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하나님의 얼굴 > (시편 24편-2)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자는 오직 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법궤가 들어올 때 그들이 불렀던 첫 노랫말은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왕으로 주인으로 인정한 인생에 나타나는
또 그렇지 못한 인생에게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여호와의 산에 오르느냐 오르지 못하느냐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되어 집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24:3)
첫째, 손이 깨끗한 사람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24:4)
그런데 이 땅에서 손이 깨끗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다윗도 그 손에 피를 많이 흘려 성전을 지을 수 없다고 하나님을 말씀 하셨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청결하며"(24:4)
손이 깨끗하지 못한데 어찌 마음이 청결하게 됩니까?
행동의 깨끗함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데 어찌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서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다고 말합니까?
불가능합니다.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나를 알고 하나님이 나를 압니다.
그런데 성경이 우리에게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합니다.
셋째,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24:4)
인생의 본질은 늘 높은 곳입니다.
그것이 죄의 결과입니다. 죄의 본성입니다.
늘 틈만 생기면 남들보다 더 높은 곳에 서고 싶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허탄한 곳에 마음을 두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목표와 뜻이 늘 안개와 같은 것인데 그것에 뜻을 두지 않는 자가 거룩한 곳에 선다고 말합니다.
갈수록 더 어려운 기준을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넷째,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24:4)
우리의 입술은 늘 부정합니다.
그래서 거짓을 말하고 속이고 절대 그렇지 않다고 쉼 없이 말합니다.
우리의 입술은 늘 거짓의 맹세로 하늘과 땅에 죄를 짓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로 돌아오지 않았던 이유는 앞서 네 가지 이유입니다.
그들의 손이 깨끗하지 못했고 마음이 청결하지 못했고
뜻을 허탄한데 두어 하나님을 이용했고
거짓을 말하고 하늘과 땅으로 거짓 맹세를 해서입니다.
그것이 법궤 즉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 가운데 사라졌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조건을 내 세우며 거룩한 곳에 설 것이라고 말하니
누가 과연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다윗도 불가능하다고 한 조건을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얻는 자의 조건으로 내 걸고 있습니다.
누가 가능합니까?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누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서게 됩니까?
법궤입니다.
법궤가 이스라엘로 들어올 때 부른 노래입니다.
법궤는 지성소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죄의 은총을 상징하는 것이 지성소 한 가운데 놓이는 법궤입니다.
율법으로는 그 누구도 오르지도 서지도 못하지만
법궤의 상징,
지성소의 상징인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만이 설 수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용서입니다.
참 인생의 시작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단 한가지 이유는
법궤의 시온좌에 임하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
용서의 은혜가 임할 때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도 서지 못하는 자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자리입니다.
속죄함,
의롭다 함을 얻는 것,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인침을 받는 것은 그분의 이유 없는 사랑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은 영광의 왕이 들어오신다고 문을 열라고 하기 전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노래합니다.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라고 찬양합니다.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24:6)
둘째, 야곱의 하나님의 의미
야곱은 장자의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닙니다.
형 에서의 장자권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빼앗고 그의 꾀와 약은 머리로 평생을 험악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누가 거룩한 곳에 서고 누가 하나님의 산에 오르느냐의 문제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할 때 꿈에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약속한 것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나올 때도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로 살지만 결정적으로 한번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 때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끝까지 구합니다.
허벅지가 관절이 어긋날 정도로 씨름을 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구한 대가로 그곳의 이름을 하나님의 얼굴 즉 브니엘이라 칭하게 됩니다.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찾는 것을 말합니다.
야곱이 씨름을 하고 자신의 몸이 상할만큼 끝까지 여호와를 붙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찾을 때만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을 경험합니까?
하나님을 끝까지 붙드는 사람만 경험합니다.
오늘 다윗은 그 야곱이 구했던 하나님의 얼굴,
즉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구했던 야곱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자격으로,
조건으로,
율법으로,
다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설 사람은 없지만
우리와 늘 함께 하시지만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찾고 찾으며 구하고 구하는 가난한 심령의 마음을 가진 자가 그분의 거룩을 본다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까?
그분을 구하는 자입니다
야곱이 구했던 하나님의 얼굴,
야곱이 얻어 냈던 씨름의 결과로서의 끈질긴 씨름이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법궤를 들이면서 야곱이 씨름하며 구하고 기다렸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그렇게 야곱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 서야함을 기록합니다.
이 땅을 살면서 힘든 일을 만납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고 앞에 죽음이 있고
나를 죽이려는 환경과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이 수 없이 펼쳐진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때 다윗은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서기를 바라며
오늘 야곱의 얼굴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를 찾는 족속,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는 야곱처럼,
자격이나 조건으로는 결코 설 수 없는 야곱이지만
씨름함으로 주를 구한 인생이 얻는 것은 그분의 영광입니다.
힘든 인생 길에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바랍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을 내 인생에서 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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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에 맞아 죽은 사역자 후임으로 와서 사역을 하는 무따디 전도사입니다.
여전히 무당은 교회 앞 80미터 지점에 살고 있습니다.
날마다 죽음의 위협이고
날마다 어둠의 세력이 위협을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좌절하고 실패하고 낙심하고 소망이 없는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그 힘든 인생에 결정적인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은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씨름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통해 내 이름이 바뀌고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렇게 보낸 시간을 통해 영혼이 세워짐을 봅니다.
어떤 교회보다 아름다운 교인들이 세워집니다.
이번주일은 감사절입니다.
교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거는 목자를 위해
놀라운 선물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늘 우리와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얼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