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흥의 조건2>
기도를 많이 하면 정말 부흥이 올까요?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으면 정말 부흥이 올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
그런데 사도행전의 이야기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지만 않음을 봅니다.
첫째, 사람에 대한 수용성이다.
그 수용성이란 사람을 제한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 들인다는 것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받아 들인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받아 들여야 말씀이 들립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곳은 늘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요인 중에 하나는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을 그 공동체가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몇 가지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예루살렘 교회가 사도 바울을 받아 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스데반을 죽이는데 일등 공을 세운 바울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큰 어려움이지만 교회사적으로 가장 큰 축복입니다.
빌립이 사마리아에 전도할 때 그곳 공동체는 빌립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그곳에 놀라운 권능이 일어나고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을 수용한 일로 베드로와 요한을 다시 받아 들이게 되고 그곳에 성령을 받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물론 빌립은 후에 성령의 음성인 광야 가사로 가라는 음성에 본인 스스로 수용성을 가진 사람이어서
순종하고 이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고 한 나라가 복음을 듣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성령의 음성을 받아들이는 자세, <수용성>입니다.
사울을 처음으로 받은 사람은 성령의 음성을 받아들인 다메섹에 사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입니다.
그는 믿는 자를 죽이려는 사울을 위해 기도했는데 그것은 성령의 음성에 순종한 수용성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예루살렘 교회에 연결한 사람은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을 교회 안으로 받아 들이는데 처음으로 수용하고 길을 연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방에 처음으로 성령이 임하는 기적을 받은 고넬료라는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이 있습니다.
그는 성령이 베드로를 초청하라는 음성에 베드로를 초청하는 수용성의 사람입니다.
물론 베드로도 성령의 음성에 고넬료를 받아들이는 수용성의 자세를 가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초청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을 때 그곳에 마가의 다락방과 같이 가 사람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방언을 말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합니다.
부흥의 조건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받아 들이는 <수용성>입니다.
말씀이 역사하기 전에 그 사람을 받아 들이는 수용성에 유연한 공동체와 사람은 성령에 강하게 노출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지 않는 곳은 늘 사람에 대하여 부정적이고 제한적이며
하나님의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은혜가 충만한 교회는 늘 사람에 대하여 신뢰가 강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람에 대한 기대감이 충만합니다.
말씀의 사역자이든 아니든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이라는 확신과 믿음의 강함에 비례해서
그 공동체나 사람은 성령에 많이 노출되어 성령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흥은 사람을 통하여 임합니다.
성령은 자신의 사람들을 어떤 곳, 어떤 공동체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가 충만한 곳은 그런 사람들을 제한 없이 받아들입니다.
그곳에는 늘 하나님의 사람들과 교제하고 교통하고 영적 네트웍이 활성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 교회는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니 들어가도 성령이 보내신 사람으로 받지를 못합니다.
기도만 많이 하는 것을 봅니다.
성경만 많이 읽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정작 기도의 목적, 성경을 읽는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보기 위함인데
성령이 보내시는 기도의 응답,
말씀을 깨닫게 해줄 사람을 제한하는 곳에는 결코 성령의 역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설령 사람을 받아 들인다 해도 제한적이고 부분적이고
<인격적인 교제>와
<나눔과 섬김의 교통>은 일체 없음을 봅니다.
인격과 인격이 <교제>하고
마음과 물질을 나누는 성도의 <교통>은 없다는 말입니다.
<무너짐>과 같은 말은 <제한>입니다.
공동체가 메말라가는 이유는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을 제한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나
<성령의 역사>는 성령이 보내시는 <사람들>을 받아들인
<수용성의 역사>입니다.
왜 아브라함인가?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 하셨는가?
인간적으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이유를 찾으라면 사람을 수용하고
천사를 수용하고, 멜기세덱을 수용한 아브라함의 <수용성>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초대교회의 복은 받은 성령이 지속되도록 수용성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고,
성령이 지속적으로 역사한 곳에는 바로 수용성의 영적 자세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천사를 대접한다는 의미는
성령의 사람들을 수용한다는 의미라 여깁니다.
하다못해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도 아니고 신앙의 사람도 아닌
장인 이드로의 충고를 수용했습니다.
모세는 고집불통 외고집인 인생에서
어떤 누가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는 <수용의 사람>으로
광야를 통해 변화되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늘
당신의 사람을 보내어 일하십니다.
그것이 성령의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을 받아 들일 때 성령은 우리와 함께 역사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