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후 예수님 사역 원리>
- <찾아가심>
예수님은 부활 후에 그분의 하신 일은 그분의 사람들,
그분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을 찾아가신 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전에도 무척 바쁘셨지만 그 바쁨은 제자들 아닌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임을 보여주기 위해 바쁘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후에 예수님은 그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찾아 다니느라 바쁘셨습니다.
부활 후 우리가 할 일 첫 번째는 <찾아가심> 것입니다.
주님이 찾아간 사람들은 다들 낙심하고 좌절하고 인생의 두려움과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보면 자신의 일에 충실해 보이고,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해 보이는 사람이지만
참 소망을 잃은, 복음을 잃은 사람들입니다.
부활 후 주님의 첫 발걸음은 그들을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부활을 기뻐만 하지말고 우리에게 찾아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찾아감은 믿음에 기인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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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강>을 주심
예수님이 부활 후 친히 주신 것은 <평강>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에게 사라진 것은 평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늘 불안합니다.
그 불안의 이유는 어떻게 살아야할지 두려운 마음입니다.
하나님 없는 인생의 기초는 두려움입니다.
혼자 살아야 하는,
먹고 살아야 하는 책임이 죄의 대가였기에 이 부담으로 살아가는 인생은 늘 두려움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인생에게 주신 부활 후 첫 말씀은 평안입니다.
그 <평안>의 의미는
주님이 <책임> 진다는 의미입니다.
먹고 사는 인생에서 하나님이 책임지는 인생,
죄의 대가로 수고하고 땀 흘려야 먹을 수 있는 인생에서
주를 믿는 믿음의 삶의 열매는 주께서 먹이고 입히는 인생으로의 변화입니다.
그 변화의 기점이 <평강>입니다.
부활한 주님이 이룬 것은 그냥 죽음을 이긴, 사망을 이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먹고 사는 문제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신 이 땅의 해결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생만, 생명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사망만 이긴 것이 아닙니다.
<평강>은 죄를 지음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먹이심과 입히심에 대한 하나님의 <회복의 선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을 찾아간다는 의미는
주님이 내 인생을 해결해 주신다는 믿음으로의 기인입니다.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고,
내 인생의 먹고 사는 문제를 혼자 해결해야 하는 인생은
결코 다른 사람을 찾아가지 못합니다.
주님은 잃어버린 우리 인생의 참 주인이 되셔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것은 평강입니다.
그 평강이 회복되고 그 평강을 전하는 인생이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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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잡수심>
예수님께서 평강을 전하시며 하신 것은 참 진리를 풀어주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던 진리를 부활하심으로 명확하게 풀어주셨습니다.
부활 전에는 이해가 되지 않던 것들이 부활을 경험하고 본 사람은 명확하게
그것을 이해하고 확인하게 됩니다.
평강을 받아들이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아는 지식에서 나옵니다.
그 지식은 머리가 아니라 삶과 가슴으로 이해하는 참 지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진리를 설명하며 이해시키는 것을 늘 먹을 것을 두고 인격적인 교제로 나누셨습니다.
두 제자에게도 음식을 통해 확증을 하시고,
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그 친구들에게도 숯불을 피워 떡과 고기를 두고 교제를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인격적인 나눔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함께 먹는 다는 것은 그분이 내 안에 내가 그분 안에 들어가 먹고 마신다는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합니다.
내가 찾아가고 평강을 전하는 이 모든 것은
내 안에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선행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찾아간 사람들,
평강을 전하는 사람들과 인격적인 깊은 교제를 할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식탁의 교제를 통해서 말입니다.
그 식탁의 교제는 주님을 중심으로 한 교제가 되어야 회복이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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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이 뜨거워짐으로 주를 찾는 마음
찾아가심과 평강과 함께 잡수심의 과정을 지나면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가슴이 뜨거워짐으로 주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이 난다는 것입니다.
사명은 주를 향하여 열린 마음과 뜨거워진 마음이 먼저 입니다.
부활을 본다고 사람이 변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변한 것은 부활을 본 후에 변한 것이 아닙니다.
머리로는 인식하고 이해하고 알지만,
부활을 본 후 그들이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 이들이 약속하신 것을 기다려야 하는지는 또 다음 기회에 생각이 나면 하겠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언제 할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성령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은 이 한 점을 향하여 제자들을 찾아가고
평강을 전하고 함께 잡수시는 과정을 지났습니다.
그래야 성령이 임하는 한 점을 통과 할 수 있습니다.
주를 향하여 자신을 헌신할 마음을 주십니다.
영적인 원리가 한 가지 방법으로 모두에게 대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활절을 기념하고 온 교회가 그렇게 부산을 떨지만
정작 예수님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르는 영적인 원리를 따라가다 보면
더 깊은 은혜를 발견하게 되리라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가신 흔적을 따라 원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을 너무 많이 부르지만
정작 예수님이 원하시는 사역의 원리에 따른 삶은 너무나 약하기에
조금씩 우리의 체질을 바꾸어 가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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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밤 글에 다들 당황하셨겠지만,
겸손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잘 결단을 하신 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혹 글을 올리지 않으셨어도 나름 잘 하고 계신줄 압니다.
그러나 속좁은 목사가 아파하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뭐라도 해야 하는 부담으로 시작한 일이니
이해와 사랑으로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대로는 안되기에 가지는 부담입니다.
다행이 30분이 훨씬 넘는 분이 함께해주셔서 이렇게 빨리 글을 나누게 되어 감사합니다.
한가지 확신 하는 것은
주의 음성에 내 감정이 아니라 결단과 의지로 지속적인 체질의 변화를 이룬 사람에게
놀라운 삶의 기쁨과 채우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의 습성 때문에 억지로라도 안하면 결단을 못합니다.
믿기 때문에,
또 경험해 본 은혜가 있기에 담대히 말씀을 드립니다.
한국교회가 너무 힘 없는 교회가 된 것은,
가슴으로 받은 복음과 십자가와 부활이
<머리>에 너무 오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과 십자가가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 한다는 것입니다.
수 없이 들은 성경공부와 설교가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운전은 이론 공부만 한다고 되지 않습니다.
실습을 통해 체질이 될 때 운전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앉아서 공부만 했습니다.
실습하고 체질이 되면 자연스러운 복음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머리 속의 복음을 삶으로 내려오게 하고
자신만을 위하던 복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면 소망은 있습니다.
이런 형태는 아니지만 비슷한 이벤트를 가질 계획입니다.
교회를 세우고 각 영혼을 세우는
이 일을 위해 계속 저와 함께 가실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