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아름다운 것> (시편 23편-2)
그렇게 좋은 하나님,
나의 목자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결국 하나님이 내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원래 자리로 있게 한 것입니다.
위대한 찬양, 시편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의 내용은 결국 원래 자리로 돌이키시는 축복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원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집을 떠난 탕자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아버지의 집이고
형들에게 팔린 요셉에게 가장 아름다운 것은 가족들과 함께 사는 것이고
동족을 떠난 모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동족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일은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시고 나의 여호와가 되시는 고백의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있던 자리에 다시 돌아온 것!
어린 나이에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죽을 고생을 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쫓겨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함을 받은 마지막이 어디입니까?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자리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인류는 원래 자리를 떠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다윗의 노래는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온 인류를 대표하는 노래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자가 되고 나를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는 아름다운 풍경은
우리가 원래 누려야 할,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를 찾은 후에 부르는 노래의 전부는 원래 자리에 다시 돌아온 기쁨을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찾은 기쁨의 이야기가 탕자 비유의 이야기이고
열 드라크마 이야기이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들의 핵심은 원래 자리를 회복하는 기쁨을 말합니다.
다윗의 기쁨은 바로 그것입니다.
원래 자리를 찾은 기쁨,
잃었다가 다시 찾은 기쁨을 말합니다.
뭔가 더 받고 뭔가 더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것,
약속 받은 자리,
약속 받은 권세를 그저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읽고 암송하면서 나의 채우지 못한 꿈,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위해 암송하고 주문처럼 외우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시편은 그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처절한 안타까움에서 다시 회복된 약속에 대한 기쁨을 노래하는 찬양입니다.
둘째, 회복되지 못한 것에 대한 눈물
오늘 찬송과 연결된 곳은 눅15장 입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함을 보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이해하지 못함을 보고 한 비유가
탕자비유, 잃은 양비유, 열 드라크마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찾은 기쁨입니다.
반대로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입니다.
즉, 회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눈물을 말합니다.
다윗이 바로 이 노래를 부르기 전까지 수 많은 날들을 회복되지 못한 것에 대한
눈물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왕이 될 줄 알았는데 본인이 원한 것도 아닌데 인생이 꼬여서
왕으로 세움을 받고 평생 발 한번 쭉 펴지 못하고 잔 날들이 거의 대부분이라는 말입니다.
지난 인생은 회복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눈물과 아픔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을 거꾸로 말해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겨우 좀더 잘 살기 위해
우리는 겨우 지금보다 좀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목자를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전부를 잃어버린 마음으로 인류를 운행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해 아들의 목숨도 내놓고
자신의 선지자들도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그림자로 구약의 시대를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 회복되지 못하고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한 것 때문에
수십 수백 아니 수 천 년의 시간을 고통의 시간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은 이미 이루어진 노래입니다.
그러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노래입니다.
시편 23편은 종말론적 노래입니다.
신학적으로(가능하면 쓰지 않으려하지만) 종말론을 한마디로 'already not yet' 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이라는 말입니다.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역사와 심판이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전한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언젠가 그것이 완성되고 다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노래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중적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미 이루어져서 기쁨을 노래하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수 많은 인생과 사역과 이야기가 남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한 구원과 심판이 이루어지기 까지 이 땅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은 자리로 인해 눈물의 노래입니다.
시편 23편이 기쁨의 노래입니다.
그러나 시편 23편은 너무 슬픈 노래입니다.
누군가는 23편은 간증적인 찬양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희망적 찬양입니다.
예수님께는 어떤 찬양일까요?
저는 희망적 찬양이 더 가깝다 여깁니다.
왜요?
아직 회복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직 자기의 자리를 찾지 못한 인생이 많습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아픔을 안고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회복되지 못한 자들,
잃어버린 자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복에 대한 기쁨과 동시에 잃은 거에 대한 아픔과 눈물과 슬픔도 'already not yet'의
종말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언젠가 이 시편이 희망과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눅15장의 잃어버린 것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생각나서 더 마음이 아픕니다.
죄인들을 찾으시고 아픈 자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하늘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의 마음은
온데간데 없고 오직 자신들의 눈으로 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그들을 환영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저들을 향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안타까움이 기억나기 때문입니다.
찾은 기쁨이 있지만 찾지 못한 안타까움이 더 깊어
자신의 전부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겨우 내 것 좀 더 좋은 것 얻고자
이 시편을 암송할 것입니까?
겨우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실 것이라는 개인적인 희망을 넣어서 이 노래를 부를 것입니까?
이 시편은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 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원래 자리를 회복하는 순간을 위해 아직도 이뤄지지 않은
회복을 향하여 나아가는 인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노래는 환경이 아니라 악인과 대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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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목요일부터 죽지 않을 만큼 아팠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아팠던 편도염 고통 이후 평생 처음 느끼는 고통과 힘듦에 2박 3일을 꼬박 세었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편도선염에 하루 만에 편도에 염증이 다 퍼졌습니다.
다행히 진희생이 보내준 약들로 이것저것 먹으면서 오늘 점심부터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
오늘은 마침 선교지 구역방문이 있었습니다.
이틀 동안 아이들 픽업도 못하고 거의 죽음상태로 아픔을 부여잡고 지냈습니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는 고통과 온 몸을 때리는 아픔에…
갈 때는 집사님 한 분이 내 차를 운전하고 갔습니다.
감사하게 선교지에 있는 동안 몸살기운은 나아져서 돌아올 때는 제가 운전을 하고 왔습니다.
평생 갑자기 이렇게 심하게 아파 본적은 처음이네요~ 죽을 만큼…
진희샘이 전에 편도 수술을 할 때 이런 아픔인가 생각을 합니다.
아직 편도도 많이 부어서 안 좋고 염증도 많이 있지만 몸 아픈 것은 많이 나아져서
겨우 책상에 앉을 수 있어서 묵상도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원래 자리로의 회복입니다.
아마 이 묵상 때문에 몸이 갑자기 이렇게 안 좋았나 생각도 해 봅니다. ^^
하나님 나라의 회복!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심각하며 자신의 전부를 거신 하나님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아픔을 동반한 날마다의 인내의 걸음이 바로 삼위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다윗을 그것을 알고 회복에 대한 감사와 기쁨,
그리고 회복이 있기 전까지의 수 없는 고통과 눈물을 삶으로 깨닫고 부른 노래가 오늘 시편 23편입니다.
시편 23편!
그냥 기쁨의 노래가 아닙니다.
슬픈 노래를 수 없이 삼킨 깊은 아픔을 동반한,
아직 이뤄지지 않은 회복에 대한 아픔을 동반한 노래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23편이 기쁨이지만
이뤄가야 하는 과정에서의 23편은 슬픔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세상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 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