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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의 조건2-2>

<부흥의 조건2-2>

 

 

 

 

 

 

 

 

 

 

 

<부흥의 조건2-2>

 

둘째, 수용성의 체질을 변화 시키는 , 광야!

 

광야는 우리를 수용성의 토양으로 변화시킨다.

<광야> 같은 말은 <수용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로 보내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성령이 가자고 가고

서라고 서는 수용성을 <극대화> 시키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크기> <능력> 크기가 아닙다.

사람의 크기는 <수용> 크기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수용할 있느냐가 성령이 얼마나 역사하느냐를 결정합니다.

 

하나님의 크기는 얼마나 창조 했느냐의 크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기는 <용서> 크기입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의미론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죽었다는 것은

성령의 일하심에 <절대적 수용성>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일하시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나에게, 나의 공동체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제한합니다.

광야를 지나지 않으니 사람을 기준으로 제한합니다.

사람은 이래서 안되고 사람은 저래서 안된다라고 스스로 제한합니다.

제한은 <스스로> 하나님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스스로 <선과 > 구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능력으로 제한하고 학력으로 제한하고

경험과 실력으로 제한합니다.

그래서 부흥은 없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수용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고 사람들을 제한하고 스스로 판단함으로

하나님의 일하심을 제한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던 모든 곳은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을 수용한 곳에서 일어 났습니다.

빌립도,

바울도,

이방의 땅에 처음으로 성령이 임한 고넬료도 모두 수용성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가장 제단 하기 좋은 사람들,

열두 제자와 사도 바울, 그리고 이방 군대장 고넬료…

그러나 가장 제한 하기 좋은 조건의 사람들을 제한하지 않았기에

성령의 역사는 더욱 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제한 했다면 성령의 역사가 있었을까?

제한 하는 곳에는 결코 성령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신앙이 깊어진다는 것은 기도의 응답을 많이 받아서 돈을 벌고

지위가 높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이 깊어진 다는 것은 성령의 보내심에

<민감해지는 >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모든 성령의 역사의 현장은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들을 <수용한 >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는 성령의 음성이 찾아올 <수용할 자세> 가지게 합니다.

 

기도할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도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보내 주십니다.

그것이 이방에 처음으로 성령이 임한 고넬료의 비밀입니다.

고넬료도 베드로도 기도를 통해 서로를 수용하는 수용성의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기도하지만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을 수용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기도로 그칩니다.

아니 기도로 더욱 자신의 고집을 지키고 아집을 지키고 욕심을 지킵니다.

결코 사람을 수용하는 자세를 가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곳에는 성령이 역사하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읽는 것은 읽는 것으로 그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령의 사람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수용하지 못합니다.

 

죄는 성령이 원하는 말씀은 받아 들이지 않고

내가 드러나는 것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받아 들이지 못하는가?

내가 낮아질 같고 내가 초라해 같아서 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위대함은,

베드로의 위대함은 성령이 보내는 사람들을 세우는 것입니다.

 

기도!

많이 해야 합니다.

성경!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와 성경, 그리고 깊은 설교의 은혜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얼마나 받아 들이느냐로 꽃을 피웁니다.

 

우리는 뿌리고 물주고 기다리지만

결정적으로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들을 수용하지 않기 때문에

열매 맺지 못하는지도 모릅니다.

 

부흥은,

성령의 강한 역사는 <신앙의 수용성>입니다.

말씀을 듣기 전에 사람을 성령의 사람으로 받느냐 받지 않느냐가 결과가 이미 결정이 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받아들이는 수용성,

인격적인 깊은 관계로 우리 공동체 안에 그를 머물게 하고 지나가게 하는

수용성의 깊이와 비례한다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알까요?

 

성령의 역사!

<사람> 대한 수용성입니다.

 

그럼 어떤 사람을 수용해야 하는가?

성령의 사람을 어떻게 구별 있는가?

다음 편에 하려 합니다.

하지만 반응 보고 할지 말지 결정하려 합니다. ^^

글이 길어지면 반응이 없어서...

 

성령의 은혜!

개인과 공동체의 인격적인 <수용성>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