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 3>
온유의 법칙의 다른 말은
성령의 제 1법칙인 <들음의 법칙> 즉 <온유의 법칙>이다.
조금 긴 글이지만 온유를 이해 할 수 있는 글입니다.
꼭 읽고 광야의 삶을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성령의 법칙-1 들음의 법칙-=온유의 법칙
예수님께서 하늘로 가시고 성령을 보내신 이유는
첫째, 흙인 존재가 영원이 되기 위해서는 영원이신 성령님이 호흡으로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한다.
둘째, 그 성령께서 영원히 나와 함께 하시므로 순간 순간마다
성령의 법을 통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함이다.
셋째, 예수로 충만케 하기 위해서이다.
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할까요?
창세기 3장의 선악과입니다. 선악의 열매입니다. 그 선악과로 죄가 찾아왔습니다.
선악과를 먹음의 결과가 죄입니다. 죄의 열매입니다.
그럼 성령이 오시면 당연히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다시 내 놓아야 합니다.
선악과의 반대, 선악과의 죽음의 반대로 성령의 열매를 증명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결과로 죄가 오고 성령이 오는 결과로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럼 그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맺는가? 내가 맺는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했다.
요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그럼 어떻게 열매를 맺는가?
내가 맺는가?
내가 맺는 것이 아니라 나무에 붙어 있는 것이다.
붙어 있으면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체질적으로 결과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 열매를 중요하게 여기는가?
나의 열매로 착각해서이다.
나의 것, 나의 결과로 착각해서이다.
하나님의 열매이다. 성령하나님의 열매이다.
하나님이 맺게 해야 한다. 하나님이 맺는 것이다.
자 성령의 열매가 나의 열매인가 하나님의 열매인가?
하나님의 열매이다.
그럼 열매는 언제 맺나?
선악과를 언제 먹나?
내가 하나님이 되려 하면 먹는 것이 선악과이다. 그럼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면 맺는 것이 성령의 열매이다.
그럼 내가 사나 성령이 사나?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십자가에 못박히고 그래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나는 날마다 죽는 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간단하다.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과 생각 속에 주시는 성령의 법, 성령의 뜻, 성령의 생각, 성령의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다.
전제는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나니 라고 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셔야 함을 모르셨을까?
그분은 아셨다.
성령의 새로운 법도 아셨다.
어떻게 그분의 자녀들이 음성을 듣고 따르고 하는지 아신다.
성령의 법, 구약의 율법에 매여 살지 않고 오직 심비에 새긴 성령의 법을 따라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생각, 그분의 마음을 성령이 아시니 그 성령이 주시는 생각과 마음이 내 마음과 생각에 주시니 그 것을 오직 순종함이 핵심이다.
내가 날마다 죽을 수 있다는 말은 성령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싸울 때 생각과 마음에 주시는 성령의 법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죽고 주는 사는 것은 오직 이 성령의 법을 따르는 성령의 생각, 성령의 마음을 따르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법, 나의 생각을 십자가에 못박고 내 생각을 죽이고 성령의 생각, 성령의 법을 따르면 열매는 성령께서 맺게 하시는 것이다. 나무가 맺게 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 했다.
금지 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오직 성령의 법, 생각과 마음에 주시는 뜻을 따를 때 반드시 이런 열매를 맺는 다는 말이다.
누가?
성령께서~
누가?
예수님께서~
누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다는 것이다.
왜 자꾸 내가 열매를 맺으려 하는가?
나는 죽으라.
내가 죽어야 성령이 일하신다.
내가 죽어야 성령이 역사하신다.
내가 죽어야 그리스도가 산다.
내가 죽지 않으니 성령이 역사할 수 없고
성령의 열매도, 성령의 역사도, 하나님의 일하심도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단 한번도 그분 자의로 일한적이 없다.
[요12:49]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고 하셨다. (마11:29)
그리고 내게 와서 배우라고 했다.
왜?
전제가 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했다.
온유하면 생각나는 사람 모세다.
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다 했다.
[민12:3]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그런데 생각해보라.
모세가 진짜 온유했는가?
그는 이스라엘이 원망할 때 같이 열 내고 화내고 했다. 그런 그를 왜 하나님이 온유하다고 인정하셨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에 대하여 반응함이 그렇다는 것이다.
이 온유함은 하나님에 대하여 말함이다.
다윗을 평가할 때 마음에 합한자라고 할 때 전제가 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라고 한다.
[행13:22]~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모세에 대한 평가도 앞에 한 단어가 빠졌다. 바로 내 마음에, 내 보기에 라는 말이다.
다시 보자.
"이 사람 모세는 (내 보기에, 내 마음에)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
여기서 <온유함> 이 뭔가?
온유함이 뭐길래 모세에게 예수님에게 이 단어를 사용하나?
예수님 자신 스스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나?
이 온유함은 하나님이 원하는 일에 말 없이 자신을 죽이고 순종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온유이다.
자신의 생각,
자신의 마음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을 따름이 온유이다.
모세가 광야 40년 동안 받은 훈련은 그 훈련이다.
가라고 할 때 가고 서라고 할 때 서는 훈련, 그것을 성경은 온유라고 말한다.
산상수훈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했다.
땅은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
정복은 우리에게 있지 않다.
전쟁은 하나님께 있다.
이스라엘이 차지한 땅은 스스로 싸워서 자신의 의지나 생각이니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마음을 따를 때 받은 상징이 가나안 땅이다.
예수님은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다 했다.
이유는 자신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했다.
왜 온유인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분의 생각을 따라 시킨 것 말하고 명령한 것만 하신 것이다.
이 땅에서 사신 예수님의 사역원리는 성령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철저히 따르고
말하고 명령을 행하신 삶을 사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른 다는 말이 무엇인가?
우리가 예수님의 거룩한 인격, 능력, 거룩을 따를 수 있는가?
스스로는 절대로 없다.
언제 가능한가?
나는 죽고 오직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방법처럼 오직 성령이 내 안에서 원하시는 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그것이 모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성령의 법,
제자의 법,
하나님께 쓰임 받는 축복의 길이다.
언제 쓰임 받나?
내가 죽고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 마음을 따를 때 이다.
그때 우리는 진정으로 쓰임 받는다.
온유는 성령의 제 1 법칙
<들음의 법칙>과 같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