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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녀도 행복하지 않는 이유>

<교회를 다녀도 행복하지 않는 이유>

 

 

 

<교회를 다녀도 행복하지 않는 이유>

 

첫째,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기준으로 평가하면 그곳은 지옥이 됩니다.

교회는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끄시는 곳입니다.

그런 교회의 모든 것을 기준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오늘 무엇을 하기 원하시는지 날마다 물어야 합니다.

이런 물음이 없다면 교회는 사람의 교회, 사람이 원하는 교회가 되고,

그것에 따라 평가하면 결국 교회를 통해 기쁨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야만 기쁨이 있습니다.

 

둘째, 공동체의 교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공동체성입니다.

서로 떡을 떼며 함께 교제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기쁨이 충만합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수록 교제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모이기를 힘써야하고 함께 교제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소그룹 공동체 모임이 희미해지면 교회에서 누리는 기쁨은 금방 사라져 버립니다.

 

성도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 얻는 기쁨이 아니면 다른 곳에서 기쁨을 얻을 없습니다.

말씀이 아무리 좋아도 공동체와 교제하며 떡과 나눔을 통해 얻는 기쁨이 없다면 교회를 다니면서 얻는 기쁨은 충만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 영적 피로도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쉬지 않고 달려온 피로도가 극에 달하면 어떤 영적인 좋을 것을 말한다고 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영혼의 임계점 때문에 영적 탈진이 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 교회에 너무나 팽배해 있는 현상입니다.

 

영적 피로도가 극에 달해서 왠만한 자극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전도하고 선교하고 봉사하자고 해도 이미 영혼의 피로도가 임계점에 있는 상태에서는 어떤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쉬어야 쉬지 않고 달려온 결과이고,

뭔가 업적 위주, 성장 위주의 푸시(push) 수십년 동안 받아온 결과입니다.

 

이제 성도들은 그냥 피곤합니다.

목사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압니다.

좋은 , 좋은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받아들일 영적인 공간이 없습니다.

너무 피곤한 삶으로 달리고 달려온 결과입니다.

 

넷째, 교회를 통해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쉬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11.28)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쉬는 것입니다.

 

"나로 하나님의 뜻을 좇아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롬15:32]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를 향하여 많은 교리와 이론을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개인적인 요청은 그들에게 기도를 통하여

너희에게 나아가 함께 편히 <쉬게> 달라는 것입니다.

 

목숨을 바쳐 수고도 하지만,

때를 따라 쉼을 가져야 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쉼의 기쁨을 알지 못하면 수고의 기쁨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는 달리라고만 했지 쉬라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합니다.

일주일에 한번이라도 함께 쉼과 교제를 통해 영혼이 재충전되는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달리는 말에 더욱 째찍을 함으로 더욱 열심히 달리는 것만이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보이 이제 정작 힘을 내야 ,

영적 피로도가 극에 달해 어떤 것도 귀찮고 오직 쉼을 누리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그래서 요즘 방송의 대세는 좋은 음식점, 좋은 관광지입니다.

 

사람들이 음식관광을 하고,

좋은 곳을 찾아 다니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쉼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쉼이 아니라 열심히 하라는 요구만 하니,

세상에 나가서 스트레스를 신경질적으로,

사람을 때리고, 패륜적으로 푸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다섯째,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랑하는 곳입니다.

제자는 사랑함으로 증명 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안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한가지는

상대방에게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십일 광야로 시험을 받을

어려운 시험을 견딜 있었던 한가지는

광야 시험 전에 세례를 받으실 하늘로부터 들린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한번의 음성이 어떤 시험도 이기는 힘의 근거가 것입니다.

사람은 정답을 말한다고 변하지 않습니다.

되려 정답을 말하면 화를 냅니다.

 

세상에 나가서 힘있게 근거는 나의 능력이 아니라

능력을 극대화 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며,

음성은 공동체를 통해 확인 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통해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내가 존귀한 자라고 느끼지 못하면 교회 다니는 기쁨은 없습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비전과 꿈을 위해 헌신 해야 하는 당위성도 있지만,

초대교회는 비전과 꿈이 없어도

함께 자기 것을 놓고 필요를 따라 사랑을 받음으로

드리는 찬양과 교제는 그것 자체 만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부흥시키시고 수를 더하시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낀적이 언제 입니까?

우리가 사역을 하며 생각해야 하는 것은

사역적인 헌신도 요구하지만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조차도 세상을 구하는 시험 전에 하나님의 음성으로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고 확증을 얻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지막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을 하라는 것에 집중이 있기 보다

누군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면 천국을 사는 같습니다.

내가 속한 공동체를 통해 그것을 느낄

우리는 더욱 행복한 교회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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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푸구쉐전도사가 뇌수막염에서 겨우 목숨을 건지고

한쪽 다리가 마비가 되어 영구 장애 판정을 받았다.

6개월 동안 병원을 다니며 재활에 집중을 했는데

어제 의사가 이제 거의 완치가 되었다고 한다.

얼마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인지 모른다.

 

그런데 사역 현장에서 일을 하다 보면 사역자들이 종종 어려운 일을 경험한다.

남편을 잃기도 하고,

아내가 중병에 걸리기도 하고,

자신의 병으로 아파하기도 하고

아이의 문제로 고통 중에 있기도 한다.

 

그럴 내가 하는 것은 한가지다.

여전히 내가 사랑을 받고 있다고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지,

교제를 통하든지,

물질적인 후원을 하든지 그들이 여전히 선교사를 통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일이다.

물론 일은 최선을 다해야 그들이 느낀다.

 

나에게는 어려운 일을 당한 사역자와 가족들이 있다.

그들에게 지금껏 한가지를 잊지 않게 했다.

물론 푸구쉐의 병원비와 재활치료비 전액을 지원하며

여전히 함께할 사역자로 동역자로 사랑 받는 자로 여기며 지냈다.

 

감사하게 그는 이제 거의 완치 판정을 받았다.

놀라운 주의 은혜이고 축복이다.

 

우리가 살며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함께 하는 공동체,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공동체가 있다면

험난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만하며

기쁨과 감격과 감사로 있을 것이다.

 

오늘 따라 로마서에서의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결론이  마음에 걸린다.

 

<나를 쉬게 하라>

 

주변에는 쉼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다.

쉬지 못하고 달리는 그들이 마음 아프다.

우리는 충성도 필요하지만 언제나 쉼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쉼은 내가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