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의 반대 말은 공감입니다> (시편 9,10편)
알파벳이나 숫자 등을 연이어서 운을 띄우고 그것을 시작으로 시를 짓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답관체'(踏冠體, acrostic)형식이라고 합니다.
시편9-10, 25, 34, 37, 111, 112, 119, 145편이 이에 속합니다.
한 개의 연을 히브리 알파벳 숫자 하나로 시작합니다.
완전한 답관체는 22개의 히브리 알파벳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은 고도의 문학적 양식과 언어의 유희를 보여줍니다.
시편 뿐 아니라 예레미야애가도 답관체 형식입니다.
오늘 본문 9, 10편이 답관체 형식으로 쓰여진 시입니다.
22개의 알파벳 중 4개의 알파벳이 빠져 있고,
22개중 18개가 사용되어 만든 불완전 답관체 시편입니다.
그런데 그 알파벳이 9편에서 끝나지 않고 10 편까지 연결됩니다.
3 단락으로 나눈 각각의 단락은 6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9편과 10편이 하나의 시편인데 편집 과정에서 두 시편으로 나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악인이 누구입니까?
다윗은 끊임 없이 악인에 대한 심판과 악인의 행사를 고발하며 하나님께서 간섭하셔서
정의를 보여줄 것을 기도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찬양합니다.
첫째, 그렇다면 악인은 누구입니까?
오늘 시편은 그것을 정의합니다.
악인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말할 뿐 아니라 없는 것처럼 사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10:4)
'감찰하다' 라는 원어는 '찾다 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악인은 하나님을 찾지도 구하지도 않는 마음이며
어디에도 하나님이 없다라고 말하는 생각과 마음입니다.
한마디로 <기준이 없는 인생>입니다.
모든 기준의 마지막은 하나님이라고 믿는 자가 의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믿고 지금의 어렵고 힘든 삶을 버티는 인생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어떤 곳에도 하나님에 대한 기준이 없기에 모든 기준은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있지 않고 찾지도 않기에 자기가 기준이 되어 사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심판과 판단과 결정과 삶의 방향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반대는 <나> 입니다.
십자가는 철저히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자신의 목숨, 자신의 비전, 자신의 생각과 호흡 하나까지도
다 하나님이 기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자기의 뜻을 철저히 하나님의 생각과 기준에 맞춘 인생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자신의 감정도,
자신이 좋아하고, 자신이 하고 싶고
자신이 바라는 모든 기준은 바로 <자신> 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인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십자가의 길을 가지만 모든 기준이 자신의 감정과 생각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걸림돌은 <내 감정>입니다.
우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상은 <내 감정>입니다.
다 맞는데 내 마음이 싫으면 다 싫은 것이 우상입니다.
악인의 삶은 늘 하나님을 찾지 않고 감찰하지 않는다고 믿고 살기에
자기 마음대로 사는 인생이지만
의인은 철저히 가난한 중에도 곤고한 중에도 하나님의 마지막 일하심을 믿고
인내하는 인생입니다.
그래서 의인은 감정에 대해 정직하지만 그 감정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게 합니다.
9편과 10편의 내용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악인과
철저히 하나님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인생의 인내를 통한 승리를 보여주는 찬양입니다.
둘째, 자신을 믿는 인생의 방향
자신이 기준인 인생,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는다고 믿는 자들의 공통점을
다윗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인생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이 기준이 아닌 인생은
약하고 가난하며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들을 무시하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외면하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약한 자, 즉 힘없는 자를 대하는 내 모습이
내 신앙과 인격의 <수준>입니다.
그 사람의 신앙의 인격은 연약한 자에게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사역에 열심이고,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었느냐가 내 신앙의 수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시편이 말하는 우리 신앙의 수준은 약하고 어려운 자들에 대한 마음 입니다.
그것이 악한 인생의 정의입니다.
약하고 힘든 인생에 대한 배려가 없고 그들과 상관 없는 인생으로 사는 것입니다.
셋째, 왜 하나님은 다윗을 왕 같지 않은 인생을 살게 하시는가?
어릴적에 이미 기름을 부어 왕으로 택한 다윗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다윗은 평생을 고난과 눈물과 가난과 아픔 가운데 지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진정한 왕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 악인처럼 약하고 가난하며 고아와 과부와 힘들고 지친 영혼들을 무시하고
그들과 상관없이 사는 인생이 아니라 그 약한 인생의 마음과 그들의 입장을 대신하여
노래를 부르며 그들을 회복하시며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대변해 내는 자가 하나님이 세운 왕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누가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살피시는 약하고 어려운 자들,
가난하고 갈길 몰라 방황하는 인생들,
압제와 가난으로 신음하는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
그들이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다윗이 왜 왕입니까?
다윗은 평생 그 마음으로 살았던 왕입니다.
평생 하나님을 의식하 며 살았는데 그 의식의 근본은
가난하고 약하고 압제 당하며 눈물로 사는 자들을 이해하고
그들을 공감하며 그들과 함께 하는 인생이 바로 다윗이라는 것입니다.
왕은 자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자리는 위치가 아닙니다.
왕으로 벌써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모습은
가난하며(12),
돌볼 이가 없으며(14),
가련한 자들을(10) 돌아보는 인생이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고,
자신의 비전과 꿈을 이루는 인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찌 보면 악인의 모습이 그와 같습니다.
돌아볼 자들을 돌아보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넷째, 왜 우리에게 고난과 눈물을 허락하십니까?
왕인데 왕 같지 않은 인생을 산 다윗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인데 왕 같은 제사장도 아닌 것 같습니다.
왕인데 세상에서 높임을 받지도
거룩한 나라인데 거룩한 나라가 아니라 세상에서 외면 당하고 버림받고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사는 거지 나사로 같은 인생인데
왜 하나님은 이런 삶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냐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해 살아간 것 처럼 보입니다.
왕으로서의 자격은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공감하는 인생임을 보여준 삶 같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그 하나님의 마음으로
약하고 어려운 자들과 동행하는 삶이 참 왕 같은 제사장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런 삶을 끈질기게 살아온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고난이나 하나님이 주고 싶은 가난한 자들을 공감하는 마음을 얻은 다윗의 일생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의 마음으로 접붙이는
<십자가의 못>입니다.
다윗이 당한 억울함과 가난한 자들과 지낸 고난의 시간은
그를 하나님이 세운 진정한 왕,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끈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존재는 죄가 있어서
하나님이 십자가에 박아 놓은 못이 아니면 내려 오고 싶고,
우리를 십자가에 묶어 놓은 끈이 아니면 도망하고 싶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고 싶은 본성이 있기에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왕 같지 않은 초라한 삶을 지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윗과 같은 억울함과 쫓겨 다님과
버림 받고 외면 당한 삶의 눈물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십자가에 달려 있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의 진정한 왕인 예수님의 마음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마음,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며 삶에 지친 인생들과 동행하는 자신을 드리는
<섬김>과 <공감의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이지만 가장 낮고 천한 고아와 과부와 가난하며 압제당하며
하루하루 눈물 겨운 힘겨움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인생을 <공감>하는 사람입니다.
다윗은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다윗의 인생을 통해 가난한 자들과 눈물 흘리는 자들과 아프고 눈물겨운 삶을 사는 인생을 공감하시며
공감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십자가의 반대인 <나> 까지 완전히
십자가에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입니다.
믿는 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 정의와 공의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위해 살던 인생이 나를 버리고 눈물 흘리는 자들,
신음하며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위해 사는 삶인 것을 믿고 살며
그렇게 살 때 하나님께서 심지도 않고 짓지도 않은 천국의 열매를 먹고
풍성히 살게 하신다는 것을 믿는 인생을 의미합니다.
악인이 누구입니까?
약하고 눈물 흘리며 힘든 자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위해 <나>의 것을 내어 놓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나>를 드리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악인>의 반대 말은 <공감>입니다.
<의인>과 같은 말은 공감을 넘어 <나를 드림>입니다.
* 구역에서 그레이스펠로쉽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일년 내내 구역헌금을 모아서 의자도 사주시고 마이크도 사주시고
스피소목사님 비가 세는 집도 고쳐 주셨습니다.
오실 때 함께할 점심도 내 주시고 간식도 준비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한지요~
하나님을 믿는다 하지만 자신만을 위해 평생을 사는 것은 고사하고
그들의 삶 곤고한 그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가난하고 힘들고 아프고 눈물 흘리는 인생의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악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그들을 공감하지 못하는 인생,
그들의 삶의 현장도 그들의 사는 모습도
왜 그들이 눈물 흐리고 무엇을 아파하는지 알지 못하는
<무감각>의 인생이 악인의 삶입니다.
현장을 봐야 공감하고
그들의 삶을 봐야 마음이 갑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무엇 때문에 눈물 흘리고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는지 공감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해 내 삶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의인이라 말하면서 눈물로 살아가는 인생을
공감하지 못하고 양의 탈을 쓴 늑대는 아닙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고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
내 비전과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부르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이리는 아닙니까?
우리 인생을 함께 공감하기 위해 왕의 자리를 버리고
사람의 몸을 입으신 공감의 시작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복음은 그들의 삶을 공감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악인은 공감하지 못하는,
하나님이 기준이 되지 못하는 인생입니다.
죄 많은 우리 인생에 다시금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공감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알고 믿는 그래서
하나님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는 축복이 다시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1.기준이 없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하나님이 감찰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나에게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사는 것은 어떤 것이 있는지 고백해 봅시다.
2.다윗은 가난하고 압제당하며 가련한 인생과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자들을 악인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돌아봐야 하는데 돌아보지 못한 사람은 주변에 없습니까?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이며 이해입니다.
우리의 이해가 필요한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봅시다.
3.왕을 삼으시기 위해 가져야 할 조건은 자리가 아니라 인생을 이해하는 공감의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 고난은 공감을 가져다 준 축복이었습니다.
나에게 고난이지만 축복이 된 것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4.고난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선물은 그들을 이해하는 공감의 마음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고난은 하나님이 가련한 인생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기 위한 유일한 방편입니다.
내가 힘들 때 구해야 할 것은 축복이 아니라 바로 이 하나님의 공감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회복되면 하나님은 나의 인생을 평안함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며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함께 나누어 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