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의미
마태복음1:18-25
오늘은 성탄절이다.
모두 성탄의 축복이 각 사람마다 있기를 바란다.
매년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교회마다 많은 행사가 있는데
과연 예수님의 탄생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한번 살펴보자.
마태복음 1장에 족보기록 이후에 예수님의 탄생을 기록한다.
그런데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는 하나님부터가 아니고 아브라함부터인가?
마태복음은 기록의 특성상 히브리민족의 하나님,
이스라엘 민족의 기대하던 메시야를 기록한 것이다.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족보의 기원은 아브라함이다.
창세기 1-11장은 일반 자연과학, 즉 천지 만물과 이스라엘 민족의 시작인
아브라함 이전 까지의 기록이고
창12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예수그리스도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에
그 족보의 시작을 아브라함부터 기록한다.
특이한 것은 족보의 마지막을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16)
라고 기록하는데
왜 이렇게 마리아를 강조하고 있는가?
예수님의 탄생사건을 보면 더욱 명확하게 기록한다.
먼저 생각 할 것은 왜 여자인 마리아에게 예수님이 나셔야 했는가이다.
마1: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셨다라고 족보 마지막에 기록하고
마리아에게 나신 것은 앞에서 보여준 다말이나 우리야의 아내, 라합, 룻과는 다른 여자라는 것이다.
족보에는 여자가 5명이 나온다.
그중에 한 명이 마리아인데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사람에 의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 태어났음을 두번이나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되어 태어났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첫째, 사람의 자손이 아니다. 여자의 자손이다.
둘째,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사람으로 태어나시는 분이 아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다.
사람이 가진 죄의 본성으로서의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 여자의 자손이고 하나님 자신이라는 말이 왜 중요한가?
창세기로 올라간다.
이미 하나님의 역설에서 기록한 내용이지만 다시 보자.
사단이 하와를 꾀어 죄를 범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벌을 주신 것이
여자는 사단과 원수가 되고 여자의 후손이 결국 사단을 이길 것을 예언 하셨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하나님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다.
인류의 역사를 다시 뒤집는 현장이 바로 예수님의 오심이다.
인류의 어그러진 것을 바로 잡는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잉태와 오심인 것이다.
여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죄의 문제를
하나님은 철저히 여자를 통하여,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바로 잡으시는 것이다.
남자를 통하여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 자신을 통하여 자손이 오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성령을 통하여 오셨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간의 어떤 힘이나 섭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개입하시고 직접 일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말이 강조 된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하셨고
하나님 자신이 독생자 예수님을 오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사람의 자손이 아니고 여자의 후손이고,
하나님 자신 이라는 말의 의미이다.
인류 구원이 메시야는 반드시 남자의 후손이 아니라
여자의 후손이 되어야
사단에게 넘어간 인류의 죄 문제,
사단의 꾀를 이길수 있는 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이어야 했다.
그리고 성령으로 오셔야만 한 것은 여자로 오시기 위해서는 성령이 아니고는 답이 없다.
이 땅의 창조 질서로는 불가능 한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자연적, 초월적 사건을 일으키셔서
어그러진 역사를 바로 잡으시는 것이다.
이 사건의 구약의 그림자가 바로 여호수아를 통해 가나안을 정복할 때
하늘의 해와 달이 멈추는 사건이다.
초 자연적 사건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실 것에 대한 예를 보여주신 것이다.
하나님의 초월적 개입,
그것이 인류 구원의 하나님의 일하심이다.
그리고 사람이 아닌 하나님 자신으로만 해결 해야하기에
그분의 독생하신 아들인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다.
그런데 요셉이 문제다.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 말한다.
마1: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람의 일로 생각하고 끊고자 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할 수 없다.
아무리 의로운 사람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생각지 못한다.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으나
예수님의 구원역사를 방해하는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간섭이 필요하다.
사람에게는 아무리 의로운 사람이라 해도
하나님의 선한 간섭하심이 아니면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를 볼 수 없다.
우리에게 구원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 된 삶에 하나님의 선한 간섭하심으로
구원이 길로 인도하시기 원하시지만
우리는 늘 우리의 생각을 고집하고 우리의 경험을 토대로 고집 부린다.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고 가나안을 들어갈 때 그들이 실패한 것이
이 문제이다.
그들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접근하고 구원으로 인도하실 때는
사람의 힘을 빼신다.
인도할 때 그냥 따라오게 만드신다.
죽을 만큼 고생하고 따라가지 않고 좋을 때 따라가야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게 안된다.
맞아야 간다.^^
요셉이 그래서 지혜롭다.
좋을 말로 할 때, 꿈 한번 꾸고 바로 인정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인정해야한다.
하나님의 일이다 싶으면 그냥 내 생각 내려놓고,
내 경험 내려 놓아야한다.
그럼 사람들이 묻는다.
뭐가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고 뭐가 내 뜻인지?
내 생각에 따라
이성과 합리적으로 생각할 때 될 일이면 내 뜻이고
믿음이 필요한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하나님은 늘 믿음의 결단을 요구한다.
내 머리속으로 이해되어지고 판단되어지고 계산이 되어지면 내 일이다.
그런데 늘 그렇지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할 때는 하나님의 일이다.
그 일을 따라가야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난다.
내 뜻을 따라가면 잘하면 내 실력이고 못하면 망한다.
믿음을 요할 때 드려라.
그때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난다.
둘째는 예수님이 무엇을 위해 오셨는가이다. 왜 오시는가를 생각해야한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죄다.
예수라는 말은 그의 백성, 자기 백성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것이다.
죄가 무엇인가?
죄는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는 모든 것이라 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오직 믿음으로만 이루어진 관계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선악과를 먹지 않는데
믿음을 버리니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다.
믿음을 버린 결과가 선악과를 먹음이다.
이 죄로 충만한 세상에 구원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단 한번의 제사를 위해 오셨다.
광야에서 높이 달린 놋뱀을 바라만 봐도 죽음을 면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열어놓으신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영생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세상은 죄로 망한다.
그 망할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믿음의 길을 여시러 오셨다.
그래서 예수님의 그 구원의 길이 우리에게 기쁨이고 축복이며 영광이다.
놀라운 것은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신 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번 한 일은 책임을 지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자녀들이 어그러진 길을 가서 망쳐도
그 길을 새롭게 내시고 만드시고 친히 그 길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그분의 백성을 구원하러 오셨다.
아무나가 아니다.
그분의 백성이다.
그분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 그분은 뭐든지 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이 부르시면 우리는 그분이 책임지신다.
그래서 그분의 자녀, 그분의 백성이 된 우리는 축복이며 기쁨이며 감사이다.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었으나
그를 따르지 않으므로 버림을 받았다.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지 않고
그분을 향하여 마음을 열기만 하면 언제든지 모든 대가를 지불하고
어그러진 길과 잘못된 인생을 바로 잡으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 하나님의 사랑의 책임 > 이다.
그분은 결코 저를 찾는 자를 저버리는 일이 없고
그를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자에게 놀라운 길을 여시는 분이시다.
이 소망이 자신의 백성을 구하러 오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우리는 우리의 작은 잘못이나
우리의 작은 실수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주저하고 두려워하고
아직도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는지 의문을 갖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그것이 세상에 물든 우리의 세포세포에 막혀있는 세상의 생각이다.
그분은 그분 앞에 나아갈 때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용납하시고
우리의 모든 허물과 어그러짐을 바로 잡으시는
< 사랑의 책임 > 으로 대하신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은 이것이니
주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했다.
주의 뜻은 우리의 구원이다.
주의 뜻은 우리의 행복이다.
영생이며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함이다.
[요10:10]~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빌4:19]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우리의 구원과 영생이 있음을 기뻐하라.
그리고 우리의 삶에 풍성함을 위해 기도하라.
하나님이 그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함이다.
담대히 우리의 풍성함을 구하자.
셋째는 그래서 최종적으로 주시기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왜 예수님은 마구간에 나셨고,
왜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하시는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 가장 추울 때 가장 낮은 곳에 가장 볼품 없는 곳에 오셨다.
이유가 뭔가?
세상의 영이 잡고 있는 힘의 법칙을 바꾸기 위해서 오셨다.
새롭게 창조하신 새 창조의 원리를 몸소 보여주시고 가게 하시기 위함이다.
적을 이기려면 같은 전략으로 이기지 못한다.
한 수 위의 전략을 써야 이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새로운 전략,
하나님 나라의 전략은 섬김이며 낮아짐이라 했다.
낮아지고 섬김을 통해 힘있고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새 창조의 원리를 보이셨다.
힘의 원리는 혼자 잘 사는 것이다.
옆 사람이야 죽든 살든 나는 모른다.
오직 나만 잘 살고 잘나면 된다는 것이 힘의 원리이다.
가나안 정복의 아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신 구약의 대표이다.
힘의 원리를 따르면 길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그 원리를 바꾸신 것이다.
예수님의 탄생의 신비는
세상과 다른 하늘의 법칙이다.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고
왕궁이 아니라 마구간 말 구유이고
집이 아니라 객지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탄생이 신비이다.
더 많은 사람을 품기 위해 더 낮은 사람들 곁에 오신 것이다.
왜 예수님은 이렇게 하셨는가?
< 함께함 > 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는
가장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다.
함께 하고 싶어서이다.
함께하므로 가장 좋은 것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자신의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속성이다.
그래서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아들을 우리에게 죽음으로 주셨고
하나님 자신이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함께 계시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다.
자신을 주심!
그리고 함께하심!
그리고 좋은 것을 나누고 싶으심!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의 탄생을 다시 생각하며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신 성탄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있다.
결국 예수님이 오심으로 함께함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왜 죄에서 구원하시나?
하나님은 죄에서 구원하여서 우리와 함께하고 싶으신 것이다.
우리가 함께할 때 우리에게 행복이 있고
그분은 우리로 더불어 기뻐하신다.
우리는 이 예수님을 받았다면
홀로 있는 자들을 찾아가라.
교회가 교회만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홀로되고
가난하며
낮은 자들에게 찾아가야 참 성탄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성탄절은 그분으로 기뻐하는 날이다.
그러나 우리만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면
아직 참 하나님이 주신 성탄의 의미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혼자 있는 자들을 찾아가고
그분의 구원의 소식을 전하고
낮고 천한 자리에서 소외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할 때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탄생이 의미가 있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회복의 시작이다.
이 세상에 거한 곳이 없어
말 구유에서 나시고
세상에 탈 것이 없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 예수님!
나는
그분을 믿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