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노래> (시편 23편-3)
여호와는 나의 목자십니다.
그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고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런데 어디로부터 인도하십니까?
시편 23편을 너무 좋아하지만 우리는 다윗이 진정으로 이 노래를 부른 의미를 잘 모릅니다.
그저 지금 좋은 곳에 있기에 먹을 것 누울 곳이 있기에 좋아서 좋은 것입니까?
다윗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이유,
그분이 나의 진정한 목자가 되는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사망으로부터의 회복이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23:4)
다윗이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된다고 고백한 이유 두 가지 중에 한가지는 <사망>으로부터 나를 지키심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의 원어는 '무덤' 입니다.
내가 영원히 사망에 거하지 않도록 그 죽음의 그늘에서 숨을 쉬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 사망으로부터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십니다.
안위의 원어는 '나함' 입니다. 그 말은 숨쉬다는 말입니다.
즉 주께서 죽음의 상황에서 나에게 '숨을 쉬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인류의 문제는 사망의 문제입니다.
아무리 푸른 초장이 좋고, 쉴 만한 물가가 좋아도 숨을 쉬지 못하는 사망의 상태는
그 모든 것이 지옥입니다.
내 안에 숨을 쉬는 호흡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내 안에 숨을 쉬는 생명의 호흡이 없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말한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는 바로 숨을 쉬는 호흡을 말합니다.
사망으로부터의 회복은 즉 <성령의 호흡>입니다.
다윗이 말한 안위는 주의 일하심으로 상징되는 지팡이와 막대기로 우리로 호흡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왜 인간에게 죽음이 찾아옵니까?
왜 사망으로 무덤 가운데 있습니까?
성령의 생기인 하나님의 호흡이 우리 안에 끊어지면 우리는 산 자나 죽은 자 입니다.
진정한 노래는 우리 안에 이 호흡이 생겨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누렸던 하나님의 생기의 호흡,
그분으로 호흡하고 생각하는 생기가 그분의 목자가 되어 주시는 가장 위대한 축복인 것입니다.
내 안에 이 호흡이 있습니까?
내 안에 이 생명의 호흡이 있습니까?
사망으로부터 그분이 지키시는 은혜의 길은 오직 성령의 호흡이 회복될 때입니다.
일을 하려 하지 말고 그분과 더불어 호흡하십시오.
일은 그분이 하십니다. 단지 우리는 그분의 호흡에 맞추어 숨을 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땅에 우리가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는 비결입니다.
둘째, 원수로부터 회복입니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23:5)
예수님의 궁극적 사역의 시작은 사망으로 죽어가는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 넣는 것입니다.
그분과 더불어 호흡하고 그분과 더불어 숨을 쉼으로 우리 안에 영원이 찾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마지막 사역은 우리 안에 있던 원수를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욥의 손을 들어주시듯,
원수가 보는 앞에서 우리에게 그분의 의인으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목자로서 마지막 사명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23편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인도하신 것을 노래했지만
선지자였던 그가 앞으로 되어질 인류의 모습과 그리스도를 통한 우리의 모습을 동시에 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기는 것은
좀더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좋더 좋은 직장, 좀더 공부를 잘하는 것,
좀더 좋은 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 받는 것입니다.
원수는 교묘합니다.
원수는 합리적으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이론적이고 이성적으로 접근합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많은 기회 앞에 원수는 수 없이 외쳤을 것입니다.
'너의 원수다'
'너를 죽이려던 그 원수 사울이 네 앞에 있다'
'지금 죽이면 너는 해방이다. 죽여라 죽여라'
수 없는 합리적인 외침과 이성적이고 타당한 이유를 대가면서 나를 유혹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원수는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뒤에서 그들을 조종하는 하늘의 권세 잡은 자들입니다.
다윗이 승리한 것은 눈에 보이는 사울을 죽이지 않아서입니다.
사울을 통해 역사하는 죄와 사망과 원수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서입니다.
우리는 자꾸 눈에 보이는 우리의 동족들이 우리의 원수로 생각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우리의 원수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영적인 원수를 봐야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손에 움직이며 조종당하는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겸손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이 승리입니다.
그것이 원수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 일을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원수들을 자신의 손으로 심판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의 원수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원수는 사망입니다.
악한 영이 마지막까지 무기로 사용하는 것은 사망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예수 믿지 않고 세상을 따라 살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망에 대하여 자신을 드립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의 손에 드립니다.
자신을 드릴 때 하나님께서 원수인 사망을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의 길은 십자가 이고 그 십자가에 예수님은 자신을 드렸고
드림으로 하나님은 사망을 심판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과 호흡할 때 우리 안에 원수된 사망이 물러가고 영원이 찾아옵니다.
다윗의 시편은 오늘 그것을 노래하는 있습니다.
셋째, 사망과 원수로부터 지키심의 목적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23:6)
우리의 궁극적 목적은 이 땅의 잘 사는 삶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원한 목표는 여호와와 더불어 사는 그 집입니다.
그런데 그 집에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먼저, 선하심입니다.
원어로 사용된 '토브'라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라는 것은 히브리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 됩니다.
우리의 열심이 아니라 그저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지는 축복이 결국 여호와의 집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인자하심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단어는 모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의미합니다.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그분의 사랑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선과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이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찾아올 때는 그것은 선물로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그저 주시는 선물로 우리 인생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그분은 나의 목자가 되고
그분으로 영원히 그분의 집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아니라 은혜입니다.
믿음입니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문제만 아니라 인류의 문제,
구원의 문제,
심판의 문제,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까지 포함하는 노래입니다.
짧은 6절의 노래에 놀라운 깊이와 넓이가 함축된 노래입니다.
인류와 하나님과의 평행한 갈등의 구조는 결국 원수와의 갈등입니다.
그 마지막 종지부를 다윗은 믿음으로 짓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어디를 향해가고 무엇을 위해 싸우며
누구를 의지하고 갈지 아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다 가지고 더 가질 것 없는 왕이었지만
그는 다른 것을 의지 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인생들이 뭐 하나 더 얻겠다고 하나님 외면하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아무 의미 없고 쓸모 없는 것 하나 붙들려고 자신의 목숨을 내 놓고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을 향하여 가장 가치 있는 노래를 오늘 다윗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장 가치 있는 싸움은 원수와 이기는 것입니다.
사망으로부터 이기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고 싸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대적들과의 전쟁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싸움에서 이기게 하기 위해 성령의 호흡을 주셨고
오늘도 우리와 동해하며 호흡하십니다.
우리의 싸움은 좀더 나은 환경이 아닙니다.
그분의 수 천년의 싸움에 동참하는 원수와의 싸움입니다.
결국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그 원수로부터 하나님이 인정하는 상(a table)을 베푸심입니다.
원수를 이기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작은 것 얻었다고 부르는 콧노래가 아니라
원수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선물로만 가능합니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선물!
그것이 우리가 부를 노래의 이유입니다.
.
.
.
.
* 무당의 총에 맞아 죽은 파니전도사님의 딸 엘리자벳입니다.
네 명이 개척을 하러 들어갔다가 막내는 8개월 만에 병으로 죽고
아버지 파니전도사는 무당에게 총을 맞아 죽어 엄마와 둘이 살고 있습니다.
엘리자벳은 동생이 묻혀있는 외할머니 집에서 사는데 몬스트로노스교회 근처입니다.
상처가 많아,
하나님이 원망스러워 하나님을 저주하고 욕하고 떠날 수 있지만
더더욱 하나님을 찬양하며 교회를 섬기며 봉사합니다.
구역이 방문한 오늘도 가장 이쁘게 입고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어떻게 기억을 하셨는지 조안나사모가 한국 라면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라면을 한 박스 선물로 주셨습니다.
마음이 얼마나 감동이 되고 따뜻해지는지요.
벌써 일년 전에 다녀가셨는데 그때 제가 조안나가 한국 라면을 좋아한다는 말을 했는데
그것을 기억하시고 올해 선물로 주셨습니다.
원수를 갚는 길은 원수를 향하여 욕하고 같이 대적하고 이 에는 이 피에는 피가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갚은 것임을 이 아이를 통해서 배웁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주께서 이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하여
이들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물이 풍성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