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은 것처럼 숨은 것 처럼 > (시편 13편)
기도의 자양분은 고난입니다.
천국의 문은 심령의 가난함입니다.
기쁨의 원천은 눈물이고
아픔의 이유가 평안의 노래가 됩니다.
다윗의 기도의 스승은 나단도 사무엘도 그의 어머니도 아닙니다.
그의 기도의 스승은 <고난>입니다.
그가 왕이어서 하나님을 수 없이 찬양한 시편의 저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끊어진듯한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열정이 되고
죽음의 문턱까지 찾아온 두려움과 슬픔과 외로움과 서러움이 그가 부른 찬양의 곡조가 됩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찾아오는 수 많은 문제로 사망에 잠잘까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첫째, 영적인 문제입니다.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13:1)
힘들고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다른 것이 힘든 것이 아닙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를 영원히 잊은 것은 아닌지
하나님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긴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생깁니다.
다윗의 찬양은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지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는 것은 아닌지 그것이 너무 두려워 그 말부터 꺼내어 들고 있습니다 .
다윗은 살수록 드는 생각은 언제까지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지
언제까지 나에게서 숨으시는지 그것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왜요?
그만큼 모든 상황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깊은 눈물과 깊은 한숨과 한 순간이라도 방심할 수 없는 고단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윗은 <어느 때까지>라는 끝을 알 수 없는 터널에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둘째, 개인적인 감정의 문제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13:2)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 같고 하나님의 얼굴을 나에게 숨기는 것 같은 상태가 되면
반드시 같이 찾아오는 것은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내 영혼이 <번민>하고 마음이 <근심>합니다.
내 인생에 문제가 생길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나를 잊으시고
나를 외면하시는 것 아닌가 하는 것에서 기인하는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두려움이 엄습하고 번민이 찾아오게 됩니다.
환경이 문제가 생기고 원수가 나를 늘 죽이려고 하며 올무에 걸리게 하는 삶을 끊임없이 산다면
찾아오는 것은 두려움과 근심입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하면 사망의 잠을 잘까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13:3)
결국 환경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신앙의 문제로 돌아가고
그 문제는 감정적인 문제로 찾아옵니다.
결국은 <두려움>입니다.
두렵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고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는 것 같은
신앙의 문제로부터 찾아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에 피하여 숨은 것은 내가 두려워하였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셋째, 환경적인 문제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13:4)
2절과 3절에서 그의 두려움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왜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처럼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숨기시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말합니까?
내 원수들입니다.
나의 원수들입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려는 세월이 너무 길고
내 삶이 그들로 인해 사망에서 잠을 잘 것 같은 상황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너무 긴 두려움과 공포와 외로움을 주는 원수가 늘 나의 주변을 맴돌며 치려 하는 환경입니다.
이런 환경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신앙을 가지고
두려움의 감정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는 환경적 부담으로부터 찾아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환경,
나를 위협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환경으로부터 찾아오는 문제들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을 기도해야 합니까?
이런 이중적 삼중적 힘듦이 찾아올 때 우리 인생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첫째, 눈을 여는 것입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13:3)
문제가 생길 때 우리는 답을 나에게서 찾으려합니다.
아닙니다. 거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소망도 답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저런 문제 앞에 스스로 해결을 하려고 이 사람도 찾고 저 사람도 찾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답은 하나님께서 나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사'의 원어는 나를 <바라보다>입니다.
얼굴을 돌려 나를 바라봐 달라는 것입니다.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다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지옥과 같은 순간입니다.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눈을 밝혀서 어두워진 내 눈,
영적인 무감각과 개인적인 감정에 몰입되어
그리고 환경적인 어려움으로 어두워진 내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이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도 있으며
하나님의 얼굴이 나를 향하여 있음을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한 순간에도
아담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숨었지
하나님이 숨긴 것이 아닙니다.
너무 힘들면,
너무 두려우면,
너무 괴로우면,
너무 답답하면 하나님이 얼굴을 돌린 것 같고
하나님이 나를 잊은 것 같고
하나님이 숨은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은 우리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환경이 어려우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눈이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환경을 바꾸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 <눈을 열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려 나를 생각하셔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내 눈이 열려지는 것입니다.
얼굴을 돌려 달라고 기도하는 목적은 내 눈이 열리기 위해서 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얼굴이,
나를 잊으시고 나에게 그의 얼굴을 숨기시지 않고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기도는 늘 다윗을 힘들게 하는 것들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시작한 시편이
결국 자신 안에서 회복된 확신으로 끝이 납니다.
자신의 원수였던 사울과 압살롬과 죽음과 사탄 등의 환경이 아니라
그는 결국 하나님을 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이 아니라 내 눈을 여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환경으로 인해,
내 욕망과 욕심과 정욕으로 인해 보이지 않던 내 영안이 열리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전쟁의 때에 기도한 것은 우리와 함께하는 군사와 말과 병거를 볼 수 있도록
사환의 눈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저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사환의 눈을 여시매 저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6:17]
사도 바울에게 행 한 예수님의 은혜는 바로 이 영적인 눈을 열어 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은 그들의 마음의 눈을 밝혀서 부르심의 소망과
성도의 영광의 기업의 풍성함을 보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엡1:18]
다윗이 기도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답이라고 말합니까?
내 눈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열지 않으면 찾아오는 결과는 하나님의 관계가 깨어지고
감정의 문제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게 되며
환경의 문제로 인생을 허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3:5)
답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내가 주를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구하는 것입니다. <헤세드>를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헤세드입니다.
그가 기도하고 그가 다시 주께 나아가는 근거는 그분의 무한한 자비입니다.
주의 친절과 인자와 인애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의 얼굴,
하나님의 인애의 얼굴이 번함 없으신데
그것을 바라볼 때 다윗은 하나님의 관계와
자신의 감정의 문제와 환경의 모든 문제를 넘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어떤 죄 가운데서도 다시 바라보면 그 자리에서 여전히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은
바로 주의 사랑, 헤세드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죄로 인해 받는 고통의 대가와 원수들의 공격과 죽음의 두려움속에서
그가 붙드는 유일한 한가지는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 나아가지 못하는 자 없고,
그분께 가지고 가지 못할 죄가 없고
그분께 해결되지 못할 문제가 없음을 그가 아는 이유는
그분의 사랑, 자비와 인애의 헤세드가 그분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환경이 변화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변화를 기대합니다.
환경이 변하고
기적이 일어나고
좋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기대합니다.
아닙니다.
시인은 오늘 환경이 변해서 찬양하고 구원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얼굴입니다.
그분이 변함없이 나를 바라보시는 헤세드의 사랑을 다시 깨닫고
그분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주의 구원입니다.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13:5)
'주의 구원'이라고 번역한 말의 원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예수아>입니다.
이 말은 '야솨'라는 말에서 온 말인데
자유롭게 하다, 구원하다,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바로 신약에서 사용된 예수님의 이름의 어원입니다.
즉 다윗이 기뻐한 것은 환경의 변화나 원수를 이기거나
내 어떤 문제가 해결 된 것으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구원의 요체이신 그리스도 예수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의 구원'은 신약의 예수님의 이름이 됩니다.
주의 구원은 결국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다윗은 오늘
언제 우리가 구원을 만나고
언제 우리가 기도하고
언제 우리가 천국을 소유하고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고 찬양합니까?
우리의 고난입니다.
우리의 눈물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산상보훈에서 처음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평생은 기적이 없는 인생입니다.
그의 대부분의 인생은 눈물의 인생입니다.
도망자로 죄인의 모습으로 눈물과 고난의 인생을 살았던 인생입니다.
그런 그가 가장 놀라운 찬양의 삶을 산 것은
그가 당한 고난을 통해 주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구원의 본체요
자유함의 요체이며
해방의 문인 <예수님> 구원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장 위대한 축복 기적이 아니라
고난의 광야를 통해 구원의 본체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영적인 마음의 문을 흐리게 하지만
하나님은 그 고난을 통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 기도가 헤세드의 사랑을 의지하게 하며
결국 구원의 길인 예수님을 인해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올 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영적인 눈을 다시 뜨게 하는 것입니다.
그 뜨인 눈으로 주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보게 되는 인생,
그 인생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영원이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변화 되어서 기뻐하는 것보다
환경이 어렵고 고난과 눈물은 여전하지만
그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나를 향하시는
여호와의 얼굴을 고난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고 보니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원수가 죽는 것보다
내 환경이 나아지는 것보다
내가 다시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높은 자리에 앉는 것보다 더 기뻐하고 찬양한 것은
바로 헤세드의 자비와 인애를 근거한 하나님의 구원,
예수로 인해 기뻐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주의 구원이 예수님이 될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우리 모든 삶의 기쁨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잊은 것처럼,
주의 얼굴을 숨긴 것처럼 느껴지는 인생이라고 시작을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내가 여호와를 찬송한다고 고백합니다.
왜요?
주께서 내게 예수 그리스도를 허락하시고
그 분을 볼 수 있는 마음의 눈, 영적인 눈을 뜨게 하셔서
그 구원을 볼 수 있는 감격이 지금 내 가슴속에 벅차 오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환경이 어려운데 그분이 보시십니까?
그분의 헤세드의 사랑입니다.
그분의 은덕입니다.
그분의 축복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에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13:6)
고난은 우리를 영적으로 눈 뜨게 하고
고통의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는 힘입니다.
잊은 것처럼 숨은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 우리가 구할 것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어두워진 눈을 뜨게 해 달라는
변함없으신 그분의 헤세드 사랑에 근거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를 다시 눈 뜨게 하고 찬송의 영광을 허락할 것입니다.
아멘!
* 요하네스버그 한인교회 3,13,18구역이 새롭게 개척을 시작하는
버퍼존(Buffer Zone)교회를 방문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아프리카의 삶이지만 그분이 눈뜨게 하셔서 보게 하신
천국의 삶을 전하기 위해 또 어려운 발걸음을 시작합니다.
시작하는 시간에 함께하신 구역에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운 일들로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기도 하지만
다시 그분의 헤세드의 사랑을 의지하고 나아가면 변함없이
찬송의 능력과 복음의 힘으로 일으키시는 주를 보게 됩니다.
보게 하셨사오니 주여 하나님 나라를 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