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함 2>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29-30)
온유함의 전제는 하나님의 이끄심이다.
내게 배우라고 하신 예수님의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 하셨다.
이유는 온유다.
왜 온유를 가르치면서 멍에는 쉽고 짐은 가볍다고 하셨는가?
온유의 의미는 <이끄심>을 전제한다.
자신이 책임지지도 자신이 이끌지도 자신이 길을 정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끄시는 성부 하나님의 길에 온전한 순종과 따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온유다.
온유는 전적 따름을 의미 한다.
그래서 온유의 원어의 어근을 따라가면 온유의 시작은 데바쉬(vb'D])에서 왔다.
그 의미는 '꿀' 즉 '붙어 있는 성질'이다.
온유의 의미는 조용히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붙어 따라가는 성품을 말한다.
온유의 전제는 하나님의 이끄심이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의 이끄심에 대한 반응이 온유다.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신 예수님의 성품이다.
우리를 살리는, 생명을 살리는 성품이다.
성령의 이끄심 앞에 반응하는 온유는,
내게 와서 배우라고 하신 예수님의 온유는
선택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날마다 선택하게 되는 <생명> 의 문제다.
생명의 주체는 하나님이고 그냥 그 길을 따름이 온유다.
성령의 이끄심에 적극적인 따름이 온유다.
온유는 꿀과 같이 붙어 있는 성품,
즉 <이끄심>에 반응하는 <따름>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평생 받아야 할 광야의 훈련은 온유의 훈련이다.
이끄심에 자신의 전부를 걸고 따를 수 있는 성품,
튀지 않고 따르는 순종,
생명이냐 죽음이냐를 가르는 훈련!
온유다.
그래서 나의 제자 훈련의 시작은 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광야에 들어서는 순간 튀면 망한다.
물이 없는 죽음의 상황에도 튀지 마라.
이스라엘의 광야 훈련은 그냥 따름이다.
백성도 모세도 죽음은 튀면서부터다.
그냥 이끄는 대로 자신을 드리는 훈련!
사느냐 죽느냐의 훈련!
온유다.
나를 다 아신다.
그래서 목도 마르게 하시고
그래서 추위와 배고픔에 노출되게 하시고
내 맘에 들지 않는 사람도 앞에 서게 하신다.
온유다.
온유의 훈련 앞에 우리를 노출하신다.
심히 튀고 싶은 순간,
그 순간이 온유에 길들여지는 꿀과 같이 하나님께만 붙어 있는 성품…
하나님의 광야 훈련,
온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