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십니까?> (시편 7편)
사람이 가장 억울할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하지 않았는데 모함을 당할 때입니다.
한일에 대해 책임을 지고 죄값을 받으라고 하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하지도 있지도 않은 일로 고소를 당하고 대적이 생기고 공격을 당하면
어떤 누구도 견디기 힘든 것이 바로 억울한 일입니다.
다윗이 오늘 당한 일은 바로 억울한 일로 인한 모함과 죽음의 위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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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매우 심각한 상황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7:1-2)
억울하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호소할 곳은 오직 주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주께 피한다고 먼저 입을 열어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자 같이 찢고 뜯으려 하는 상황을 말씀합니다.
죄를 지어 당하면 이렇게 말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에게 없는 죄로 달려드는 상황을 하나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오늘 시편의 배경은 사울과 관련이 있는 이야기입니다.
시편의 제목이 '베냐민 사람 구시에 관하여 관하여 듣고 부른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구시가 누군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베냐민 지파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을 무고하게 공격하고 다윗에게 사자처럼 달려드는 것이 베냐민 사람 '구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의 지파는 베냐민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을 세우려는 과정에서 사울로부터 엄청난 죽음의 위협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의뢰하고 말씀의 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렇지 않았고 모든 상황도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삼상24:9)
굴속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를 포기하고 사울에게 하는 다윗의 항변입니다.
그 항변은 한가지 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왜 듣냐는 것입니다.
즉 사울의 주변에 사울의 왕권을 지키는 자들이 다윗을 모함하고 고소하는
무수한 소리를 듣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느낀 사자의 공격 즉 찢고 뜯는 죽음의 공포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의 말>입니다.
하지 않은 일,
의도하지 않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다윗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하니라"(26:19)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마음을 주신 것이면 자신이 제물이 될 수 있지만
사람들이라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사람들의 모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울과 다윗 사이에는 늘 다윗을 모함하는 거짓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울 주변에 다윗에 관해 거짓을 아뢰고 모함하는 사람들은 늘 있는데
바로 그들 중에 오늘 시편의 제목인 '구시'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베냐민 사람이고 구시도 베냐민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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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어떤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만들어 냅니까?
바로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리를 잃지 않으려는 사람입니다.
즉 <특권>을 누리면 <악> 이라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누가 모함을 합니까?
누가 거짓을 말합니까?
자신의 관계의 특권,
자신의 권력의 특권,
자신의 힘의 특권,
자신의 자리의 특권을 놓치기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악을 알고도 그 특권을 놓치기 싫어서 모함하고 거짓을 말하며
한 사람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게 말을 전하는 것이
사자가 찢고 뜯는 것처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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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항변의 방법!
다윗은 3절부터 5절까지 만약 그들이 말한대로 내가 그런 죄를 지었거나 혹 잘못한 일이라도 있다면
원수가 내 영혼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이 먼지 속에 살게 하라고 말합니다.
항변을 위해 자신의 생명, 자신의 모든 영광을 걸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다 도저히 안되면 자신의 생명을 걸고 증명합니다.
바로 <자살>입니다.
자살은 다른 길이 없을 때 택하는 방법입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해도 해도 사람들이 듣지 않으면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 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생명을 걸고 결백을 주장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보고 사울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기회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결백이 맞는다고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결백이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떤 기회가 왔을 때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신을 증명합니다.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을 회유하고 그가 망하도록
논리를 펴는 일을 만들어 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이 하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힘든 이유와 사람들이 이 길을 가지 못하는 이유는
오래 걸린다는 것이고 또 보장이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 모든 모함에서 벗어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성경은 그것이 증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심으로 자연스럽게 일이 해결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랜 시간을 지나야 하고 그 세월 동안 억울함과 사자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견뎌야 합니다.
그것이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늘 쉬운 방법을 택합니다.
죽일 기회을 잡고 내가 내 스스로 증명할 방법을 찾습니다.
사울을 죽이고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는 빠른 방법을 택합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연스럽게 일하실 때까지 내가 손대지 않아야 합니다.
항변의 방법은 그냥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심판하지 않고 내가 처단하지 않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의 웅덩이와 함정에 빠지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앙이 자기 머리에 돌아가고 포악이 자기 정수리에 내리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며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7:15-16)
스스로 만든 꾀에 스스로 빠지도록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편은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해 꾀를 내었던 하만의 이야기가 있는
에스더서의 주제와 같고 후에 이스라엘은 부림절에 부르는 시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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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항변의 조건!
다윗이 이렇게 되는 모든 항변의 결과를 말하는 근거가 오직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정직>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7:10)
억울한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의 방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방패를 들게 하는 근거는
바로 나의 <정직>입니다.
7편에 사용되는 단어들 중에 몇 가지는 재판장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감찰, 심판, 명령 등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9)
다윗이 오늘 모든 모함과 억울한 일을 당하는 중에 한가지 확신을 가진 것은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심판장 되신 하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다윗은 사울을 죽이든지 자신이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믿음은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몇번의 기회를 포기했고
자신이 죽을만큼 힘들 때 자신을 지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내가 심판할 자리에 서지 않는 것을 말하며
나를 모함하고 나를 괴롭히는 자들을 믿음으로 지켜주는 것을 말하며
내가 스스로를 지켜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정직한 자입니다.
다윗은 적어도 사울의 왕권과 관련된 부분에서 정직한 자였음을 하나님이 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윗이 원한 것은 왕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왕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왕이 누리는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것이 가능했습니까?
고난입니다.
생명의 위협이었습니다.
눈물의 광야 시간이었습니다.
고난과 생명의 위협과 하루하루 살아가는 감사와 감격이
헛되고 헛된 자리의 욕심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마음으로 설수 있도록 자신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소연으로 시작한 다윗의 시편은 감사와 찬양으로 마칩니다.
악인을 심판 하려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직,
자신을 세상의 자리에 대한 욕심으로부터 지켜오도록 만든
광야와 고난과 눈물과 아픔으로 인해 그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찬양하는 것입니다.
항변하던 다윗이 감사로 자세를 바꾸고
악인들을 멸해달라는 그의 기도가 찬양으로 바뀌는 한 정점에는
고난을 통해 정직한 자리에 서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권력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악과 손을 잡고
세상은 힘을 얻기 위해 악이라도 포기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을 바라보는 것도
권력을 기대하는 것도 사치스러운 고난의 삶이
그를 정직한 자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바라볼 수 있는 의인의 길을 걷는 것이 그렇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소유가 아닙니다.
높음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켜야 할 것은
<정직>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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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솔로몬의 다윗에 대한 평가>
다윗이 죽고 아들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을 평가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솔로몬이 아버지 다윗에 대한 평가 중에 하나가 바로 정직입니다.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왕상3:6]
우리가 이룬 수고와 열매와 업적으로 나를 평가하지 않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해 정직에 대한 평가를 받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아들 솔로몬이 바라본 아버지 다윗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그를 평가할 때 정직함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힘은 정직함 입니다.
아버지 다윗의 정직함은 아들 솔로몬에게 큰 은혜를 끼치는 이유가 됩니다.
나의 정직함은 다음 세대를 살리는 큰 능력이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나의 정직함과 성실의 성품을 통해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가 되시지만 그 방패를 들게 하는 힘은
바로 <나의 정직>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것에 대해 돌이키고 지켜가는 하루,
그리고 한 평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일하게 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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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들고 사는 우리입니다.
말씀을 붙들고 사는 인생에게 가장 큰 당당함은 정직함입니다.
정직함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말씀의 힘을 잃어버립니다.
누구에게도 아니 악인을 심판해 달라고 말할 수 있는 당당함은 오직
우리의 정직함입니다.
그 정직함이 내 평생에 끊이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1.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어떤 경험이 있는지 나누어보기 바랍니다.
2.억울할 때 우리를 버티게 하는 힘은 오직 정직입니다.
그러나 정직하지 못하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자신의 속 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일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으나
결코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내가 지금 사람 앞에 그럴듯하지만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는지 고백하고
우리의 평생에 가장 강력한 힘인 정직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내려 놓아야 할 정직의 걸림돌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