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가 무너질 때> (시편 11편)
사람이 살기 어려운 환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서 기본적으로 보장되어야 할 것들이 보장 되지 않을 때 그렇습니다.
기본적인 삶을 위한 먹는 것과 입는 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사람은 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살기 어려울 때는 기본적인 사회적 터가 보장이 되지 않으면
그 사회를 피하든지 도망하든지 하려 합니다.
오늘 다윗은 그 터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11:3)
터는 사회가 기본적으로 움직이는 기초를 말합니다.
사람이 기본적으로 살수 있는 기초를 말합니다.
그 기초가 무너지면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의인이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윗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찌함인가"(11:1)
악인이 확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올려서 바르게 사는 자를 어두운 곳에서 쏘려 하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데서 쏘려 하는도다"(11:2)
무슨 말입니까?
악한 자들이 늘 남모르게 바르게 살려는 자를 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존이 위협받고 삶의 기본적인 것이 보장되지 않는 삶을 사는데
그런 자들에게 도망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시편은 선언으로 시작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세상은 나에게 도망가라 합니다.
내가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어떤 곳으로 도망가라 합니다.
너의 환경을 보니 너의 나라를 보니 네가 속한 교회와 환경을 보니
바르게 사는 자들이 살수 있는 곳이 아니나 숨기 좋은 산으로 숨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방법입니다.
삶의 기본적인 터가 무너지면 다들 산으로 도망을 가려 합니다.
피하려 하고
도망가라 하고 숨으려 합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는데 나에게 도망을 하라고 말함을 어찌함인가라고 도리어
반문으로 시작을 하는 것이 오늘 시편입니다.
찬양을 하고 기도를 하면서 마음이 바뀌는 것이 보통 시편의 구조인데
오늘 구조는 이미 선언을 하고 시작을 합니다.
나는 이미 여호와께 피하였다라고 말입니다.
세상이 바르게 살기가 힘들고
계산하지 않고 악하지 않고 의인의 삶을 살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내가 알지만
나는 이미 내 삶의 터는 여호와이다라는 것이 오늘 시편의 서언입니다.
첫째, 세상은 터를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세상은 그래도 좀더 나를 아끼는 사람은 너의 삶을 보니 그렇게 살면 소망이 없으니
그냥 도망하면서 피하면서 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내가 사는 삶의 외형입니다.
내 삶의 기초인 터가 흔들리는 상황을 염려합니다.
그래서 늘 피하고 도망하라고 합니다.
터가 무터지면 살기가 어렵다는 논리입니다.
그렇게 헌금하고 그렇게 섬기고 그렇게 헌신하고 그렇게 예수를 믿고 살면
세상에서 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정답입니다.
그렇게 살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시작이 다릅니다.
이미 내가 주께 피하였다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피하여 있다는 것입니다.
내 삶의 터전, 내 삶의 터, 사회적 기반의 터는 내가 살기 어려운 터지만
나는 이미 여화와 안에 사는 삶이니 나를 떠나고 나를 도망하고 나를 산으로 가라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찌 그렇게 말하느냐고 도리어 질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삶의 터전이 오직 세상의 환경입니다.
둘째, 바르게 사는 자의 터는 오직 그의 <눈> 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11:4-5)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삶의 터가 무너지더라도 의인이 사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안목입니다.
그분이 보시는 <눈>입니다.
그가 사는 삶의 터는 세상의 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가 사는 삶의 터는 오직 그분의
<눈>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사는 삶의 기분이 터의 좋고 나쁨이 아닙니다.
내가 좀더 나은 도덕성을 가진 사회와
나를 인정하고 나의 편이 많고 적음이 아닙니다.
그가 사는 삶의 터는 오직 <하나님의 눈>입니다.
그분이 무엇을 보느냐가 내 삶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면 내 삶을 다 정리하고 이곳을 떠날 수 있고
나라를 바꾸고 교회를 바꾸고 사람들을 떠날 수 있지만
내가 이미 내 기준은 그런 세상의 터와 환경과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기에 나는 오늘도 여호와께 피하여 그분의 눈이 기준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다윗은 스스로 선언하고 고백하고 다짐하며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셋째, 힘들수록 붙잡아야 하는 것!
우리는 힘들수록 사람을 찾습니다.
우리는 힘들수록 자꾸 답을 찾으려 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 하고 세상을 이기려 하고 세상을 피하려 하고 사람을 피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서야 하는 것은 그분의 <눈 앞>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기준은 터지만
우리의 기준은 그분의 시각,
그분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감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감찰하시기에 그분의 눈이 있음을 알기에
그분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고 계시기에 여호와께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11:4-5)
그분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십니다.
당장 내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그래서 모두다 나를 산으로 피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이미 여호와께 피하고
그분의 눈이 내 삶의 터임을 고백하고 사는 인생!
그 인생이 오늘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의 터와 기준이 사람들의
<눈>과
<안목>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그래서 만족이 없고
늘 불안하고
더 뭔가를 채워야 하는 인생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터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면
더 채울수록 허전하고
더 열심을 낼 수록 외로운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힘들수록 붙잡아야 하는 것은
세상의 터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것!
하나님께서 인생을 감찰하고 계신다는 것!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의로우셔서 의로운 일을 좋아 하시느데
반드시 악인은 악인의 길을
의인은 의인의 길에 맞는 심판을 하신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다윗은 그 하나님으로 인해 그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제 말씀과 같이 다윗이 마지막으로 내 세운 자신이 맞다는 기준으로 한가지를 내 놓습니다.
넷째, 그것은 <정직>입니다.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11:7)
다윗의 터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터에 서 있는 자의 삶은 세상적 터가 아니라
바로 <정직>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다윗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그가 죄를 지적할 때
죄를 인정하는 정직함입니다.
죄를 짓지 않음이 정직이 아니라
지은 죄와 자신의 약함을 지적할 때 그것을 순수하게 인정하는 것이
<정직함>이라는 것입니다.
죄의 본성은 죄에 대하여 정직하지 못함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성은 <핑계>입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말하며 말씀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그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터는 늘 나의 눈이고
사람들의 눈이고 세상의 눈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가진 가장 다윗 다우며 하나님이 마음에 합한 자라고 인정한 것은
죄를 짓지 않음이 아니라
죄를 지은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언제 은혜가 밀려오나요?
언제 부흥이 옵니까?
언제 하나님이 역사합니까?
죄를 짓지 않을 때가 아니라 죄를 고백할 때입니다.
죄 앞에 정직함으로 설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교회의 부흥은 죄를 짓지 않음이 아니라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죄성을 인정하고
의인인체 사는 것이 아니라
죄인을 의인으로 인정하신 하나님 앞에 죄를 인정하고 자백하고
정직하게 나누는 정직함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죄를 짓지 않은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자를 의인으로 칭하시는 <칭의>의 은혜입니다.
다윗이 아는 것은 죄를 짓지 않음으로 얻은 의인의 길이 아니라
죄의 길을 걷는 삶을 고백함으로 얻은 의인의 칭호입니다.
그것을 알기에 다윗이 놓치지 않은 한가지는
하나님 앞에 철저히 <정직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더 나은 삶의 터를 만들려는 유혹으로 죄를 숨기려는 본성보다
더 깊은 죄를 고백함으로 정직의 길을 걷는 것이
터가 무너진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눈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의인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회복할 것은 세상의 무너진 터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정직함>입니다.
다윗의 세상을 향한 당당함과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힘은
<정직함>입니다.
다윗을 평가하는 하나님의 기준은 오직 정직입니다.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왕상15:5]
열왕들의 평가 기준은 오직 한가지 입니다.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왕하22:2]
하나님의 의인인 욥에 대한 평가의 기준은 정직입니다.
"우스 땅에 욥이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욥1:1]
그리고 세상에게 악에게 우리를 자랑하는 것도 정직입니다.
[욥1:8]"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우리가 구할 것은 뭔가를 이룬 삶이 아니라
오직 여호와께 피하는 힘인 정직입니다.
그래서 찬송은 정직한 자의 유일한 능력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의 마땅히 할 바로다"[시33:1]
의인의 터는 <정직>입니다.
* 나를 향한 하나님의 평가 한마디는 정직 이길 원합니다.
그 한마디라면 더 없는 기쁨이며 삶의 이유입니다.
모든 열왕과 의인들의 평가 기준은 오직 정직입니다.
그 정직의 강이 내 삶에 흐르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