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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노래 영적인 전쟁> (시편 17편)

<생명의 노래 영적인 전쟁> (시편 17편)

 

 

 

 

 

 

 

 

 

 

<생명의 노래 영적인 전쟁> (시편 17편)

 

성경의 모든 것이 진리로 연결이 되는 것은 그것이 생명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시편이 급박한 상황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그의 생명이 위협받는 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과 관련되지 않아서입니다.

생명에 대한 위협과 죽음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좀더 살고 좀더 높아지고 좀더 좋은 때문에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안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안에 본질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다윗은 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나의 울부짖음과 거짓되지 않는 기도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

 

다윗의 시편은 거의 대부분 급박하게 하나님을 찾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모든 상황들이 생명과 관련된 급박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구한 것은 좀더 살게 달라는 것이 압니다.

다윗이 간구한 것은 좀더 나은 인생을 살게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로 지속되는 !

하나님께서 생명을 지키시는 !

오직 생명을 두고 벌이는 사투입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17:8-9)

 

우리가 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과 완전히 다른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공부를 하게 달라는 ,

좋은 직장, 좋은 형편, 좋은 삶의 질을 구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아닙니다.

평생 생명의 위협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생명은 그저 목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의인과 악인의 길을 구분하는 생명의 길을 의미합니다.

 

평생 구한 ,

평생 간구한 것은 영원한 생명의 길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인생의 사투 가운데서

주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본질을 찾지 못합니까?

우리가 의미없고 허망하고 돌아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붙들고 살아갑니까?

 

<생명의 문제>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생존의 문제가 아니니 죄가 파고 들어옵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한치 앞을 없는 전쟁의 상황이나

죽음을 놓아야 하는 핍박의 상황이라면 우리의 기도가 오늘 아침 들렸던 기도와 같을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을 주시기 위해

평생 생명의 위협 안에서 살게 하시는 광야를 걷게 하십니다.

그것이 다윗의 일생이고 다윗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지키기 위해 지킨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입을 지켰습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17:3)

 

다윗이 생명의 위협 가운데 나의 의의 호소를 들으시고 나의 울부짖음을 들으라고

서론도 없이 기도한 근거는 자신의 <입술을 지키는 >입니다.

 

기도에도 그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의의 호소를 들으소서 나의 울부짖음에 주의하소서

거짓되지 아니한 <입술>에서 나오는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소서"(17;1)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방법은 입술을 지키는 것입니다.

기도를 응답하는 근거도 자신의 거짓되지 않는 입술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시고 내게 흠을 찾지 못하는 것은 어떤 죄나 흠이 아니라

오직 입술을 지켜 범죄치 않는 것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17:3)

 

생명의 위협이 찾아올 다윗이 자신을 지킨 방법은 입술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간구하는 것들이 좀더 나은 형편, 좀더 나은 인생이라는 다윗에 비해 사치스러운 것을

간구하면서도 우리의 입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죽음의 위협의 삶을 평생 살면서 그는 결단코 자신의 입술을 지킵니다.

그것이 다윗이 평생 하나님 앞에 거룩을 유지한 비결입니다.

생명을 지킨 비결입니다.

거룩한 기도를 드리는 힘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시험하고 밤에 찾아와 감찰하셨지만 흠을 찾지 못한 시험의 내용은

입으로 행하는 범죄입니다.

말씀은 세상을 지탱하는 생명입니다.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키는 것은 나의 <입술>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141편에서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간구합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141:3]

 

입술은 다윗에게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것을 있습니다.

 

둘째, 걸음을 지켰습니다.

 

"나의 걸음이 주의 길을 굳게 지키고

실족하지 아니하였나이다"(17:5)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다윗은 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과 다른 원수들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방법과 같은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방법을 따릅니다.

 

"사람의 행사로 논하면 나는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스스로 삼가서 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아니하였사오며"(17:4)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입술을 따라 것이 아니라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길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을 하고

우리가 말한 대로 우리의 길을 걷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주의 길을 걷습니다.

그것이 생명입니다.

 

한번만 자신의 입술을 벌리고 자신이 말한 대로 그들을 처단하면 됩니다.

처단할 힘도 있고 기회도 있고 능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죽을 고생을 합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길을 가는 것은 주의 입술의 말씀이 기준이라는 것을 압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은 입술의 말과 길이 아니라

주의 입술의 말씀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일하시도록,

주께서 심판하시도록 주님께 없이 간구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시편은 없이 많습니다.

왜요?

자신이 하고 싶은 말과 자신이 처리하고 싶은 심판을 대신해

주께서 속히 이루어 달라고 간구하는 마음이 강해서입니다.

한마디로 힘들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위협으로 산다는 ,

생명의 위태로움이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킨 것은 세상의 방법이 아닙니다.

세상이 죽이려 하면 나도 죽이고

세상이 편법을 쓰면 나도 편법을 쓰고

세상이 나를 조롱하고 욕하면 나도 조롱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입술의 말씀대로 묵묵히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는 !

그것이 다윗의 걸음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지켜 달라고 간구하는 근거를

말씀에 의지해 걸어 왔던,

스스로 심판하지 않았던 자신의 걸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가 걸음이 무엇입니까?

그냥 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응답하시겠으므로 내가 불렀사오니

내게 귀를 기울여 내 말을 들으소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17:6-9)

 

그가 주의 입술에 근거해서 걸어 왔던 걸음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냥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주께 숨는 것입니다.

그들을 대적하고 욕하고 같이 죽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께 피해와서 가슴속의 마음을 쏟아 놓는 것이 전부입니다.

 

내가 말로 어떻게 하려 하지 마십시오.

내가 작전을 짜고 내가 계획을 세워서 생명을 위협하는 자들을 심판하려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주의 길을 걷는 자의 삶입니다.

 

셋째, 주의 얼굴을 지켰습니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15)

 

우리가 우리를 죽이려는 세상에 우리의 칼로 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우리를 존경하지 않고 죽이려 합니다.

 

"이제 우리가 걸어가는 것을 그들이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나이다

그는 그 움킨 것을 찢으려 하는 사자 같으며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으니이다"(17:11-12)

 

주의 입술의 말씀을 따라 걸으면 더욱 에워싸서 노려보고

땅에 넘어뜨리려 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를 잡아 사자 같이 찢으려 하는 젊은 사자 같이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가진 것으로 더욱 부하게 되고

부로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그들의 자녀들은 그들이 유산으로 더욱 편하게 산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17:14)

 

한마디로 의인은 생명의 위협으로 죽을 고생을 하고

악인들은 잘먹고 살고 그들의 자식들도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17:5)

 

그냥 주의 얼굴을 본다는 것입니다.

어제 그런 일을 겪고 죽음의 공포와 세상의 불의한 방법과 저항으로 고통 중에 잠을 잤는데

오늘 아침에 눈을 뜨는데 변함없는 환경과 나의 처지지만

그냥 나는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좀더 살고 좀더 나은 인생을 구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입술을 지키고 걸음을 지킨 인생인데

하나님께 그렇게 자신을 힘들게 하는 자들에게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며

그저 내가 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의 얼굴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윗이 만족하는 한가지는

내가 주의 형상으로 생명을 얻는 삶과 영원으로 만족한다는 것입니다.

 

때는 부활 때를 의미하기도합니다.

우리의 마지막 만족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고 하나님의 영원의 형상으로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안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하나님의 성품이 있고

그분의 얼굴을 구하는 자체로 만족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것을 얻기 위해 성경의 많은 구절을 나에게 적용합니다.

제발 부탁합니다.

좀더 나은 , 좀더 편한 , 좀더 뜻이 이루는 것을 위해

성경의 것들을 가져다 붙이지 말기 바랍니다.

 

다윗은 오직 생명입니다.

생명의 위협의 가운데 영원한 생명을 지키기 위해

주의 얼굴을 구하는 단순한 믿음으로 살았고

오직 내가 만족하는 것은 세상적으로 좀더 사는 세상의 것이 아니라

그냥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활하고 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이

유일한 만족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족하고 있습니까?

그럼 이상 헛된 것을 구하지 않기 바랍니다.

 

저는 평생 하나님 돈을 조금만 주세요,

하나님 이것을 주세요

하나님 형편이 나아지고 하나님 좀더 좋은 것을 주세요라고 기도한적이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

그리고 나에게 붙여주신 영혼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합니까?

생명의 위협을 당하지 않아서입니다.

생존의 문제가 걸리면 우리의 기도는 단순해 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구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는 많이 가지려 합니다.

우리는 높이 많이 얻으려 합니다.

생명의 문제가 아니면 우리는 이렇게 헛된 것을 구하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구하는 것들의 본질을 있기 바랍니다.

생명을 구하지 않으니 생명의 간구를 하게 만드십니다.

환경이 어려울수록 감사하며

찬양하는 인생이 우리입니다.

생명의 본질,

인생의 본질인

<하나님의 얼굴> <하나님의 형상> 구하는 인생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생명인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 인생의 간구의 본질이 되기 바랍니다.

생명을 두고 구하는 기도는 찬양이 됩니다.

우리의 땅의 모든 것은

생명을 두고 벌이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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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롱콥교회 아이들입니다.

먹을 것이 없는 아이들입니다.

구역방문 잔치 음식 앞에 초라하게 먹는 인생들입니다.

전기도 물도 없는 곳에서 겨우 먹고 사는 아이들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은 생명입니다.

교회는 생존의 문제입니다.

그들의 찬양이 뜨겁고 하나님은 유일한 분입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살을 빼기 위해 먹지 않는 시대를 사는 한국교회,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좋은 것을 위해 사는 곳에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기도도

하나님의 형상을 간구하는 간절함도 없습니다.

 

자신을 쳐서 자발적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으면

우리는 내가 받은 산업과

자녀에게 물려줄 재산에 행복해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유일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과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