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조건3>
성령이 강력하게 역사하는 곳에는 반드시 있어야 하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을 받아 들이는 곳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이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입니까?
첫째, 예수만 전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로 충분합니다.
말만 하면 예수님만 전하고 말만하면 예수의 이름을 말합니다.
그것이 전부인 사람입니다.
성령이 임한 사도행전의 어떤 곳에도 예수님 말고 전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많은 이론과 신학과 논리로 성도를 혼잡케 합니다.
예수는 말하지 않고 다른 교훈과 세상 이야기로 설교가 충만합니다.
그러니 예수의 영이신 성령이 충만할 수 가 없습니다.
성령의 충만, 부흥은 예수의 충만입니다.
설교 중에 예수님의 이야기,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관한 이야기를 얼마나 하는지 설교를 분석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이야기 말고 많은 이야기를 하는 곳에는 듣기는 좋을지 몰라도 성령의 영으로 충만하지 못합니다.
둘째, 우리는 왜 예수님의 이야기 외에 다른 이야기를 전할까요?
가난하지 않은 곳에서 복음을 전하려니 자꾸 물을 타게 됩니다.
복음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시대가 발달하고 먹고 살만해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예수의 이야기가 재미가 없습니다.
죄와 복음에 대한 이야기보다 세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
지금의 설교들이 자꾸 이상한 곳으로 가는 이유입니다.
목사들이 전하는 메시지도 문제지만 그 메시지를 그렇게 만드는
거친 마음들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 죄의 이야기, 부활과 천국의 이야기를 싫어합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곳에 임한다는 예수님의 첫 산상보훈의 말씀은 의미가 있습니다.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곳에서 시작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부하고, 살만한 곳에서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곳에는 결코 성령이 역사하지 못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르며 심령이 가난한 곳에 예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집니다.
왜 이스라엘입니까?
왜 로마압제 하에 예수님이 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까?
왜 300년이나 넘는 영적 암흑기를 지나서 예수님은 오셨습니까?
어둠이 깊을수록 심령이 가난합니다.
그 시대에 예수님은 복음으로 나타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복음은 <진정한 복음>이 되었습니다.
<씨>가 아니라 <토양> 입니다.
우리는 토양이 아니라 씨를 탓합니다.
하나님은 씨를 준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토양을 준비하시는데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토양에는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예수님의 고향입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곳에서 전하는 복음은 핍박의 이유일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만으로 심령이 가난한 토양에는 얼마든지 능력이 나타납니다.
문제는 그것을 전하는,
예수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경험한 제자들은 예수의 영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그들의 토양에 맘껏 씨를 뿌렸더니 그곳에 영혼들이 주께 돌아오는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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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의 설교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몇 군데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 설교 이후에 반드시 성령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는데 그 설교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마가 다락방 성령이 임한 후 베드로의 설교가 있습니다.(행2장)
이 설교의 핵심은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구약부터 지금까지 그 의미를 풀어주는 것이 다였습니다.
성령이 임한 의미를 먼저 설명하고,
그리고 다윗을 통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합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것이 베드로의 설교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그곳에 삼 천명이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베드로의 전도 설교가 나옵니다.(행3장)
성전미문에서 나면서부터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고쳐주는 사건이 나옵니다.
이 사건은 그냥 구걸하는 사람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토양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입니다.
가난한 토양입니다.
무엇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령이 가난한 토양입니다.
그 토양에 전한 예수의 이름은 능력을 나타내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로 사람들이 솔로몬의 행각에서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어쩔 수 없이 베드로는 또 말씀을 전합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베드로가 먼저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먼저 붙잡았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들의 토양입니다.
뭔가를 구하고 뭔가 영적인 심령의 가난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 뭔가를 강력하게 구했습니다.
돌아가는 그들을 붙잡았고,
가는 그들에게 뭔가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곳에 영적인 놀라운 부흥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셋째, 부흥의 조건은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다시 베드로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하나님이 세우신 예수를 너희가 죽였고,
하나님이 그를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에 관하여는 선자자들의 예언의 응답이고,
모세와 사무엘과 다윗의 상관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다입니다.
한마디로 너희가 죽인 예수는 구약의 언약의 성취이며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는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령이 임하고 전한 때보다 더 많은 <오 천명>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마가 다락방 성령이 임할 때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 역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나라에서 가난한 마음으로 찾아온 흩어진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더니"(2:5 )
수 십일을 찾아오면서 그들의 마음은 가난할 대로 가난한 토양이 된 것입니다.
<한번의 예배>를 위해 천하 각국으로부터
수일, 수 십일을 여행한 예배자 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됩니다.
무엇이 성령이 임하시는 토양입니까?
<가난함>입니다.
<한번의 예배> 를 위해 자신의 전부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달려온 사람들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것은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분을 믿으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우리도 함께 살리실 것이라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이 간단한 설교에 오 천명이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부흥의 조건> 이 무엇입니까?
내가 <예수를 죽였다>는 가난함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거부하고 거역했다는 안타까움입니다.
땅을 치고 회개하는 가난한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난한 토양에 베드로는 예수그리스도를 전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정확하게 표현을 합니다.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말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행3:12)
내가 억지로 뭔가 영적인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니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가난함의 토양에 그냥 예수그리스도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의 이름을 낼 수도, 내가 높아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을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보내시는 곳으로 가는 순수함이 필요합니다.
넷째,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공동체나 개인을 보면 먼저 행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 그 개인과 공동체에 처절하리만큼 낮추시는 시간을 가지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 토양을 <광야>와 같이 <심령의 가난함>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 첫 번째 증상이 <눈물>입니다.
눈물은 아픔이 아니라 성령을 맞이하기 위한 <등불>입니다.
말씀이 임하기 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전 그 공동체와 개인은 지금까지 흘려보지 못한 수 많은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이 일하시는 증상입니다.
성령이 임해서 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눈물의 토양이 성령의 역사에 불을 붙이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충분한 곳에 성령의 역사는 임합니다.
예수님만을 전하는 사람과 가난한 토양이 만날 때 하나님의 놀라운 부흥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이름으로 가난함 말고 더 나은 형편과 <성장>을 구합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이 임하지 못하는 형편을 신앙의 이름으로 더 만들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응답이 <성장>입니까 <가난함>입니까?
예수로 충분하십니까?
베드로도 바울도 스데반도 그들이 전한 것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우리는 아직 부흥을 경험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입니다.
<한번의 예배>를 드리기 위해
수일 아니 수 십일을 달려온 사람들에게 성령을 경험하는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아무나가 아닙니다.
성령의 은혜와 부흥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늘 그런 한번의 예배에 목숨을 거는
가난한 심령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로 충분하십니까?
그런데 우리는 더 버리지 못하고 더 나누지 못하고
함께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씨가 아니라 씨를 얼마든지 받는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쓰시는 것이 아니라
<심령의 가난함>을 쓰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천국이 임하는 이유입니다.
<부흥>은 <한번의 예배>에도 자신의 전부를 걸고 달려오는
공동체의 <가난한 심령> 위에 부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그런 가난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