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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 1- <정직>> (시편 15편)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 1- <정직>> (시편 15편)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Ⅰ- <정직>> (시편 15편)

 

죄가 관영하며 악이 세상을 채울 우리의 고민은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느냐입니다.

누가 의인이고 누가 바른 사람이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것이냐는 고민입니다.

 

다윗의 시대에 그가 고민한 것은 어떤 사람이 주의 장막에 머무르고

누가 주의 성산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이런 고민은 후대에 '성전에 들어가는 기도문'(Entrance liturgy) 되어

성전에 들어갈 기도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다윗의 고민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거하는 , 하나님의 성산과 장막에 거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기 바라는 간절함으로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질책과 책망이 아니라

주의 장막에 거하는 자의 삶의 모습을 그리면서 스스로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찬양입니다.

 

자칫 주의 성전에 거하는 자의 조건으로 읽을 있습니다.

처음 읽으면서 드는 생각은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이런 삶을 살아야겠구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스스로 이런 삶을 삶으로 하나님의 성막에 거하는

거룩한 삶을 꿈꾸는 기도와 찬양입니다.

 

어떤 자가 주의 성장과 장막에 거합니까?

 

첫째, 정직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는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정직>하게 행하며"(15:1)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직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5]

 

많은 역대 왕들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의 기준은 오직 하나입니다.

정직입니다.

 

"아마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그 조상 다윗과는 같지

아니하였으며 그 부친 요아스의 행한 대로 다 행하였어도"[왕하14:3]

 

가나안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요구한 유일한 한가지는

정직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하고 선량한 일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여호와께서 네 열조에게 맹세하사

네 대적을 몰수히 네 앞에서 쫓아내리라 하신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서 얻으리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으리라"[신6:18]

 

동방의 의인 욥에 대한 평가도 오직 한가지 입니다.

정직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많은 시편을 기록한 다윗의 관점은 하나님의 구원은 정직한 자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시7:10]

 

정직한 자만이 하나님을 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 얼굴을 뵈오리로다"[시11:7]

 

다윗도 하나님도 역대 왕들도 평가의 기준과 가장 번째 항목은

<정직>입니다.

 

다윗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용서의 길을 허락하신 것은

그가 책망을 듣고 핑계하지 않고 정직히 그것을 받아 들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지만

정직히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언제든지 주의 성산에 거하는 축복을 다시 허락하십니다.

 

오늘 시편의 마지막 구절의 결론은 이런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15:5)

 

흔들리지 않는 인생은 정직한 인생입니다.

비록 약해서 죄를 짓지만 죄의 책망 앞에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며 나아가는

정직한 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봅니다.

 

<정직>하십니까?

마음과 겉이 하나입니까?

마음과 생각이 행동과 하나가 되고

말씀이 가는 길과 사는 길이 같으며

말과 마음이 하나되는 길이 정직입니다.

 

다윗이 주의 장막에 거하는 ,

주의 성산에 거하는 자의 번째 조건으로 정직을 말합니다.

 

정직이 무엇입니까?

정직은 말씀이 가는 방향과 같은 길을 걷는 것이 정직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정직을 행하면 이같이 되리라"[신13:18]

 

정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직은 하나님의 말씀의 방향과 같은 것이 정직입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거짓말은 진실에 관한 부분으로 2 후반부에 다시 언급을 합니다.

 

정직의 뜻은 완전하게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은 칠십 세에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 약속하고

구십 구세에 나타나서는 하시는 말씀입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17:1)

 

아브라함에게 '완전 하라'라고 하신 단어와

다윗이 말한 '정직' 같은 단어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직은 거짓을 말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주어질 말씀대로 완전하게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17 1 이후에 나오는 것은 언약에 대한 말씀입니다.

언약을 완전히 이행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완전히 따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질 말씀을 완전히 순종하는 것이 정직이라는 것입니다.

, 말씀을 지키는데 없이 행하라는 것이지 거짓말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가 주의 성산, 주의 장막에 거합니까?

주의 말씀을 완전히 따르는 자입니다.

 

역대 왕들의 이름이 나오면 반드시 평가하는 기준은 정직

하나님의 말씀을 없이 지켰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직의 기준이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을 준비할 하나님이 복과 저주의 기준을

정직으로 두셔서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를 정직이냐 아니냐로 두셨고

모든 왕과 백성의 대한 평가는 오직

<정직>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방행과 같은 것이 정직이고

정직의 의미는 흠이 있느냐 없느냐

완전 하게 사느냐 못사느냐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자만이 정직하게 살아갑니다.

날마다 말씀의 방향과 성령이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날 그날 만나를 먹듯이

매일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주의 거룩한 성장, 주의 장막에 거하느냐 거하지 못하느냐를 결정 짓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말씀과 상관없는 삶을 사는 인생이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도 하고 헌금도 드리고

성경공부도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마음에서 주시는 성령의 말씀과 방향이 다른 방향으로 간다면

우리는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는데라는 것으로 위안을 삼지 않기 바랍니다.

평생 거짓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말씀이신 그리스도의 방향과 길이 다르면 천국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정직하십니까?

완전하십니까?

흠이 없으십니까?

 

종교 생활을 그만 두기 바랍니다.

우리는 종교가 아니라 생명을 따르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직하라 없이 완전 하라고 하십니까?

그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기적과 능력과 예수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도 내가 너를 모른다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불법입니다.

법을 따르지 않아서 입니다.

법을 따르지 않음이 정직하지 않은 것입니다.

 

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법은 말씀의 기준으로 날마다 살아내는 삶이고

말씀이 가는 방향과 내가 같을 만이 내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다윗의 방향,

다윗이 엄청난 죄를 짓고도

많은 도망과 눈물과 아픔 속에서 스스로 위로를 삼고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살았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압니다.

죄를 지어도 말씀이 찾아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돌이키는

정직입니다.

말씀에 반응하는 인격적인 돌이킴과 회개와

자신이 말씀보다 앞서지 않는 거룩입니다.

 

자신이 사울을 심판하지 않고 말씀이 원하는 부분까지만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날마다의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말씀을 따르는 정직이 있어서입니다.

 

우리는 말씀의 방향과 같은 죽음을 내어놓는 위협에도 정직하려는 것은 고사하고라도

겨우 겨우 어떤 것을 이루려고 정직하지 않는 모습은 아닙니까?

 

말씀과 상관 없는 인생,

거짓입니다.

말씀이 주어지고 그것을 지키려 목숨 거는 인생!

그것이 정직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신 거짓 선지자들의 이유는

정직하지 않은

말씀의 방향과 다른 열심과 뜨거움과 노력과 흘림입니다.

 

말씀과 상관없는 것들에 인생을 걸지 말기 바랍니다.

말씀이 원하는 것에 없는 인생 되기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을 받아 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이 없으니 목숨 일은 나를 위한 밖에 없습니다.

 

다윗은 이런 자들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없어도 있는 조건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까?

그것이 말씀과 상관 없는 인생입니다.

정직하지 않은 인생입니다.

 

주의 성산에 거하며,

주의 장막에 거하는 인생!

말씀의 방향과 같은 인생입니다.

 

역대 왕들에게 했던 정직에 대한 평가,

다윗 스스로 자신에게 목숨을 걸고 지켰던 정직에 대한 평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 위한 유일한 조건으로서의 평가,

의인 욥에 대한 유일한 평가로서의 정직!

 

정직에 대한 평가로 하나님은 오늘 나에게 평가하십니다.

날마다 말씀에 반응하여 흠이 없고

완전하며 말씀의 방향과 같은 삶을 살고 계십니까?

 

"000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 하였더라"

 

이것이 나를 평가하는 하나님의 유일한 평가 줄입니다 .

 

당신은 정직하십니까?

하나님은 오늘 질문을 당신에게 하고 계십니다.

 

 

 * 얼마나 일을 이루었느냐?

얼마나 위대한 삶을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오직 말씀에 반응하는 인생인가가 우리의 평가 기준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입에서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손목에 매고 미간에 새기고

들어가며 나가며 말씀을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말씀이 마음에 없으면 길을 잃은 인생입니다.

말씀과 상관 없는 열심…

평가에 없는 삶입니다.

말씀이 떠나지 않는 인생,

말씀과 방향이 같은 인생이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