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 2- <공의> (시편 15편)
죄 지은 아담이 죽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사라지면 사람은 죽음이 찾아옵니다.
죽음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죽음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말하며"(15:2)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가 누군가에 대한 두 번째로 공의,
즉 공평입니다.
즉 공평한 자가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거하게 됩니다.
'공의'라는 말은 '쩨데크'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때 하는 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공의로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공의는 소돔이 멸망할 때 공의로 심판하심을 아브라함이 이르는 말입니다.
재판 할 때 불의를 행하지 말고 공의를 행하라고 합니다.
공의로 재판하는 것은 생명까지 연결을 하고 계십니다.
"너는 마땅히 공의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네가 살겠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을 차지하리라"(신16:20)
공의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와 땅을 차지하는 문제까지 깊이 연결된 아주 중요한 단어이며
주와 함께 거하는 자의 중요한 성품입니다.
성경은 공의에 대한 수 많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항목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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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의(공의)가 무엇입니까?
동일한 기준입니다.
죄에 대한 기준이 아담에게나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나 같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동일한 기준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스캔달이라고 말하며 다른 적용을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동일한 판결과 비판에 자신에게는 관대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적용을 한다는 심각한 문제를 가집니다.
이것은 내 생명과 땅 즉 하나님 나라를 살지 못살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공의의 문제를 우리의 생명의 문제와 연결해서 늘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평가하는 기준이 있다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는 기준은 정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은 정직과 함께 공의입니다.
우리가 공의로우냐 그렇지 않느냐로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까지 연결을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평가할 때 무엇으로 평가를 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실과 공의와 정직입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왕상3:6]
아들이 아버지를 평가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직과 함께 공의입니다.
기준이 어떤 사람에게나 같다는 것입니다.
공의의 뜻은 치우치지 않고 공평하다는 것입니다.
공평한 적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볼 때 우리 아버지는 늘 한결같은 기준으로 대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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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왜 이것이 중요한가 하면 그 적용의 대상에 <자신>도 넣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다른 사람에게 기준대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것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은 공의가 아닙니다.
공의는 자신에게도 적용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죄에 대하여 아담에게 인간에게 죄의 대가를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죄에 대하여 자신의 아들에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적용을 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죽음의 대가를 적용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욥 입니다.
왜 욥이 의인입니까?
그가 공의를 행해서 입니다.
욥이 무슨 공의를 행했습니까?
하나님이 욥을 향한 축복과 사랑을 동일하게 자신을 질책하고 책망하고
말도 되지 않는 말로 자신을 향해 저주와 욕을 쏟아 부은 친구를 위하여 축복을 빌어주는 것입니다.
자격 없는 자신에게 주셨던 하나님의 축복을 친구들에게 동일하게 흘러 보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의이고 그 공의를 행하는 자가 주의 장막, 주의 성산에 거하는 것입니다.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욥42:10)
욥기는 하나님의 공의를 보여주는 중요한 성경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잘못을 지적하시고 번제를 드리고 욥에게 나아가면
욥은 너희를 위해 기도할 것이라는 것이 욥과 친구들의 논쟁의 결론으로 삼습니다.
자신을 위하시는 하나님처럼
욥은 자신에게 잘못한 친구들을 위해, 번제를 드린 친구들을 위해
기도할 때 주께서 욥의 모든 곤경을 돌이키시는 것이 결론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욥은 자신을 용납하신 하나님의 공의대로
자신에게 잘못한 친구들을 자신에게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 동일하게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으로 인정받고 모든 곤경을 돌이키시는 하나님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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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적용을 하는 것이 공의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의에 대한 동일한 말씀을 하십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자를 <용서> 하는 내용입니다.
일만을 탕감 받은 자를 용서받은 자가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내용입니다.
공의입니다.
내가 받은 <기준>으로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내가 누린 하나님의 시각으로 동일하게 바라보는 시각 그것이 공의입니다.
하나님이 내린 결정으로 나와 동일하게 어떤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그래서 공의는 재판의 용어이고 심판의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공의입니다.
공평한 치우치지 않는 올바르고 공정한 기준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용서와 축복을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으로 여깁니다.
왜 이단이 문제입니까?
자신들이 받은 또 받을 축복을 자신들에게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들만 누리는 구원, 자신들만 얻는 축복을 강조합니다.
공의가 빠진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동일하게 자신이 받은 용서와 축복과 사랑에 대해
다른 사람은 다르게 적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살고 내가 주는 땅을 차지 한다고 하십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대로 다른 사람도 적용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이 피곤하고 힘든 것은 아는데 다른 사람이 피곤하고 힘든 것은 알지 못합니까?
왜 나에게는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을 적용하지 않습니까?
자신이 아픈 것은 적용하고 자신이 받을 축복은 적용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왜 그것을 적용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잡는 것이 공의입니다.
아담이 왜 문제입니까?
누림을 자신만 적용해서입니다.
혜택을 자신만 누려서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공의를 적용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택된 이스라엘에서 이방으로 구원의 범위를 넓히고
종에서 백성으로 백성에서 친구로 친구에서 아들로 우리의 지위를 동일하게 만드셨습니다.
누구나 동일한 적용으로 사랑하시고 심판하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그분의 공의입니다.
누가 주의 성산에 거합니까?
동일한 기준으로 대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책망한 것이 무엇일까요?
다른 적용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게 적용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하는 적용과 다른 사람에게 말씀을 적용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공의가 없음으로 너희가 드리는 모든 물질과 예배와 십일조가 문제라고 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눅11:42]
우리는 더 많이 벌어서 더 많이 드리는 것에 집중하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동일하게 적용하는 기준입니다.
나에게 적용하는 것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하는 것이 같아야 합니다.
그것이 공의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미가의 말씀입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는 것은 어떤 위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위대한 역사를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죄의 대가를 주듯이
하나님의 아들 자신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
그것이 공의입니다. 의입니다. 그것을 적용하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무슨 놀라운 역사를 위해 살지 마십시오.
그냥 평범한 일상에 나에게 적용하던 그 말씀의 적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십시오.
내가 받은 용서와 사랑과 축복을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십시오.
그것이 공의 입니다.
이 공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구원을 말하고
이 공평한 적용과 기준과 시각을 지키지 않으면서 행하는 모든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이 어디 있습니까?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왕이 되지 못한 십 수년 동안
왕이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단 한번도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자리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무엇입니까?
정의가 펼쳐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뤄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가련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 대한 탄식입니다.
거짓 혀와 두 마음과 아첨하는 혀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왕이 되지 못한 비전을 가장한 욕망이 아니라
떠도는 자신의 인생,
버림 받은 것처럼 도망 다니는 자신의 인생을
오늘도 살려두시는 생명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적용을 가난하고 눈물 흘리고 아파하는 그들과 같이 적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적용한 하나님의 축복과 일하심을 힘 없고 연약한 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고
나아가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에게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것!
그것이 의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공의> 입니다.
- 하나님의 위대함, 예외 없는 적용
하나님의 위대함은 아담에게 적용한 죄의 대가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적용하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하라고 하십니다.
내가 누린 용서와 축복과 은혜를 동일하게 다른 사람에게도 적용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공의의 삶이며 의인의 삶입니다.
십일조와 수 많은 박하와 운향과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생활을 하지만
정작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를 행하지 않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적용이 다른 공의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그것은 가르치십니다.
다른 누군가를 그렇게 하셨다면 나에게도 그렇게 하시고
나에게 그렇게 하셨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렇게 적용하며 살라고 하십니다.
동일한 기준으로 동일한 시각으로 동일하게 적용하며 사는 삶!
그것이 공의입니다.
십일조를 더 드리고 더 거룩하게 사는 삶보다 같은 기준으로 다른 이를 대하는 욥의 기도를
하나님은 의인의 삶으로 인정하십니다.
욥은 자신이 받은 사랑과 축복의 기준으로 용서할 수 없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축복과 오래 참으심으로 사울을 기다리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인내합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공의가 있기에
우리도 동일하게 내가 아는 자들에게 그 공의를 적용할 때 하나님의 공의가
하나님의 정의가 강 같이 흘러 갈 것입니다.
* 은빈이가 그럽니다.
"아빠! 훈련 받는 다른 샘이나 언니나 오빠들에게 하듯이
나에게도 그렇게 대해주세요~"
아내가 그럽니다.
"여보! 나 당신 성도할래요!"
아내도 은빈이도 나의 관심을 많이 받고 싶은가 봅니다.
나의 성도가 되고 싶은가 봅니다.
공의가 가정에서부터 흘러가야 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