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미끼는 은혜의 결핍된 마음입니다>
1.은혜의 기준
사람마다 은혜 받았다는 기준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은혜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을 많이 가져도 자신은 은혜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은 유명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수입이 많아도 늘 유명해지는 것을 부러워하고
유명해 지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가 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것 다 좋아도 자식이 잘 되는 것이 유일한 은혜의 증거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고 유명해져도 자식이 잘되지 않으면 그 사람에게 은혜는 없다고 여깁니다.
2.은혜의 결핍의 마음
늘 결핍된 상태로 사는 것, 그것이 <죄의 미끼> 입니다.
죄는 내가 받은 것을 보지 않고 내가 부럽게 여기는 것,
내가 없는 어떤 한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의 결핍된 상태를 만듭니다.
은혜는 늘 풍성한데 내가 세운 기준으로 결핍의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너무 많은 것을 받고 누리고 가졌고,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 같은데,
늘 받지 못한,
자신에게 없는 그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청년들이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으로 늘 우울해하고
내가 없는 것으로 자신을 한정 지어버립니다.
청년 시절에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내가 가지지 못한 어떤 것 때문에 평생 은혜의 결핍 상태로 살아갑니다.
아무리 은혜를 많이 받고 특별한 은사가 있어도
더 높은 곳,
더 부자,
더 유명한 것,
자식이 더 잘되는 그것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가지지 않은 자신의 다섯 달란트를 보지 못합니다.
3.나는?
나는 늘 한 달란트 받은 자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더 가지고 싶은 마음이 아니라 한 달란트를 가졌기에 죽어라 달려 왔습니다.
남들보다 부족하고 남들보다 가진 것이 없기에 그렇게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어느 날 성경을 읽다 나는 과연 몇 달란트를 받은 자인지 객관적으로 궁금했습니다.
최근 가까운 사람 몇 명에게 나는 몇 달란트를 가진 자 같으냐고 물었습니다.
놀라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한결 같은 그들의 대답은 "다섯 달란트" 입니다.
놀라서 다시 묻습니다.
"내가?"
"네!"
나는 평생 그렇게 생각하고 산 적이 없습니다.
나는 늘 한 달란트라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가장 가까이서 보고 경험한 사람의 말은 정 반대였습니다 .
한 달란트가 아니라 다섯 달란트입니다.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바로 <은혜의 결핍의 마음> 으로 사는 삶입니다.
내가 한 달란트든지 다섯 달란트든지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말장난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는 한 달란트대로 사명을 다할 때 하나님은 두 배를 주시고
다섯 달란트는 다섯대로 사명을 다하면 똑 같이 두 배를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늘 은혜의 결핍된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내가 세운 다섯이라는 기준이 나를 늘 결핍된 상태로 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다섯을 받았으나 한 달란트로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니라
내가 없는 것,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의 돈과,
유명해 지는 것과,
자식과,
사역의 열매와 등등의 것으로
자신을 평가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살아갑니다.
4.죄를 향하는 마음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격,
나에게 주신 것에 대한 감사로 시작하지 않는 달란트는
늘 죄를 향할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쩌면 어중간하게 가진 달란트가 더욱 죄를 향하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없는 결핍을 채우기 위해 우리는 늘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습니다.
그것이 아담에게는 선악과 였습니다.
결핍의 마음은 결국 하나님이 정해준 선과 기준을 넘게 됩니다.
돈을 벌기 위해 불법을 행하고,
유명해 지기 위해 편법을 쓰고,
많은 사역의 열매를 맺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남보다 나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는 것입니다.
모두 다 <은혜의 결핍된 마음> 에서 오는 것입니다.
세상을 다 가져도 자신이 가진 어떤 기준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달란트 이상을 넘보는 것이 죄입니다.
그것은 늘 은혜의 결핍된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정한 은혜의 기준 때문에 찾아옵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결코 한 달란트 맡긴 자에게 두 달란트의 의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유함이 있습니다.
두 달란트 맡긴 자에게 다섯 달란트의 열매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게 맡긴 것 만큼만 요구하시기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5.또 다른 두려움
차라리 나에게는 다른 두려움이 있습니다.
내가 두 달란트 받았는데 한 달란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다섯을 받았는데 두 달란트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닌가?
한 달란트를 받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받은 은혜가 많기에 늘 두렵고 떨립니다.
그것이 한 달란트 든지, 다섯 달란트 든지 받은 것이 늘 많습니다.
더 받고 싶은 마음보다 더 드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혹여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이 받았는데 더 드리지 못하면 어쩔까 하는 두려움입니다.
모든 죄는 <은혜의 결핍된 마음> 에서 옵니다.
죄의 시작은 내가 없는 어떤 것에 대한 <결핍의 인식> 에서 시작됩니다.
사단이 준 것은 <결핍의 인식> 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감격이 아니라 내가 <없는 것>에 대한 결핍의 인식 말입니다.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에 대한 가진 것에 대한 인식이
없는 것에 대한 인식보다 크면 감사와 감격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향하는 삶이 됩니다
은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받았는데 내가 정해 놓은 어떤 기준,
내가 세워 놓은 수준이 은혜의 결핍을 만드는 주범은 아닙니까?
우리의 기준은 에덴동산에 머무는 것입니다.
영생의 삶입니다.
사단이 다른 어떤 것을 기준 삼고 뺏으려는 것은 <영원한 삶>에 대한 감격의 삶입니다.
6.기준의 회복-냉철한 열정
은혜의 기준이 채워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결핍된 마음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늘 죄가 엎드려 있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말입니다.
은혜는 우리를 넉넉하게 살게 하지만
결핍된 마음은 늘 미끼를 던져놓고 기다리는 죄와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은 사단이 쳐 놓은 은혜의 결핍된 기준 투성이 입니다.
그 사이사이를 피해서 다닌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그 기준을 넘어서 사는 것이 가능합니까?
세상의 기준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내가 정한 기준을 내려 놓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감격이 <기준> 이어야 합니다.
십자가에 내가 죽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죄가 죽었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기준,
세상이 제시하는 어떤 기준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반응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그 기준을 그냥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냥 이 땅이 기준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기준이게 하십시오.
하나님이 인도하는 삶에 나를 맡기는 것,
구름 기둥과 불기둥에 나를 맡기는 것이 십자가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야,
세상에 반응하지 않아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맞춰 살려는 열정보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나를 맡기는 열정이 더 필요합니다.
그것은 <냉철한 열정> 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세상의 기준인 결핍된 은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구원의 감격에 대한
<냉철한 열정>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