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회복 7편- 기쁨과 평화! 보기시에 좋았더라.
하나님은 스스로 좋으셨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늘 좋으셨다.
[창1:3-4]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반응하시고 좋으심을 표현하셨다.
그리고 그 좋으심을 사람을 창조하실 때 전가하셨고,
그 좋으신 마음의 상태, 기쁨과 평안을 누리셨다.
그 기쁨과 평안이 아담과 하와에게 그대로 형상화되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 모든 하나님의 기쁨과 평강,
세상이 하나되며 하나님과 연합된 이 상태의 평강을 하나님 스스로 누리셨고,
그 하나님의 기쁨과 평안은 사람도 온전하게 가졌다.
하나님의 기쁨이 사람의 기쁨이요,
세상이 하나되어 누리는 이 평강과 평화로 인해 하나님은 그 기쁨을 누리셨다.
뿐만 아니라 그 기쁨과 평강을 사람도 동일하게 누린 상태가
에덴에서의 영적, 심적 상태이다.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상태에 따라 마음이 변하신다.
외적인 상태가 좋으면 좋으셨고,
외적인 상태가 좋지 않으면 마음이 안 좋으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이다.
이 하나님의 마음은 그분의 창조를 통하여 그대로 표현된다.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하나님은 그것에 온전하게 반응하셨다.
하루하루 하나님은 창조하시면서 좋은 것은 좋다고 표현하셨다.
첫째날, 그리고 셋째부터 여섯째날 까지다.
그런데 둘째날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좋은 것은 좋다 안좋은 것은 안 좋다라고 느끼시고 그것을 표현하셨다.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셨다.
성경 표현으로 'good' 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은 'very good' 이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외적인 상태에 따라서 감정의 결과를 가지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만든 모든 것은 좋은 것은 좋다 안 좋은 것은 안좋다고 하셨다.
둘째날은 그냥 보시기에 그저 그랬던 모양이다.
궁창을 만드시고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아무 것도 없는 궁창은 그냥 반응이 없는 공허이다.
공백이다.
허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낼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상태가 텅빈 상태를 보시면 하나님은 반응이 없으시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장 보기 싫은것, 'not good' 이 있다.
보기에 좋지 못한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다.
[창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텅빈 공허보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이 뭔가?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하신다.
'not good' 이다.
하나님은 체질적으로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신다.
왜?
하나님은 삼위일체시다.
혼자는 보기 싫은 것이다.
혼자는 싫으시다.
그래서 아담의 혼자 있음이 보기 좋지 않다.
그래서 'not good' 이다.
좋지 않은 것은 홀로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됨을 좋아하신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며 연합되어진 것을 아름답게 여기시고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감정의 하나님이다.
좋은 것은 좋다, 아주 좋은 것은 심히 좋다,
안 좋은 것은 안좋다 반응이 필요 없는 것은 아무 말씀을 안하신다.
하나님은 상태에 따라 그것을 그대로 느끼시는 감정의 하나님이다.
인간은 감정을 느끼는 본성이 있다.
좋은 것은 좋다 안좋은 것은 안좋다.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가?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만드신 세상과 사람을 보고 좋다라고 느끼셨다.
불쌍한 것은 불쌍하게 여기시고,
마음 아픈것은 마음 아프게 여기신다.
뿐만 아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
하나님과 하나되고 연합되지 못하는 하나님의 것들은 질투하실 만큼 그 감정을 강하게 느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감정이 느끼기에 창조의 상태는 가장 좋은 것들로 채워지고
하나님은 그것을 그대로 느끼셨다.
이 창조의 상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시고 평화로운 상태였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다.
[창1:31]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이 완전한 창조의 상태가 평화이다.
하나님이 느끼신 감정이 기쁨이다.
이 기쁨과 평화는 하나님이 만드신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감정의 상태이다.
하나님은 이 마음의 감정을 영원히 느끼시며 사람에게도 이 상태를 온전히 느끼도록 하셨다.
그 감정을 아담이 그대로 닮았다.
아담이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주시자 최고의 기쁨을 표현했다.
[창2:23]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
[창2:24]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모든 창조의 마지막이 완벽이고 하나님께 기쁨이고 평화이다.
하나님 나라는 기쁨이 충만하고 평화가 완전한 나라이다.
하나님 나라의 감정의 상태는 기쁨이고 평화, 평강이다.
하나님도 사람도 온 만물도 그것을 느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평화가 온 땅에 충만하였다.
왜 이런 생각을 하는가?
왜 이런 기쁨과 평강, 평화가 하나님 나라의 감정이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기 원하시는 회복의 감정이
< 기쁨과 평화 > 이기 때문이다.
먼저, 평화이다.
성경은 평화를 평화 또는 평강으로 기록한다.
그 어원은 같다.
영어로 'peace' 인데 모두 평화 또는 평강으로 한글에서 번역한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로 샬롬(Shalom)이고
신약에서는 에이레네(eilene-헬라어 히브리어 지원이 안된다^^)이다.
이단어들은 다 같은 평강으로 번역이 되거나 평화로 번역이 되었지만
영어로 'peace' 이고
원어로 신구약 다 같은 의미의 말이다.
구약의 샬롬은 인사를 나눌때 함께 건네 받던 인사말이기도 하다.
이 말들은 다 하나님의 함께함으로 인한 평화와 안전 그리고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말로 다 < 평화 > 이다.
이 평안, 샬롬이라는 단어는
세상에 쫓겨난 사람들에게는 결코 평안이 없다.
하나님이 주시지 않으면 없는 단어가 이 세상에서 평화이다.
그런데 이 단어가 처음 나타난 곳이 아브라함에게서였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5장에서 그를 부르시고 그에게 자녀의 축복을 다시 주시면서이다.
이 이야기는 이미 멜기세덱으로부터 축복을 받은 이후이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에서 자손과 땅과 민족의 축복을 다시 약속하시면서
아브라함 너는 네 조상에게 평화가운데 갈 것이라는 말로 약속하신다.
[창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You, however, will go to your fathers in peace and be buried at a good old age.
이 평화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사명을 다한 후에,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모든 사명을 감당한 후에 찾아 오는 것이 하나님의 평화라는 것이다.
사단으로 인해 사라진 것은 영생이다.
영생이 사라지면서 사람에게 찾아온 감정은 불안과 두려움이다.
영생은 죽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나 기쁨과 평화가 충만한 사람에게 이 감정들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불안과 두려움만 찾아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사람에 대한 불평과 불안이 찾아온다.
그것에 대한 회복, 평화는
하나님의 나라가 회복 될 때에만 우리 안에 다시 찾아오는 감정이다.
하나님 나라의 파괴로 영생이 날라가고
그로 인해 찾아온 감정은 두려움과 불안이다.
한마디로 평화가 사라진 것이다.
그 평화는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통해서 찾아오는 감정이 평화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부르신 첫 사람으로 평생 그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할 때,
즉 사명을 감당한 후에 찾아 온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 평화는 제사장들에게 주시는 평화이다.
아니 제사장들을 통해서 얻는 평화이다.
[민6:22-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모세를 통해 아론과 그 아들들, 즉 제사장직분을 감당하는 대제사장의 직분의 임무는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화를 전하는 것이다.
언제 우리에게 평화가 찾아오는가?
하나님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시고, 그 얼굴을 우리에게 향하여 들때에 평화가 임한다.
평화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하나님 만이 주실 수 있는 축복이다.
세상 어디에도 창세때 잃어버린 평화는 찾을 수 없다.
세상 어디에서 우리 마음에 영생을 줄 수 없는 것처럼
영생이 찾아 올 때,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만날 때 우리는 평화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 평강,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의 감정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예언서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뭐라고 표현하는가?
[사9: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사9: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사야는 예수님의 나심을 예언 하면서 그는 평강의 왕,
즉 평화의 왕이라고 소개한다.
평화가 그로 인해 무궁하다는 것이다.
그분은 평화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원래 하나님 나라는 평화이다.
[사65:25]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그런데 믿음이 사라지고 영생이 사라지고
세상의 영이 다스리는 곳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에 대한 욕심으로 늘 평화가 없는 상태가 지속된다
세상은 우리를 향하여 가짜 평화, 평강을 외친다.
[렘6:13-14]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겔13:10]이렇게 칠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을 유혹하여
평강이 없으나 평강이 있다 함이라 어떤 사람이 담을 쌓을 때에 그들이 회칠을 하는도다
그곳에 예수님의 오신 목적은 오직 평화를 위하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을 두고 성경은 뭐라고 하시는가?
[눅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눅19:38]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심으로 그분이 처음 가졌던 그 평화,
평강을 주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시다.
[사52: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그분은 그분의 나라를 회복하시며
구원을 통한 영생의 길을 여시면서
동시에 처음 가졌던 그 평화,
우리 마음에 감정적으로 평화,
평안, 평강을 주시기 원하시고 회복하기 원하신다.
하나님이 없는 곳에는 평화가 없다.
그분은 오직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오셔서 하늘의 평화를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어느 집에가든지 이 평안(peace)를 빌라 했다.
[눅10:5]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우리의 발걸음의 목적은 세상에 평안, 평화를 위하여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느 집, 어느 사람에게도 평안을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마음에 주시기 원하시는 마음의 상태, 감정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를 위해 오셨다.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평안, 평강, 평화 모두다 같은 어원의 평화를 말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구원,
즉 영생과 함께 이 땅에서 평화를 누리기 원하셨다.
마음에 평안하며, 평강을 누리기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부활 하시고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무엇을 말씀 하셨는가?
그렇다 평강이다.
제자들을 찾아가서 예수님은 오직 평강을 주셨다.
예수님의 평강, 평화는 오직 구원과 관련되어 있을 때만 사용하셨다.
예수님은 부활 하시고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주신 것은 평강, 평화였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그들이 열한 제자에게
예수님을 만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평강을 말씀하셨다.
[눅24:36]이 말을 할 때에 예수께서 친히 그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니
안식후 첫날 유대인들 때문에 제자들이 무서워할 때 나타나셨다.
그리고 평강을 주셨다.
[요20: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들에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고 다시 평강을 말씀하셨다.
[요20: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그리고 여드레 후에 도마에게 찾아오셔서 평강을 주셧다.
[요20: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 평화를 위하여 오셨다고 했다.
그리고 평강을 말씀하셨고,
[요14:27]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원하셨다.
하나님 없는 우리에게 찾아온 두려움과 불안한 삶 속에
하나님의 평화를 예수님을 통하여 주시기 원하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완전한 영생의 길을 여시고
다시 제자들을 찾아가 평강, 평안, 평화를 주셨다.
평화는 없는 감정이 아니다.
하나님도 가지셨고,
우리도 가졌던 이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영적, 감정적 최고의 상태가 평화이다.
그런데 이 평화는 믿음의 상실로 영생을 잃고
사람들은 두려움과 불안가운데 세상에 살게 되었다.
그 세상 가운데 예수님은 오직 자신을 주심으로 평화를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믿음의 결과, 영생의 결과는 평화, 샬롬이다.
세상에는 평화가 없다.
육신의 생각과 죄의 결과는 두려움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롬8:6]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평화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정이다.
하나되고 연합될 때에만 주어지는 감정의 결과이다.
믿음을 하나되고,
영생의 소망을 가진 자에게만 주시는 하늘의 마음이 평화이다.
예수를 믿는데 이 평화가 없다?
가짜다.
구약의 수 많은 선지자들은 평안하다 평안하다고 예언했다.
다 가짜였다.
진정한 평화는 성령 안에서 예수그리스도로만 찾아온다.
성령께서 내 마음에 있고,
믿음의 소망이 있을 때,
그리고 그 영생의 소망으로 우리의 발걸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하늘의 선물이 평화이다.
[빌4:6-7]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나는 대학생 때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
기도와 간구로 기도하면 응답 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 했다.
기도하면 응답하신다가 정상이다.
그런데 응답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응답보다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며서까지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신 것은
작은 기도의 응답이 아니라
세상에서 줄 수 없는 하늘의 평화, 평강이다.
그 평강을 위해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죽음의 길을 통해 평화를 주신 것이다.
이 평화, 평강이 얼마나 소중한 감정, 마음인가?
당신에게 이 하늘의 평화, 평강이 있는가?
[살후1: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오심,
예수님이 하신 일을 통해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그 좋은 하늘의 것들을 다 빼앗긴다.
늘 두려워하며
늘 불안해하며
세상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는 평화를 받았으면서도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무엇을 내 마음에 지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사단은 웃으며 미소를 지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을 내어주심같이 죽음을 통해 얻은
이 하늘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또 다시 질투하시고 마음아파하시는
그분의 심정을 느끼겠는가?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가지셨던 그 마음의 감정인 평화를
오늘도 우리가 누리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완변한 구원의 길을 여셨고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는 평화를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이 평화를 누리자.
이 좋은 평강을 빼앗기지 말며 영원히 소망하는 하늘 나라까지 지켜야 하는
하늘의 마음이 평화이다.
[고전1: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1: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1:3]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1: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1:2]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골1:2]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1:2]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딤전1:2]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후1:2]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몬1:3]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벧전1:2]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벧후1:2]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요이1:3]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진리와 사랑 가운데서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
[요삼1:15]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여러 친구가 네게 문안하느니라 너는 친구들의 이름을 들어 문안하라
[유1:2]긍휼과 평강과 사랑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 지어다
[계1:5]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모든 서신서의 인사는 그리스도 예수의 평강이다.
물론 서신의 인사말이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으나 인사말이 될 정도로,
샬롬이라는 인사말이 될 정도로 평화를 그렇게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감정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의 마지막을 평강으로 맺고 있다.
[롬15:33]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하나님은 평강, 평화의 하나님이다.
그 평강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오늘도 일하시고
예수님께서 죽으셨고 고난을 당하셨다.
평화는 결코 싸움으로 가질 수 없다.
힘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기에
하나님은 힘이 아닌 죽음으로 평화를 만드셨다.
죽음의 길을 넘어 부활의 능력을 가질 때,
우리는 평화에 들어간다.
예수님은 이 부활의 영광후에
제자들에게 진정한 평화를 전했다.
죽음을 이긴 곳에만 평강, 평화, 평안이 있고
그 믿음과 확신 만이 평화가 찾아온다.
당신에게 이 하나님의 평화가 있는가?
이 평화가 없는 신앙생활은 하나님이 주시기 원하시는 것과
내가 원하시는 것이 다를 때 없는 결과이다.
하나님은 평화를 주시기 원하시는데 우리는 다른 것으로 그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뭔가 방향이 잘 못되어있다는 증거이다.
평화를 기원하라.
평화를 빌라.
평화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증거이다.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유일한 감정, 마음이었다.
성령이 임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감정은 평화, 평강, 평안이다.
이 평화를 위하여 내려놓고
세상을 향해 있던 시선을 주께 고정하고
나를 위해 죽으시고 영생을 위하여 믿음을 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고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지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길을 예비하신 그분으로 인해 하늘의 평화가 있기를 기도한다.
샬롬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만 내 마음에 찾아온다.
당신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는가?
그럼 무엇을 위해 달려가고 목숨을 걸고 살고 있는가?
평화가 없는 신앙은 진정한 그리스도와 연합에 이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당신에게 평강을 주시기 원하신다.
이 평강을 누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평강과 함께 찾아오는 것은
기쁨이다.
이 기쁨은 하나님의 감정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들을 보시고 스스로 좋아하셨다.
예수님은 기뻐하셨다.
예수님은 예수님이 가지신 기쁨을 제자들이 가지기 원하셨다.
[요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위해 이땅에 사시면서도
기뻐하셨다.
그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가?
천사들도 기쁨을 전하였다.
[눅2: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과연 이 기쁨의 근원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가지신 이 기쁨의 본질은 어디서 오는가?
오직 하나다.
바로 하나님의 기쁨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기쁨이다.
[마3: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예수님의 기쁨의 근원이다.
잃어버린 세상의 기쁨을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회복되어질 것을 바라보신 것이다.
그 기쁨의 본체이신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을 보고 하나님은
하늘로부터 소리를 통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사랑하는 자라'
말씀으로 확정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기쁨이 될 것을 우주도 알았다.
하늘의 별이 예수님의 탄생을 따라 왔다.
그 별을 보고 동방의 박사들을 기뻐하고 기뻐하였다.
[마2:9-10]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오심, 하나님의 기뻐하심은
전 우주적이며,
전 만물적이며
전 인류적인 사건이다.
온 우주가 기뻐하고,
만물이 고대하며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주는 기쁨이다.
[눅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 기쁨의 본체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우리안에 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기쁨으로
[요8:29]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아픔도,
고난도,
십자가도,
죽음도 막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기쁨,
하나님으로 인한 기쁨을 제자들도 알기 원하고
기뻐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요15:11]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초대교회는 기쁨이 늘 충만했다.
[행2:46]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8:8]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행13:52]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기쁨을 아는 곳에 성령이 충만하다.
성령이 충만한 곳에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가 충만한 곳에 기쁨이 충만하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알고,
그 기쁨을 예수님이 기뻐하셨고,
예수님의 기쁨을 아는 곳에 하늘의 기쁨과 성령의 역사가 충만할 것이다.
[빌4:4]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살전5:16]항상 기뻐하라
하나님의 기쁨을 회복하자.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가지셨던 기쁨이다.
그 기쁨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예수님을 보내셨다.
그리고 항상 기뻐하고 항상 기뻐하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다.
평화와 기쁨은
창세로부터 하나님이 가지셨던 감정이다.
그 감정을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스스로 회복하시고
함께 평화와 기쁨을 우리에게 항상 있게 하시기 원하신다.
기쁨과 평화는 선택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가져야 할 하늘의 감정,
하나님의 마음이다.
왜 이 기쁨과 평화가 찾아 오지 않는가 ?
아니 이 감정들이 깨진 이유가 무엇인가?
욕심이다.
욕심이 이 모든 기쁨과 평화를 깨 놓는 원인이다.
에덴에서의 이 감정들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사라졌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평화와 기쁨의 회복의 근원을
하나님의 뜻만을 구하는 예수님 자신의 마음이다.
그분은 욕심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말을 전했고,
그분이 원하는 뜻을 삶으로 살아내었다.
욕심,
작은 욕심들이 우리의 기쁨과 평화를 깨 놓는다.
큰 것이 아니다.
작은 욕심!
그것이 평화와 기쁨의 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