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침묵할 때 가장 위대한 일을 하십니다> (시편 22편)
내가 느끼는 감정과 하나님의 일하심과는 다른 것입니다.
나는 너무 힘든데 꼭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 가장 큰 일을 하십니다.
오늘 다윗은 엄청난 고난과 죽음의 위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욕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한다면 불러봐라.
그곳에서 벗어나 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모욕하고 옷을 벗기고 부끄럽고 수치스런 상황입니다.
그때 기도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22:1)
환경의 아픔과 적들로 인한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입니다.
알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너무 힘들고 아픈데 그 아픔보다 더 힘든 것은
나를 늘 지키신다는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내가 흘리는 눈물에 외면하시는 하나님의 침묵, 그것이 나를 더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오늘 자신을 몰아치는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절규합니다.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뿐만 아닙니다. 세상이 더욱 조롱합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7-8)
조롱만 하지 않습니다. 나를 찢고 나의 속옷을 나누고 내 뼈가 보일 만큼 앙상하게 될 만큼 고통을 당합니다.
그 모든 죽음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신다는 내용이 오늘 1절에서 21절까지의 내용입니다.
첫째, 침묵하시는 하나님!
위대한 왕이 될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서 유명해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정복하고 세상이 알아주는 왕이 될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 그렇게 용모가 준수하고 능력이 있는 형들, 보기에 왕처럼 보였던 형들이 아닌 다윗을 기름 부어 왕이 되려고 지목을 했기에 정말 놀라운 왕이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에게 결정적인 순간에는 침묵하셨습니다.
세상이 조롱하고 세상이 욕하고 머리를 흔들며 네 하나님을 보여보라고 야유합니다.
정말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하다 느끼는 순간에는 하나님은 여지없이 침묵하십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고 밤낮 부르짖어도 잠잠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22:1-2)
정말 필요할 때는 하나님은 그냥 침묵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을 이루기까지 25년이 걸렸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아들 하나 주시는데 25년이 걸렸습니다.
요셉에게 꿈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달과 별과 해가 자신에게 절하는 꿈입니다. 자신이 꿈을 꾼 것도 아닙니다. 그냥 꿈이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의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이 이루어지는 데는 13년, 아니 그 이상이 걸렸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13년이 흘렀습니다.
골리앗도 물리치게 했는데 왜 하나님은 또 그렇게 침묵을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약속을 한번 했다 하면 기본이 13년 입니다.
좀 길다 하면 40-50년이고 더 길면 400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는데 430년을 침묵하십니다.
하나님의 다른 이름은 <침묵>입니다.
둘째, 침묵의 의미
당장 사람이 죽어갑니다.
아무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 갔습니다.
뭔가 일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일도 아무 기적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아니 더 힘든 상황만 계속 되는 것 같습니다.
차라리 하나님이 약속이나 하지 않았으면 덜 힘들 것 같은데 어릴적 나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왕이 되어 이 나라를 잘 다스리도록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죽음의 고난이 찾아오고 아무 대답도 않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십니까?
나의 잘됨이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착각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이 나에게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지금 나를 통해 보여주려 합니다.
아닙니다.
나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오늘 시편은 다윗을 통해 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통치하는 자로 세움을 받지만 결국 그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대신 보여주는 삶입니다.
우리의 잘됨이 목적이라는 말은 지금 이 순간, 이 땅이 마지막이라는 말입니다.
아닙니다.
다윗은 다윗의 시대가 끝이 아니라 영원이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신을 통해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나라를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약속에 대한 침묵은 믿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자신이 아니라 그를 통해 믿게 될 수 많은 믿음의 자손,
즉 하나님의 백성이 가야 할 길을 보여줍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삶을 살지,
어떻게 이 땅에서 살아야 할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끝이 아닙니다.
요셉의 삶만 잘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신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공통적인 삶은 자신의 삶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온전히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은 자신의 삶을 비유한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줍니다.
셋째,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긴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답답합니다.
당장, 지금,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이 이해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그 사람을 변화 시키지 않고,
교회를 바꾸지 않고,
시대를 바꾸지 않을 때 우리는 나의 시간에 나의 때에 나의 시대에 뭔가 바꾸려는 욕심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 비전이지 하나님의 비전이 아닙니다.
오늘 시편은 주전 1000년에 지어진 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천년 후에 태어나서 이 글을 이룹니다.
내가 지금 꾸는 꿈은,
내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궁극적으로 수십년 수백년이 지난 이루게 될 하나님 나라의 작은 씨앗이 된다는
긴 호흡으로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우리의 잘 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결국 자신의 아들을 죽여서라도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자신의 아들도 십자가에 죽이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나의 잘됨만을 위해 인류의 역사를 이루실까요?
우리는 그분의 거대한 인류구원,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향해 가는
<징검다리>입니다.
내가 완전한 완성이 아니라 궁극적인 그분의 나라의 징검다리 역할만 해도 잘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요셉도, 모세도, 여호수아도, 오늘 시편의 찬양을 드린 다윗도 모두다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나라의 <징검다리들>입니다.
그분의 나라가 흘러가는데 나를 밟고 가도록 우리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야 합니다.
내 삶에 수 없는 고난의 흔적을 안고,
죽음의 광야와 어둠의 터널을 지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나의 징검다리 인생을 통해 지나갈 수만 있다면 그것은 영광입니다.
왜 다윗이 영광입니까?
그를 통해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넷째, 침묵의 시간을 어떻게 견딥니까?
그럼 어떻게 하나님의 이 침묵의 시간을 견딜 수 있습니까?
쉽습니다.
평소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많이 해야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어떻게 죄인의 자리에서 그들과 함께 먹고,
어떻게 고난의 시간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들려오는 사랑의 음성을 들어서입니다.
사랑의 관계에 우리의 헌신은 비례합니다.
침묵이 길 수록 우리는 이 하나님의 사랑의 교제를 많이 해두어야 합니다.
평소의 관계입니다.
평소에 하나님의 사랑에 많이 노출된 사람이 침묵의 시간을 견딥니다.
평소 나눈 하나님과의 관계로 진짜 힘들 때 견디는 것입니다.
침묵할 수 있는 영양분은 평범한 날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 즉 믿음입니다.
넷째, 견디는 능력
침묵의 시간은 지난 날의 사랑으로 견딥니다.
사랑의 깊이가 깊지 못하면 얼마가 될지 모르는 하나님의 침묵을 견디지 못합니다.
다윗은 오직 기름부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었습니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삼상16:13)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되었다는 것은 '짜라흐'입니다.
이것은 '돌진하다'는 뜻이고 '번영하다'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 모든 시간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감동 되어 하나님과 함께 돌진하는 인생,
견디고 나아가는 인생을 살아서입니다.
다윗이 받은 감동의 영!
그것은 바로 요셉에게 임한 영입니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3)
다윗이 처음 기름부음을 받을 때 받았던 감동된 영과,
요셉이 침묵 가운데 고난의 시간을 지날 때 받았던 하나님의 사랑인 형통은 같은 "짜라흐" 입니다.
형통은 잘 되는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함으로 얻는 뚫고 나아가는 힘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 된 것입니다.
어떤 침묵에도 고난에도 돌진하는 마음이 '짜라흐' 즉 형통입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삶을 사는 동안 성령의 영이 함께 하시고 광야로 이끄셨습니다.
사십일을 금식하시는 동안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사용한 것은 돌이 변하여 떡이 되는 기적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침묵에 하나님 나라의 징검다리가 되기 위해 뚫고 나아가는,
전진하고 돌진하는 마음을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의 고난을 겪는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진 영은
침묵 가운데서도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삶을 징검다리 인생으로 드리겠다는
뚫고 나아가는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돌진하는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면 어떤 침묵에도 하나님의 비전에 자신의 비전을 내려놓고
그 하나님의 비전을 향하여 징검다리 인생으로 돌진하게 됩니다.
뚫고 나아가게 됩니다.
나의 시대에,
내 인생 한가운데 내가 원하는 뜻과 내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위해 비록 작은 징검다리가 된다 할지라도
영광스럽게 그 길을 걷고 돌진하는 마음!
그것이 침묵 가운데 우리가 가져야 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이 침묵할 때 가장 위대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가 침묵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꺼이 징검다리 인생으로 자신을 드렸고
하나님이 침묵할 때 광야의 시험은 완성되었고
하나님이 침묵할 때 십자가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지금 당신의 인생에 가장 위대한 일을 완성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영이 감동되어
<짜라흐의 인생>,
침묵 가운데 그 침묵을 묵묵히 안고 그분의 나라를 향하여 돌진하고
어떤 세찬 바람도 뚫고 나아오는 땅속의 새싹과 같은 뛰어오름이
침묵 한가운데서 드러나는 축복의 인생 되기 바랍니다.
* 최선욱선교사님 가정입니다.
레소토선교사로 2년전에 왔습니다. 지금은 이스트런던으로 옮기셨습니다.
이 가정은 첫째 하늘이가 백혈병으로 죽음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긴긴 투병의 시간들을 보내고 하나님의 기적과 같은 은혜로 회복을 했습니다.
병이 진행되는 동안 두 분은 선교사로 나오셨고 레소토 선교사로 2년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작년 의료팀 검사에 사모님 부정맥이 심해 수술을 급하게 해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하고 목숨을 걸고 이곳에 왔는데
아이도 아프고 아내도 아파서 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급하게 한국을 가서 수술도 잘 했습니다.
문제는 이 심장으로 해발 2-3천이나되는 레소토에 선교사로 가는 것은 무리라는 결정이 났습니다.
평생을 준비하고 선교사로 와서 2년을 죽을 고생하며 언어를 배우고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곳에서 사역을 못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질문을 합니다. 고쳐달라고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고 기도하지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그런데 갑자기 이스트런던에 20년을 사역하신 선교사님이 우간다로 사역지를 옮기신다고 그곳
사역지를 맡아 달라고 연락이 오고 그렇게 이분들은 이곳으로 이사를 하고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사용하시기 위해 부르셨는데 아픔과 고난의 침묵의 시간을 지나는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이 감동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형통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이 아니라,
침묵하는 환경을 붙들고 고민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징검다리 인생이 되기 위해 사역의 확장으로 보고 기쁨으로 또 돌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최선교사님은 레소토어를 이미 배웠고 또 옮긴 곳에서 코사어를 또 배우며 사역을 넓게 확장하게 된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과 살았으면 겨우 가족만 살리지만,
보디발의 집에 있으면 겨우 보디발만 살리지만
정치 감옥에 잡혀 있으므로 나라를 살리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짜라흐의 인생이 된다면 어디든 보내십니다.
침묵 가운데 그분의 일은 징검다리 인생이 되어 내가 가는 곳마다 그분의 나라가 세워지는
영광을 주십니다.
그것이 침묵 가운데 우리의 방향입니다.
짜라흐의 인생이 되어 침묵을 이기는 인생 되기 바랍니다.
그분은 살아 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