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왕을 보는 자> (시편 24편-1)
여호와는 어떤 분입니까?
누가 그분 앞에 설 수 있습니까?
그 답을 오늘 시편 24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시편은 법궤와 관련이 있는 찬양입니다.
법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잠깐 살펴봅니다.
-모양
법궤는 언약궤(Art of the Covenant) 라고 합니다.
때로는 증거궤, 하나님의 궤, 여호와의 궤라고 불리는 사각형의 상자입니다.
약 1.2M 길에에 폭이 75CM, 높이가 75CM가 되는 상자입니다.
온통 금으로 되어있고 조각목인 아카시아 나무로 만든 상자입니다.
네 모둥이에 고리를 달아서 반드시 제사장이 어깨에 매고 운반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언약궤의 덮게는 서로 마주보는 그룹(cherubim)이 날개를 펼치고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내용
법궤 안에는 '십계명을 새긴 두 돌판'(신10장)이 있고
'만나를 넣었던 항아리'와 '아론이 사용했던 싹난 지팡이'(히9장)가 있습니다.
-장소
법궤는 성막 안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지성소에 놓아 두었습니다.
이 지성소는 오직 대제사장이 일년에 한번 대속죄일에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대제사장은 이 지성속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특히 법궤위 덮게에 있는 두 그룹 사이의 장소인 '속죄소'혹은 시은좌에서 죄 용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법궤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이 법궤는 가장 앞서서 나아갑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그렇고(수3장),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도 법궤를 앞세워서 돌았습니다.(수6장)
법궤가 앞서는 곳에는 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 중에 전쟁에 능하신 주시라는 표현도 법궤에 관련된 표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역사
그러나 법궤는 가나안 전쟁을 치른 후 블레셋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치명적인 아픔이 됩니다.(삼상4장)
그리고 다윗의 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게 되는데 오늘 시편은 법궤를 빼앗기고 블레셋에게 다시
찾아오는 여러 일들과 관련되어 기록된 시편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성전을 완공하고 법궤를 지성소에 두자 여호와의 임재가 충만했습니다.(왕상8,대하5장)
후에 우상숭배의 왕인 므낫세 때에 하나님의 성전에 아세라 목상을 갇다놓지만(황하33장)
종교개혁을 단행한 요시야 때 아세라 목상이 빻아져 가루가 되고(대하34:7) 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망하고 예루살렘 성전도 파괴됩니다. 이후에 법궤는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이상이 대충 법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혹 잘 알지 못하는 분을 위해 설명을 간단히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더 깊은 법궤에 대한 이해를 위해 구약의 사건을 몇 가지 더 살펴보려 합니다.
- 법궤를 빼앗김(삼상4장)
사무엘이 선지자로 세움을 받는 어린시절에 전쟁의 위기를 겪자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옵니다. 그때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와 함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만하지만 블레셋은 두려움에 사입니다. 그러나 이때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삼만명이 죽고 옵니와 비느하스도 죽게 될뿐만 아니라 그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은 나이 98세에 의자가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브느하스의 아내가 아이를 낳는데 그 이름을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라는 뜻의 이름을 짓습니다. 이스라엘에 <영광이 떠났다>는 것입니다.
법궤가 있는 곳에는 늘 전쟁의 승리가 있고 승리는 곧 영광으로 이러졌지만 이제는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 법궤의 행로(삼상5장)
- 아스돗
법궤가 블레셋 사람들 중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신이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다곤 신전에 법궤를 갖다 놓았지만 다곤이 법궤 앞에 얼굴을 바고 엎드러져 있습니다. 일으켜 놓으면 다음날 다시 엎드러지고 그 다음에는 목과 두 손목이 끊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신전이 있던 아스돗 지역 사람들은 독한 종기가 나서 지역이 온통 엉망이 됩니다.
- 가드
사태가 심각하지 아스돗에서 가드로 옮깁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 일이 벌어지는데 더욱 심해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 종기로 망하게 됩니다.
가드에서 에그론으로 옮기려 하자 에그론 사람들이 데모를 합니다. 법궤를 받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 벧세메스
결국 회의를 하게되는데 이 법궤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으면 다 죽으니 법궤를 유다의 벧세메스로 소가 끌고 가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젖을 땐지 얼마 안된 소가 눈물을 머금고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로 옵니다.
그리고 그곳에 온 법궤를 사람들이 그 안을 쳐다 보는데 그 일로 오만 칠십명이 죽게 됩니다.
이때 벧세메스 사람들이 슬퍼하며 하는 말입니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이르되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삼상6:20)
이 말이 곧 오늘 시편 24편 3절의 내용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24:3)
-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
결국 기럇여아림의 아비나답의 집 사람들에게 말해서 법궤를 가져다가 아비나답의 집에 두고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법궤를 지키게 하여 이 십 년 동안 머물게 됩니다.
- 오벧에돔의 집(삼하6장)
사무엘이 죽고 그의 아들들이 제사장이 됩니다.
그리고 사울왕도 죽고 다윗이 왕이 됩니다.
이때 하나님을 사랑하여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 하는데 그동안 가지고 있던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에 싣고 소가 끌고 가져옵니다.
그런데 수레를 끄는 소들이 나곤의 타작마당에서 뛰므로 법궤가 떨어지려 하자
웃사가 잡았는데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게 됩니다.
다윗은 결국 법궤 가져오기를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달을 두게 됩니다.
지금까지와 달리 오벧에돔의 집이 여호와의 복을 받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소가 아니라 제사장을 통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그것을 너무 기뻐해서
에봇옷을 입고 춤을 추다 옷이 내려가는 일도 생기고 그것을 업신 여긴 사울의 딸 미갈은 평생 자식이 없게 됩니다.
이스라엘을 떠났던 법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들어올 때 앞에서 있던 제사장들이 소리를 칩니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
이것이 오늘 시편이 불리워진 배경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 법궤가 들어올 때 그들은 노래하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입니까?
어떤 하나님을 찬양합니까?
첫째, 주인인 하나님입니다.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24:1)
그들이 법궤를 가지고 오며 깨달은 것은
온 세상은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강과 바다에 터를 삼으셔서 세상을 소유로 삼으신 분이 지금 법궤를 통해 들어오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모시고 오고 싶어도 오지 못했던 법궤가 이제 수 십년의 시간을 지나 마침 들어오는데
누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고 누가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느냐고 질문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24:3)
아무도 가져 올 수 없었고
어떤 방법으로도 가지고 오지 못했던 법궤를 누가 모실 수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전제입니다.
창조하신 하나님, 전부를 가지신 하나님을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것을 인정한 사람은 다음 몇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법궤를 부적처럼 사용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법궤만 있으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고 모든 일이 잘 풀린다고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모시고 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상징인 어떤 것, 어떤 예배, 어떤 형식을 드린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다고 내가 하나님을 붙잡는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잘못 잡으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잘못 섬기면 재앙만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잘못 섬기면 죽음이 찾아옵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듯이 그저 호락호락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고 세상의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며
모든 인생과 세계의 기초를 세우시고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어떻게 하면 만나며 그분의 산에 누가 오르고
어떤 사람이 그분의 거룩한 자리에 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시편의 질문입니다.
여러분!
누가 그분의 거룩한 산에 서며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서서 그분을 만나게 됩니까?
하나님 한번 만나고
하나님을 한번 모시는 것이 이렇게 어려웠던 구약의 시절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만나고
거룩한 곳에서 그분과 만나고 있습니까?
너무 쉽게 그분을 예배하고
너무 쉽게 그분을 이해하고
너무 쉽게 그분과 지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분과 동행하려고 다윗은 수 십 년을 기다렸습니다.
우린 어떻습니까?
누가 주와 동행하며 그분의 산에 오르며
그분의 영광을 봅니까?
하나님은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입니다.
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사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이 찬양의 시작입니다.
오늘 법궤의 역사를 아는 사람,
법궤의 깊은 역사를 삶으로 아는 사람이 처음 부른 이야기는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한 사람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들어가기 전 돌아봐야 할 것은
나는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느냐입니다.
내 시간,
내 비전,
내 목표,
내 물질,
내 관계,
내 소유가 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시편을 부를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합니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문들아 머리 들어라 영광의 왕 들어가신다.
라고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은
여호와 하나님은 주인으로 인정하는 인생입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그것이 찬양의 시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서며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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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스트로노스 교회 교인의 춤추며 찬양하는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잘 인정합니다.
그런데 내 자존심 내 부끄러움은 내 놓지 못합니다.
내 자존심이 떨어져야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다윗이 그렇게 고대하던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들어오자
옷이 흘러 내리는지도 모르고 춤을 춥니다.
자신의 자존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은 하나님이 주인임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지막으로 고백할 것은 우리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울 왕의 딸 미갈은 아버지의 신앙을 따라 자신의 자존심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계집종들 앞에서 무슨 짓이냐고 흠을 봅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아무리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찬양해도
그 계집종들보다 존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 놓아야 하나님의 영광의 문으로 들어갑니다.
다윗은 그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 놓아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지막 자존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내려 놓아야 내 인생에 참 주인으로 만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