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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의 목적>

<사명의 목적>

 

 

 

 

 

 

 

2015 06 10 가정예배

21:15-17  <사명의 목적>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심의 목적대로 인도하신다.

예수님이 죽으신 베드로와 제자들은 고향으로 가서 원래 하던 물고기를 잡는 일을 한다.

그러나 베드로를 처음 만나 부르신 목적은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살든지 처음 부르신 부름대로 살게 된다.

그래서 주님은 다시 베드로를 찾아 오실 밖에 없다.

시작은 예수님이 사명으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살던 대로 돌아가려 한다.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면 습관대로 산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눈에 안보이자 물고기를 잡으러 고향으로 갔다.

이유는 자기가 제일 살기 편하고 제일 잘하는 것으로 돌아간다.

신앙이 흔들리고 주님과 멀어지면 우리는 살던 대로 살려고 한다.

살던 습관대로 인생을 살게 된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사명이 사라지자 원래 살던 가장 편한 방법으로 자신을 내어준다.

살던 대로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명이 사라진 살던 습관은 우리를 허무함으로 이끈다.

 

세째, 사명을 감당하기 원하셔서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가게 허락하신다.

주님과 멀어지면 우리에게 가장 힘든 것은 사명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 사명과 멀어지고 사명과 멀이지면 인생은 막다른 골목으로 가게 된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세가지를 초월해야 한다.

사명 감당하기 위해 초월해야 세가지가 있다.

 

첫째, 내가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넘어야 한다.

내가 나를 생각하는 한계인 스스로 된다는 시선을 넘어야 한다.

베드로 자신이 자신을 바라볼 자신은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고 소망이 없는 사람이고 안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넘어야 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자신의 생각을 넘어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넘어야 한다.

베드로에게 힘든 것은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 하느냐도 힘든 것이다.

계집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 나온 자신을 사람들이 어떻게 것이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다른 사람의 시선을 넘는 것이다.

 

셋째, 내가 잘하는 , 습관대로 사는 편안한 것을 포기 해야 한다.

내가 제일 잘하고 제일 편한 대로 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 대로 가기를 원하신다.

제일 어려운 , 제일 불편한 삶으로 인도하신다.

? 처음 부르심이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사람 낚는 어부다.

우리는 내가 살던 대로 살고 싶고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면 습관대로 산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살던 습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르신 부름 대로 살기 원하신다.

 

결국 일들을 통해 예수님이 원하시는 종착역이 무엇인가?

어디로 나를 이끌고 가시기 원하시는가?

 

부인 것에 대해 질문을 하신다.

번의 질문은 번의 목적, 사명으로 인도하시기 위함이다.

번의 질문 중에 예수님의 번째 질문은 나를 사랑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한계 세가지인,

내가 바라보는 나를 넘고,

다른 사람이 바라보는 나를 넘고,

습관 대로 살려는 나를 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다.

예수님은 초월해야 세가지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강해야 한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보다 커야 한다.

 

예수님은 한계를 넘는 방법으로 오직 한가지를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을 사랑할 세상의 모든 한계를 넘게 된다.

 

넷째, 질문의 의도?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모든 문제의 한계를 넘을 있는 질문을 하셨는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과

살던 대로 살려던 나의 습관을 넘는 이유가 무엇인가?

모든 한계를 넘어 나를 어디로 인도해 가시는가?

예수님이 바라고 원하는 나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번의 질문에 대한 세번의 종착점은 어디인가?

그것은 예수님의 <> 이다.

 

예수님이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시고,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

가르치시고 돌보시고 세우시고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착각한다.

나를 넘고 사람들의 시선의 한계를 넘고 인생의 길을 넘는 이유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축복하고 나를 높여주시는 것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예수님이 다시 우리를 사명으로 부르시고 다시 우리를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하시는 유일한 목적은

예수님의 때문이다.

양이 아니다.

예수님의 양이다.

 

예수님은 예수님의 때문에 나를 다시 부르시는 것이고

나를 돌보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양은 예수님을 사랑할 때만 돌볼 있다.

양이니까 사람이라고 여기니까 실수하고 오버하고 착각한다.

아니다.

양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이니까 나를 사랑하느냐고 예수님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다.

 

우리는 처음부터 그렇게 불려졌다.

예수님이 나를 부르실 나를 사랑해서 부르셨지만

나를 사랑하시는 목적과 이유는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서다.

땅에서 예수님의 시선은 내가 아니다.

내게 맡겨주시는 양이다.

내게 맡겨 주시는 예수님의 양이다.

 

예수님이 처음 나를 부르실 예수님의 나를 염두에 두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을 염두에 두고 부르셨다.

 

우리의 사명은 오직 한가지다.

처음부터 한가지다.

예수님의 양들을 어떻게 돌보는 것이다.

 

그것이 인생 존재의 목적이고

나를 부르신 이유고,

내가 살아가는 이유다.

 

사명은 내가 아니다.

사명은 예수님도 아니다 .

사명은 예수님의 양이다.

그분이 죽으신 이유와 십자가의 이유인 그분의 양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