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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십 년 광야를 지나고 변한 한가지!>

<사십 년 광야를 지나고 변한 한가지!>

 

 

 

 

 

 

 

 

 

<사십 광야를 지나고 변한 한가지!>

 

1.사십 광야를 통해 무엇이 변했나?

 

사십 년 광야 생활을 마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이 변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광야 사십 년을 통해 무엇을 바꾸셨는지 아십니까?

날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는 기적을 경험하고,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추위와 더위를 막고,

신발과 옷이 헤지지 않는 놀라운 축복을 통해 그들이 결국 변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물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지만  믿음의 삶이 구체적으로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 나라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는지 아십니까?

 

2.리더에 대한 순종.

 

지도자에 대한 <머리 숙임> 입니다.

수많은 광야의 기적을 통해 그들이 변한 것은 하나입니다.

리더에 대한 머리 숙임입니다.

초기 광야에 불려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갈등은 비전에 대한 문제가 아닙니다.

환경에 대한 불평입니다.

환경에 대한 불평은 리더에 대한 불만으로 나타납니다.

 

물이 없어 죽겠고 고기가 없어 죽겠고 불편한 광야의 삶에 대한 마음은

리더에 대한 불신과 불평으로 나타납니다.

리더에 대한 불평은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말합니다.

 

불평합니까?

내가 불편하니까 불평합니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하나님께 대한 의심과 불신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리더에 대한 고함과 불평과 관계의 깨어짐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3.환경에 대한 불평의 탈출구

 

그들은 그랬습니다

살기가 어려우면 지도자에 대한 불평과 고함 소리가 커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에 대한 증상입니다.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한 실제적인 이유는 믿음이지만

증상은 지도자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납니다.

모세를 믿지 못하고 리더를 따르지 않겠다는 증상으로 드러납니다.

 

리더에 대한 불신의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불편함> 견디지 못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내가 불편한 것이 싫고 목마른 것이 싫고 내가 헌신하고 섬기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모습입니다.

 

화가 납니까?

뜻대로 되지 않으니 화가 납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마음대로 살다가 하나님의 사명을 따르라고 하니

도무지 불편해서 못살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정이 아니라 자기가 살고 싶고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입니다.

환경이 뜻대로 되지 않음에 대한 불평의 탈출구가 결국

리더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드러납니다.

 

4.공동체의 의미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개인을 위해 개인을 부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로 하나님의 일들을 이끌어 오셨습니다.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모세를 세웠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요셉을 인도하셨습니다.

리더가 욕을 먹는 이유는 공동체를 세우지 않고

자신을 먼저 챙기는 욕심 때문입니다.

 

목자의 존재는 때문입니다.

목자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양을 위해 목자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것은

목자도 양도 하나님의 부르심 사명을 따라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전제된 공동체가 의미가 있고

사명이 있는 목자,

사명을 따르는 양이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사명이 있다면

적어도 교회가 사명이 있다면,

적어도 개인의 목적과 채움이 아니라면

목자에게 양에게 흠이 있어도,

약함이 있어도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5.광야에서 훈련 받은 !

 

광야에서 훈련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광야를 지나 가나안에 들어갈 때와 애굽을 나왔을 공동체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리더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헌신입니다.

 

그것은 리더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표현일 뿐입니다.

사명으로 부르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은

리더에 대한 권위에 대한 인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죽을 만큼 고생을 통해 그들이 변한 !

겉으로 보면 한가지 입니다.

모세를 향해 던지던 돌을 이제는 여호수아에게 던지지 않고

목숨을 걸고 따르겠다는 헌신의 각오입니다.

 

"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수1:16)

 

각오는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표현일 뿐입니다.

광야는 환경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사명을 보게 합니다.

그것을 위해 공동체는 리더의 약함을 문제 삼지 않고 리더가 적어도

사명을 놓지 않는다면 약함을 보여도 사명을 따라 가야하고

부르심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은 가나안 전쟁을 하기 전에 열두 지파 중에 두 지파 반에게

요단 이편에 거주하고 남자들은 전쟁 전선에 서서 형제를 위해 싸우라는 명령 후에 그들의

각오를 말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어쩌면 가장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상황으로 명령을 하는 여호수아에게

그들은 명령하신 것은 행하겠다고,

어디든 보내면 우리가 가겠다는 각오를 보여줍니다.

 

6.하나님에 대한 사명은 리더에 대한 철저한 순종입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리더가 사명에 목숨을 먼저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미 40 전에 목숨을 걸고 사명을 붙든 사람입니다.

그것을 지켜본 공동체는 그를 따르고 함께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양들의 침묵이 아니라 리더의 부재입니다.

하나님의 사명에 자신의 전부를 거는 리더를 보기 힘들고,

리더를 중심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거는 일도 드문 일입니다.

 

어느 한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명을 위해 리더와 공동체가 모두 전부를 걸어야 하는 집중하는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리더는 리더로서 나를 따르라는 담대함과 자기 희생이 있어야 하고

공동체는 리더를 향하여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표현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광야가 바꾼 것들.

 

공동체가 가야 방향에 대한 명확한 선택입니다.

출애굽 했습니까?

전쟁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편하고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피나는 싸움을 감당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것은 지금 나의 세대를 세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지금 세대의 희생으로 앞으로 다가올 많은 세대를 세우는 일입니다.

세대가 리더에 대해 실패하니 결국 다음 세대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리더에 대한 순종입니다.

초기 광야 백성들은 이것에 실패했지만

많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한 공동체가 바뀐 유일한 한가지는

어떤 명령에도 순종하는 사람들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명확한 방향 사명이 있다면

리더의 약함과 부족함에 자신의 세대를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지금 세대에 포기하면 다음 우리의 세대가 목숨을 놓아야 합니다.

사명이 있고 가야 길이 있고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적어도 공동체를 부르시고 세우신 하나님의 뜻에 목숨을 걸도 따르는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8.순종의 전제

 

리더에게 순종할 순종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공동체> 리더로 세우셨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적어도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불법적인 방법으로 공동체의 리더가 되었다면 그곳을 나오시면 됩니다.

교회가 거기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어도 공동체의 리더로 사람을 세우셨다는 믿음으로 시작을 했다면

나이의 연소함이나,

설교의 약함이나 다른 어떤 인간적인 약함에 대해 공동체가 안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구스여자를 첩으로 들였습니다.

인간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 같습니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누이 미리암과 아론이 문제를 삼았습니다.

누가 봐도 상황에 안맞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이 모세의 손을 들었습니다.

사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다윗이 범죄하고 후에도 그를 따랐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더더욱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인정하고 평생을

그와 함께 동고동락하며 지냈던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우리는 자꾸 완벽한 리더를 찾습니다.

죄송합니다.

땅에서는 없습니다.

그러나 약한 리더들도 받아들이고 리더의 부족함을 내가 채웠던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광야를 통해 바뀐 것은 리더의 탁월함이 아니라

<공동체의 성숙>입니다.

 

약함을 약함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약함을 보았던 광야 공동체가

모세와는 비교도 안되는 약한 리더쉽의 여호수아를 받아들이고

함께 죽겠다고 받아들인 공동체의 성숙한 깊이입니다.

 

다른 신학적인 해석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적용은 그렇게 합니다.

적어도 리더가 사명을 붙들고 때는 범죄가 아니라면

인간적인 약함을 안고 있는 만큼 안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9.모세의 실수

 

우리는 그런 실수를 자주 합니다.

사명을 감당하고 달려가다 리더의 약함 가지를 보고 사명 자체도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해서 우리를 구원한 것이 아닙니다.

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한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도 그렇게 약한 가운데서 세우셨기에

그들의 약함이 보이면 약함을 내가 채워주며 살아가야 합니다.

 

일흔 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완벽을 자꾸 요구합니다.

왜요?

그렇게 하면 내가 편하고 내가 좋고 뜻대로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리더,

완벽한 리더를 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결국 내가 편하고 내가 좋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아닙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돌을 들었습니까?

자신들의 <불편함> 때문입니다.

내가 살고,

내가 부자 되고,

내가 편하고,

마음과 감정을 채워주는 리더,

세상이 부러워할 일이 기다릴 알았는데

내심 그것을 기대 했는데,

막상 모세를 따라 나와 보니 전혀 반대의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을 듭니다.

그러니 욕을 합니다.

그러니 공동체를 뛰어나가고 공동체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백성들이 사십 광야를 통해 변한 것이 표면적으로 무엇입니까?

그것은 공동체의 성숙, 리더에 대한 <머리 숙임> 입니다.

적어도 리더가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르고 있다면,

사명을 붙들고 가고 있다면 피차 복종 해야 합니다.

 

물어보겠습니다.

모세가 누구 때문에 실패했습니까?

자신 입니다.

자신의 믿음 없음으로 실패했습니다.

백성들 때문에 화가 나서 지팡이를 쳐서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만의 문제입니까?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달려온 모세를 그렇게 만든 공동체의 약함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이 없을 때마다 돌을 들고,

먹을 것이 없을 때마다

원망과 불평으로 대했던 공동체의 약함이 모세의 실수를 만들었습니다.

 

광야 공동체의 믿음 없음은 리더에 대한 난폭함으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없음은 리더에 대한 거친 관계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공동체도 죽이고 리더도 죽이는 일입니다.

아니 자칫 나의 자녀들, 다음 세대들에게 적들에게 목숨을 놓게 하는 일이 됩니다.

결국 내가 이루지 못한 가나안 땅을 위해 다음 세대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10.한국의 현실

 

개인적으로 심히 걱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마치 한국교회는 광야 모세의 때와 같습니다.

리더에 대한 불신과 불평, 원망과 조소입니다.

그럴 있습니다.

목사들의 문제이니까요!

 

그러나 공동체의 문제는 없습니까?

모세를 실수하게 만들고 지팡이를 치게 만드는 일은 없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적어도 광야를 통해 변한 이스라엘의 모습은

리더가 가진 사명에 대한 철저한 순종이었습니다.

 

리더 <개인> 대한 순종이 아닙니다.

리더가 붙든 <사명> 대한 순종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리더의 약함을 문제 삼다가 사명도 이루지 못한 공동체로

광야에서 죽었다는 사실이 저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리더에 대한 제도적 개선과 보안이 마련 반드시 마련 되야 합니다.

하지만 리더가 가지고 있는 사명에 대한 거부 반응과 순종까지 버리게 될까 그것이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교회의 여러 문제가 선교의 문제까지 번져서 선교를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한다고 합니다.

당장 교회가 힘든데 선교는 무슨 말이냐 라고 하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교회 안의 문제들을 해결 하느라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전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공동체의 존재는 사명입니다.

사명 때문에 리더가 있고 사명을 위해 공동체가 존재합니다.

 

한국 교회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리더와 공동체의 <화목> 입니다.

샬롬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십 광야를 지난 백성들의 변화된 실제적인 모습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명에 대한 믿음은 리더가 붙든 사명에 대한 순종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것이 광야에서 보여준 이스라엘 백성의 교훈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하니 결국 리더도 공동체도 광야에서 끝이 났습니다.

그들만 끝난 것이 아니라 다음 세대를 죽음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시대를 살렸던 방법은 리더를 개인적으로 광야의 시간을 보내게 하시고 

리더를 인정하고 리더의 약함에도 사명으로 받아들인

성숙한 공동체의 신앙으로 세워졌지 리더 사람의 탁월함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은 공동체의 성숙이 아니라 온통 리더가 해결되면 해결될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해 하지 마십시오. 공동체보다 리더는 죽어야 하고 희생해야 함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약한 리더의 약함도 끌어 안고 사명을 위해 함께 가는 화목이 중요합니다.

 

지금 시대에 살인자였던 모세가 나타나면 여러분은 순종하겠습니까?

지금 시대에 간음한 다윗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믿고 따르시겠습니까?

첩을 들이고, 간음을 행하는 리더를 하나님이 세우시면 순종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완벽한 리더가 아니라 약한 리더를 세워

공동체의 체질을 먼저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이 사십 광야를 통해 변화된 것입니다.

 

모세가 아니라 공동체가 변한 것입니다.

다윗이 아니라 약한 리더를 품고 안을 있는 성숙한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리더를 완벽하게 만드셔서 시대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약한 리더도 품고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에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이름없는 성도들의 변화된 체질이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모세보다 못한 여호수아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성숙이 시대를 바꾸고

어찌 보면 간음한 다윗을 품는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어가고

어찌 보면 성도를 돌로 쳐죽였던 바울을 통해 세상에 복음을 전하고

어찌 보면 연약한 리더지만 그의 약함을 품고 하나님의 사명을 묵묵히 감당하는

성숙한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유일한 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통해 변화시킨 것은

모세도 여호수아도 아닌 그들의 약함도 끌어 안는

<공동체> 입니다.

 

모든 약함도 끌어 안고 주님 오실 때까지 세상에 복음을 이어갈

공동체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