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의 반대 말은 기쁨입니다> (시편 14편)
사람이 부패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사람의 행실이 악한 이유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아서입니다.
선을 행하지 않는 이유도 하나님 없이 살아서입니다.
그 모든 것을 한마디로 <어리석은 자> 라고 정의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생각하고 사는 자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하나님 없음에 대한 결과가 부패하며 행실이 가증하고 선을 행하지 않음입니다.
그런데 오늘 '어리석은 자'라고 쓴 단어의 원어는 <나발>입니다.
나발의 뜻은 '어리석은' 인데 다윗을 저주한 자, 다윗과 결혼하게 된 여인인 아비가일의
원래 남편의 이름이 나발입니다.
말 그대도 어리석은 자입니다.
그런데 오늘 생각할 것은 어리석은 자,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의 삶을 산 나발의 삶을 살펴보려 합니다.
첫째, 나발은 갈렙 족속입니다.
즉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사는 족속입니다.
나발은 사울 왕과 같은 족속입니다.
힘과 권세를 가진 족속이요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양이 삼천이고 염소가 천 마리입니다.
한마디로 부자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와 권력과 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왕과 인맥이 있고 자신의 말 한마디로 사람들이 머리를 숙이는 자리에 있습니다.
즉, 나발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은덕으로 부와 축복을 누리는 자리에 있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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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하나님을 없다고 말하는 인생은 <은혜의 울타리>를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예배도하고 하나님도 알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만드신 눈에 보이지 않는 은혜의 울타리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늘 나발의 사건은 다윗이 쫓겨 다니면서 갈멜에 머물 때 다윗의 소년들이
나발의 양떼들과 목장을 지켜주는 일을 했고
그 동안 다윗이 그 지역에 있으면서 나발의 모든 농장에 아무 일이 없도록 울타리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네게 양 털 깎는 자들이 있다 함을 이제 내가 들었노라 네 목자들이 우리와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삼상25:7)
다윗이 나발의 목장에 있으면서 그 목장을 지키고 돌봐주는 은혜를 베풀어 주었기에
먹을 것이 떨어진 다윗이 나발에게 도움을 준 대가로 뭔가 필요를 채워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안면을 바꿉니다.
다윗 때문에 목장의 일들이 잘 풀리고 가축과 사업이 번성했는데 찾아온 소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삼상25:10-11)
다윗을 통해 외부의 침입에 도움을 받고 다윗이 육 백 명의 군사를 통해 그 목장을 지킨 것을 알면서도
나발은 그 은혜를 무시합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도 무시하고 다윗의 아버지 이새도 무시합니다.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한마디를 더 합니다.
떡과 물과 고기는 다 <내 것> 이라고 말합니다.
즉 내 가진 모든 것은 <내 것> 이라고 말하고 가난하고
배고픈 자들을 외면하는 것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오늘 시편에서 자신의 처지를 가난한 자라고 하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려는
계획을 부끄럽게 하시는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나발의 문제는 자신의 것이 자신의 능력으로 된 것이라고 여기고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무시하고 모욕하며
내 것을 왜 그들에게 나눠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돌보지 않는 자라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것이 자신의 것이고
자신의 것이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통해 세운 은혜의 울타리를 통해 얻은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은혜의 울타리 안에서 편히 살고 누리고 혜택을 받으면서
그 사람이 나에게 뭔가 조금의 손해를 끼치고
내가 불편해지는 상황이 되면 우리는 그 은혜의 울타리를 처참하게 모욕하고
비판하고 지적하고 화를 내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성경은 그런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기억 해야 합니다.
나발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뿐 아니라 왕을 배출한 갈렙 족속 입니다.
인맥도 좋고 하나님의 은혜의 울타리 안에서 다른 사람이 누리지 못하는 수 많은 혜택과
축복으로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없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누군가를 통해 은혜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뭔가 나에게 더 많이 헌신을 요구하고
더 많은 섬김과 나눔을 원할 때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내 인생이 더 급하고 내가 내 양털 깎는 자들을 위해 잡은 내 인생의 문제에 간섭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외면하는 것이 곧 하나님 없이 사는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 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때문에 복을 받지 않았음이 아닙니다.
헌금도 하고 기도도 하고 성경도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내 삶의 은혜의 울타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은혜의 울타리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를 나 되게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것이 가정이기도 하고
그것이 교회이기도 합니다.
그 모든 은혜의 울타리의 혜택을 받고 살았으면서도 막상 그 은혜의 울타리가
힘들 때 어려울 때 돌보지 않고 지키지 않고
아니 돌아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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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그래서 그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은 <선>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1)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14:3)
선이 무엇입니까?
나와 상관 없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은혜의 울타리가 되어준 사람들,
내가 나 되게, 나의 울타리가 되어준 하나님의 사람들을 끝까지 돌보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입니다.
왜 우리가 선을 행하지 못합니까?
지금 내가 가진 힘에 집중해서입니다.
지금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마음을 쓰고 지금 내가 편한 쪽으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나발은 같은 갈렙 족속의 사울 왕으로부터 누리는 혜택을 놓치기 싫었습니다.
나발은 내가 가진 것을 내 것이라 여겨서 내 것이 사라지고 소비되는 것이 싫었습니다.
내가 왜 힘 없는 자들의 편이 되고
내가 왜 가난한 자들을 돌봐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어리석은 자이고 그것이 하나님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삶입니다.
예배하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헌금 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 아닙니다.
은혜의 울타리를 무시하고 선을 베풀어야 할 때 베풀지 않는 인생이
하나님이 없다라고 여기는 인생입니다.
은혜의 울타리를 무시하지 않기 바랍니다.
적어도 은혜의 울타리를 도와주지 못하더라도
은혜의 울타리가 힘들 때 외면하고 무시하고 비판하지 않아야 합니다.
적어도 부끄럽게 하지는 않아야 합니다.
"너희가 가난한 자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의 피난처가 되시도다"(14:6)
다윗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이상하게 결론을 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 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 야곱이 즐거워 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오기를 원하도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포로된 곳에서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즐거워하고 이스라엘이 기뻐하리로다"(14:7)
왜 야곱입니까?
요셉입니다.
요셉이 요셉 된 것은 야곱이라는 은혜의 울타리가 있어서입니다.
왜 하나님이 요셉을 택했는지 왜 요셉같이 철없는 자를 선택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야곱은 약고 교활한 인생을 살아서 살아온 인생이 험악 하다고 스스로 고백하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은혜의 울타리의 인생을 통해 요셉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요셉이 가진 것은 꿈인데 그 꿈이 온 것은 자신의 꿈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서 입니다.
하나님이 요셉에게 꿈을 주신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야곱이라는 은혜의 울타리가 요셉에게 있어서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회복할 때 야곱이 기뻐한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잘 되고 회복될 때 우리에게 은혜의 울타리가 된 자들이 기뻐합니다.
그들이 비록 약하고 실수하고 부족해도 그들이 진정으로 우리의 잘됨을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은혜의 울타리를 인정하고 의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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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나발의 반대는 아비가일입니다.
나발이라는 어리석음의 반대는 기쁨입니다.
나발의 뜻은 어리석음이고 아비가일의 뜻은 <기쁨의 아버지>입니다.
어리석음의 정의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인생이고
의인의 인생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입니다.
나발의 어리석은 삶을 아비가일이 지혜로 위기를 모면합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은 은혜의 울타리를 인정하는 인생입니다.
고난도 인정하고
약함도 인정하고
눈물도 인정하는 인생은
결국 자신의 가족과 친족과 민족을 살리게 됩니다.
요셉은 용서의 삶,
자신을 자신되게 한 가족들, 아버지 야곱을 인정하고
그렇게 만든 그들보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이 되어서
위대한 의인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비가일 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이 복을 얻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기뻐하는 인생이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모든 상황에 하나님을 기뻐하십시오.
그 말은 나의 은혜의 울타리를 섬기고 대접하십시오.
그들의 기쁨이 되고 그들의 약함을 내가 채우십시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내가 하나님이 되어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하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은 모든 상황을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인생입니다.
기쁨의 인생은 용서하는 인생,
나를 버리고 죽이려는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인생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다시 안아줍니다.
사울의 땅과 자신의 식탁에서 음식을 먹는 은총을 베풀어 줍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인생은 선을 행하지 않는 인생이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의인의 삶은 <안아주는 인생>입니다.
나발이 하나님이 없는 인생으로 죽음의 위기가 찾아 올 때
아비가일은 기쁨으로 다윗을 맞습니다.
가난하고 없이 도망가는 다윗을 자신의 은혜의 울타리로 여기고 기뻐 받습니다.
그 기쁨을 사람도 하나님도 기뻐하십니다.
결국 아비가일은 그 기쁨으로 다윗의 아내가 됩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어리석은 나발의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는 인생,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우는 기쁨의 인생 되기를 바랍니다.
은혜의 울타리를 인정하지 않는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라
그들을 기뻐하고 섬기는 기쁨의 인생 되기 바랍니다.
* 워터발(Watervaal)교회와 카밀리버(Kameelriver)교회를 맡고 있는 데이빗전도사입니다.
참 열심히 하는 전도사입니다.
그런데 이 전도사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학교에서도 교수들과 문제가 있고 저에게도 약점을 보이곤 합니다.
그러나 내 칠 수 없습니다.
안고 가야 합니다.
약해도 세워야 하고 부족해도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약하고 부족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가진 장점들이 많기에 약점 한 두 가지로 사람을 업신여겨서는 안됩니다.
그의 약함과 부족을 알기에 더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없던 돈을 만들어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달 월급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지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 여깁니다.
못해서 내 치는 것이 아니라 못하니 더 지원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 인내의 시간을 잘 보내고
교회 건축도 다 마무리가 되고 새로운 곳에 교회개척을 잘 하는 귀한 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들도 나와 같이 여기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용서하고 받으신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도 받고 이해하고 세워가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 인내가 수 많은 기쁨의 열매를 맺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이고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