이다.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셔서 형통한 것이 우리가 아는 단순한 행운이나
일이 잘되는 것이라면 요셉은 형들에게 팔리지도,
보디발의 아내로인한 모함도 당하지 않고 감옥에도 가지 않아야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상하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 형통한 자 > 가 되었다고 말한다.
형통이란
막연하게 일이 잘 풀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의인이 살기 너무 어려운 곳이다.
핍박과 아픔과 힘듦이 기다리는 곳이다.
정직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말씀대로 살려면 죽을 고생을 해야하는 곳이 이 세상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형통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이 형통한 자는
무조건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부서에 배속이 되고
사업이 무조건 번창하는 것이 아니다.
형통은 하나님과 함께하심을 알고 그 모든 일속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뚫고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그 뜻을 이루어 가는 뚫고 나가는 힘을 말한다.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하였더라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왜 어려운 일이 있는가?
하나님이 함께하면 어려운 일이 없어야한다.
그러나 요셉은 누구보다도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다.
그것도 하나님이 주신 꿈, 두번이나 하늘의 별들이, 볏단이 절하는 꿈을 꾼 후다.
그러면 모든 일이 만사형통해야 하는데 요셉의 인생은 그것이 아니다.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다.
그것이 어떤 일이 와도 뚫고 나가는 힘을 가진다.
형통을 추구하지 마라.
진정한 형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이다.
형통하다고 아무일 없이 그냥 순탄대로를
브레이크 없는 벤즈를 타는 것이 아니다.
모진 세파에도 땅을 뚫고 올라오는 새싹이 형통이다.
하나님이 세상만물을 붙들고 계시니 세상은 형통이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그 일을 헤쳐나가는 사람의 가슴속에 하나님이 형통이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찬양하고 인간의 고난과 아픔을 가슴으로 노래한 시편들 중에
시편 1편은 형통으로 이야기 한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고
그 행사가 다 형통하다 했다.
자 생각해보라.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비바람을 맞지 않는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비닐하우스에 나무인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태풍도 없고 비바람도 없고,
차디찬 겨울 바람도 맞지 않는 나무인가?
아니다.
모든 아픔과 비바람과 태풍을 이겨내는 힘,
뚫고 나가는 힘이 있을 때 그 나무는 형통의 열매는 보는 것이다.
그 열매가 형통의 모습이다.
자연 속에 하나님의 형통의 원리가 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겨울도 없고 비바람도 없는 곳에 나무를 두신 적이 없다.
바람도 불고
때로 눈물도 있고
때로 배신도
때로 남들에게 말 못할 참 처절한 사연들이 우리 사는 자연속에 인간사는 세상속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형통을 말한다.
요셉이 형통하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진정으로 형통한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은 형통한 자들은 시냇가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형통의 핵심은 모든 일이 잘되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뿌리가 시냇가 생명의 근원인 물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요셉이 인생의 형통의 근원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형통이다.
요셉은 13년 동안 아픔의 시간을 지냈다.
형들에게 팔렸고
주인의 부인에게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갔고
죽도록 가는 곳마다 일했지만 13년이 찰때까지 그는 겉으로보기에 형통하지 못한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형통이라고 말한다.
이유는 하나다.
일이 잘되고 하는 일마다 돈이 잘벌어지고 사업이 잘되어서가 아니다.
보디발의 집에 어려움이 있고 감옥에서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날수 있는 모든 일이 일어 났지만
그는 하나님이 함께하므로
그 일들을 버텨내고
앞으로 나아가며 뚫고 나가는 힘이 있는 것이 형통이다.
그래서 진정한 형통은 어려울때 보여준다.
진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려울때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힘으로 그 모든 역경들을 싸워이긴다.
다만 시간이 갈 뿐이다.
그런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려움이 올때 다 버리고 떠난다.
모함이 오면 그들과 싸우고 욕하고 사람을 잃는다.
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세상이 끝난 것처럼 포기하고 막 나간다.
그래서 사람도 잃고 자신의 쌓아온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형통한 자가 되어야한다.
성경은 요셉을 < 형통하더라 > 라고 기록하지 않고
< 형통한 자 > 라고 기록한다.
[창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사람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어떤 일을 이루는 일로 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본질을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어떤 일을 할 것인가에 기도의 초점을 두지 말고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전부를 걸어야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넘어서라.
그래야 그 사람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셉은 13년 그리고 그 후 9 년을 더 기다려서야 형들을 보게 된다.
꿈의 성취이다.
그러나 그 꿈의 성취는 요셉이 이미 그 형들, 감옥에서 만난 사람들,
보디발 집에서 있던 모든 일들을 초월할 때 이루어진 일들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시지만
우리가 그 준비가 될 때 그 일을 하게 하신다.
그런 관점에서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야 하시지만
반드시 그 일을 하는 사람도 함께 세워서 만들어가심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형통은 무조건 잘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만들고 사람을 세우는
그리고 그 사람이 모든 역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는
사람이 되었을 때,
모든 사람과 환경과 아픔을 초월하는 수준이 되었을 때 그분의 뜻을 이루심을 볼 수 있다.
자 아브라함을 보자.
아브라함은 진짜 믿음의 증명을 보인 적이 없다.
끝인 줄 알았는데 진짜 것이 남았다.
아내를 두번이나 속여서 왕들에게 넘겼다.
자기가 살려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믿은 것이 아니다.
오직 자신에게 집중되어있는 믿음의 수준이다.
그런데 그가 창세기 11장 마지막에 진정으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한다.
하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 고백후에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다.
그는 형통의 근원이 하나님자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 모든 일,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 놓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것이 형통한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진짜 믿음의 증명을 원하신다.
그래서 그 진짜를 내 놓을 때까지 하나님 자신으로 만족하는,
하나님 자신이 형통임을 알 때까지 우리의 수준을 이끌어 올리신다.
형통이냐 어려움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나와 함께 하느냐
약속의 말씀이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지만
그 약속을 반드시 나를 통하여 이루어가시므로
그 약속에 맞는 나를 훈련하시고 연단하시고 인내하시고 기다리신다.
그래서 진정한 형통은 기다림속에 이루어진다.
진정한 형통은 고난과 아픔 속에서 열매를 맺는다.
힘든가?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겨울내 품었던 새생명의 싹들을 준비하는 시간이다.
아픈가?
비바람 치는 거친 들판에서 모진 풍랑을 이겨내고 견뎌내어
결실의 시간에 아름다운 형통의 열매들을 맺어내는 것이 신앙이다.
형통을 원하시는가?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어야
형통한 자가 가는 곳에 형통의 꽃을 피우고 형통의 열매를 맺는다.
하나님은 일이 아니라
사람을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이 아니라 일을 움직여가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예수를 믿으면서 두종류의 사람이 있다했다.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 예수님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
자신을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에는 관심이 없다.
오직 결과이다.
그러나 예수를 위해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신을 포함해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일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
일을 통하여 사람을 세우시는 분임을 알기 때문이다.
세워진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천천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그분이 친히 이루어 가신다.
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으로 즐거워 하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 형통한 사람 > 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