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 죄 지은 다윗이 의인이 된 이유> (시편 5편)

< 죄 지은 다윗이 의인이 된 이유> (시편 5편)

 

 

 

 

 

< 지은 다윗이 의인이 이유> (시편 5)

 

평생 한번도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다윗입니다.

한번 골리앗을 물 맷돌로 넘어뜨린 말고는 어떤 기적도 없습니다.

기적이라면 날마다 살아 있음이 기적이라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고 평안히 눕는 것이 기적이라고 고백하며

인생의 평범함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다윗입니다.

 

그런 그가 죄를 지어 고난의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로 집안에 그의 인생에 없는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버린 같기도 하고

죄를 지은 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 주는 같기도 합니다.

밧세바를 범한 그에게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평생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12:10)

 

<죄의 결과가 하나님의 버림인가?>

 

다윗은 압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

자신의 집안의 고통과 도망 다님과 아들의 반역의 이유를 압니다.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죄를 지은 결과로 쫓겨 다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짖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2)

 

상식적으로 간음을 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자신의 삶에 고난과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 가운데 다윗이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오늘도 변함없이 기도합니다.

<나의 나의 하나님이여!>

 

죄의 결과를 우리는 <하나님의 버림>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외면>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보통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죄로 인한 버림과 외면과 저주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소리를 내어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 기도한다고 고백하며 찬양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심정은 무엇인가?>

 

다윗의 진심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5:1)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합니까?

다윗은 스스로 이런 고난의 시간을 지나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입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죄인의 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다윗이 말하는 것은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중에 대가를 받으나

진심,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내가 무엇을 아파하는지 주께서는 알아 달라는 말입니다.

 

마음 깊은 속에 있는 마음, 모든 상황,

내가 무엇을 아파하고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을 같고

죄로 인해 하나님이 버린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마음, 심정을 알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심정'이라는 원어는 <집중된 생각>, <쏠려 있는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무엇을 많이 생각하고 무엇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내가 무엇에 쏠려 있는지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기도하지만

마음이 쏠려 있고 집중된 것은 <죄의 근원>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나의 ,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집안에 칼이 멈추지 않도록 하신 죄의 근원에 집중하고 있고

쏠려 있는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히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절규입니다.

 

버린 같고,

외면 당한 같고,

나의 하나님이 아닌 같은 진짜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오늘 기도하는 마음의 본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이 주와 함께 하지 못하고(4)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고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며(5)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6)

 

누가 생각이 납니까?

다윗 자신입니다.

자신의 과거 죄를 지은 결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된 경험으로

지금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자신이 어떻게 죄인 중에서 의인의 회중에 들어 갔는지 고백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5:7)

 

다윗 자신이 비록 죄의 대가를 받으나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거를 가졌으나

하나님의 용서,

비록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자신을 대조하여 고백하는 다윗입니다.

 

오직 죄인은 종류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

<용서 받지 못한 죄인> 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 하고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는 죄인이고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다윗은 압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평생을 살지만

하나님이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는 자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용서 받는다고 죄의 대가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 사람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삶의 현실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죄의 대속으로 의인의 회중에 살아가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가운데 살고 있지만

자신을 다시 부르시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얼굴을 구하는 삶이

축복임을 알고 있습니다.

 

< 다윗이 죄의 대가를 받았나?>

 

다윗이 죄로 인해 죄의 대가를 지불했는지 삼하12: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12:10)

 

'업신여기다' 것은 하나님을 <멸시> 하고 <얕보았다> 것입니다.

밧세바를 범할 다윗은 하나님을 얕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죄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윗의 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 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한 죄입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며 악인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죄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5:10)

 

자신이 악인으로 죄를 지었던 때와

악인들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 비교합니다.

바로 <배역> 입니다.

주를 배역한다는 것은 반역한다는 말이지만 의미는 <마라> 입니다.

바로 <쓰다> 라는 의미입니다. 

'마라의 '에서 나온 <마라> 입니다.(15:23)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길을 못마땅하게 여겨 저항하고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한 광야를 거부한 것이 마라의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인생입니다.

 

<다윗과 악인의 다른점>

 

다윗은 죄로 인한 인생을 받아들입니다.

아니 받아 들일뿐 아니라 더더욱 엄마 품을 찾는 아기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왜요? 비록 죄의 대가를 받으나 하나님만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길을 것으로 여기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결국 악인은 배역하고

비록 다윗은 죄의 대가를 받으나 의인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 가운데서도 다윗이 기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의로우셔서 나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지만

심판이 하나님과의 <단절>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나 다윗이 바라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얼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내가 살아 숨을 쉬고 호흡을 하는 순간이 하나님과의 교통의 전부라 해도

그것 자체를 감격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삶이 아니어도

중에 하나님이 나에게 얼굴을 드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소리에 응답 하실 믿고 나아가는 그것이 중에 있는 자의 유일한 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평생은 한번의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기적이 없고 죄의 대가로 고난 중에 살아가는 인생이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것이 다윗의 심정입니다.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벌하시되 멸망하지 않으시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셔도 끝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

그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결론은 가지 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5:11)

 

첫째, 주께 피하는 자입니다.

 

다윗이 중에 의인의 길로 것은 죄의 대가, 집안에 칼이 끝이지 않는 징계를 받으나

사랑하는 아들, 사생자가 아니기에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끝까지 피하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생,

죄의 결과로 쓰디쓴 잔을 마신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만이 의인의 길을 가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주께 피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비록 잠을 자는 것으로도

평안히 자고 일어나는 만으로도 감사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가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한다고 외칩니다.

 

다윗의 고백은 죄의 심판, 죽음의 심판 중에 생명이라도 건져 주시고

호흡이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임을 뼛속 깊이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원천은 심판입니다.

호흡의 시작은 단절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나의 죄인됨 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생명의 가치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악인의 목적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신의 <이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니다.

 

죄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조롱을 받아도

오직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주의 이름만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보호와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윗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악인들을 향하여 악인의 삶이 어떠할지 고백할 있는 것은

자신의 죄의 대가를 받고

그럼에도 끝까지 주를 붙들고 주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잘됨이 중요하지 않고

죄로 죽을 인생이

오직 여호와의 길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인생만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며

주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주의 사랑을 입은 다윗이 주의 이름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풍성히 주의 사랑을 입은 다윗이 악인들을 향하여

주께 피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말합니다.

 

죄를 지었던 다윗에게 없었던 것은 주께 피하지 않았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이름>으로 여인을 가까이 했던 죄입니다.

 

그러나 다시 주께 피하는 인생,

다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인생으로 섰을

다윗에게 사라졌던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직 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아무리 탐나고 유혹이 가도 내가 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쾌락이고 향락입니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을 아는 다윗은 오늘 죄의 대가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는 의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만 바라십시오.

어떤 가운데 있더라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피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덮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용서하신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을 만났고 경험했고 알았기에 용서의 삶으로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죄로 묶여 있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회복의 영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서를 경험한, 사랑을 받은 자의 축복입니다.

 

 

 * 워터발교회가 거의 마무리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초 위에 의인의 삶이 보장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죄인임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닌 다른 이를 용납하고 허용하고 서로를 낫게 여기는 섬김의 삶을 전제합니다.

용서의 삶을 아는 자는 의인의 길에 서고

용서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악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다윗이 가운데서도 의인의 회중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자격 없는 인생을 부르신 곳이 교회입니다.

자격 없는 자가 자신의 자격을 찾고 자신의 능력을 찾고 자신의 이름을 찾으면 망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새롭게 세워지는 워터발교회가 주님의 용서 위에 아름다운 복음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1.내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하나님의 버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2.죄를 대가를 당하면서 심정을 알아달라는 다윗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하나님께 드리는 진심과 어떻게 다른지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3.실제 다윗이 죄의 대가를 받은 근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행위 이전에 마음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어떤 마음으로 합니까?

 

4.고난을 당하면서도 다윗이 의인으로 남게 것은 심판이 단절은 아니라는 것을 다윗을 알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죄의 대가를 받지만 끝까지 두가지 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 안에 마음을 가짐으로 주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결단하고 기도함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 지은 다윗이 의인이 이유> (시편 5)

 

평생 한번도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다윗입니다.

한번 골리앗을 물 맷돌로 넘어뜨린 말고는 어떤 기적도 없습니다.

기적이라면 날마다 살아 있음이 기적이라고

아침에 자고 일어나고 평안히 눕는 것이 기적이라고 고백하며

인생의 평범함이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이라고 고백하는 다윗입니다.

 

그런 그가 죄를 지어 고난의 시간을 지내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로 집안에 그의 인생에 없는 고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 같기도 하고 하나님이 버린 같기도 하고

죄를 지은 자의 삶이 어떤 삶인지 보여 주는 같기도 합니다.

밧세바를 범한 그에게 나단 선지자의 예언은 평생 집안에 칼이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12:10)

 

<죄의 결과가 하나님의 버림인가?>

 

다윗은 압니다.

자신이 당하는 고난,

자신의 집안의 고통과 도망 다님과 아들의 반역의 이유를 압니다.

바로 자신의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그런데 그가 오늘 죄를 지은 결과로 쫓겨 다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나의 나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짖습니다.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5:2)

 

상식적으로 간음을 하고 죄를 지은 결과로 자신의 삶에 고난과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죄의 대가 가운데 다윗이 있습니다.

그런 다윗이 오늘도 변함없이 기도합니다.

<나의 나의 하나님이여!>

 

죄의 결과를 우리는 <하나님의 버림>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외면> 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저주> 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보통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오늘 죄로 인한 버림과 외면과 저주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나의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소리를 내어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께 기도한다고 고백하며 찬양을 시작합니다.

 

 

<다윗의 심정은 무엇인가?>

 

다윗의 진심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5:1)

 

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합니까?

다윗은 스스로 이런 고난의 시간을 지나는지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입니다.

그런 그가 누구보다 자신의 처지,

기도를 해도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는 죄인의 심정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다윗이 말하는 것은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중에 대가를 받으나

진심, 내가 무엇을 고민하고 내가 무엇을 아파하는지 주께서는 알아 달라는 말입니다.

 

마음 깊은 속에 있는 마음, 모든 상황,

내가 무엇을 아파하고 내가 무엇을 괴로워하는지 알아 달라는 것입니다.

 

죄의 결과로 기도해도 응답이 되지 않을 같고

죄로 인해 하나님이 버린 같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마음, 심정을 알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심정'이라는 원어는 <집중된 생각>, <쏠려 있는 마음> 이라는 뜻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가 지금 무엇을 많이 생각하고 무엇을 집중해서 생각하고

내가 무엇에 쏠려 있는지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기도하지만

마음이 쏠려 있고 집중된 것은 <죄의 근원> 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만든 나의 ,

하나님께서 죄의 대가로 집안에 칼이 멈추지 않도록 하신 죄의 근원에 집중하고 있고

쏠려 있는 마음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을 향한 간절히

나의 ,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절규입니다.

 

버린 같고,

외면 당한 같고,

나의 하나님이 아닌 같은 진짜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오늘 기도하는 마음의 본심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쏟아 놓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악이 주와 함께 하지 못하고(4)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고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며(5)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고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6)

 

누가 생각이 납니까?

다윗 자신입니다.

자신의 과거 죄를 지은 결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된 경험으로

지금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고백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신의 삶으로 돌아와 자신이 어떻게 죄인 중에서 의인의 회중에 들어 갔는지 고백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5:7)

 

다윗 자신이 비록 죄의 대가를 받으나

자신이 다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주의 <풍성한 사랑> 입었다고 고백합니다.

자신도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과거를 가졌으나

하나님의 용서,

비록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하나님의 집에 들어간 자신을 대조하여 고백하는 다윗입니다.

 

오직 죄인은 종류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

<용서 받지 못한 죄인> 입니다.

 

용서 받은 죄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 하고서라도 하나님을 바라는 죄인이고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지 못하는 죄인입니다.

 

다윗은 압니다.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평생을 살지만

하나님이 다시 부르셔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는 자는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의인이라고 용서 받는다고 죄의 대가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의인은 죄의 대가를 지불 사람입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는 죄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삶의 현실이 있으나

그리스도의 죄의 대속으로 의인의 회중에 살아가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죄의 대가를 지불하는 가운데 살고 있지만

자신을 다시 부르시고 자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제하고 얼굴을 구하는 삶이

축복임을 알고 있습니다.

 

< 다윗이 죄의 대가를 받았나?>

 

다윗이 죄로 인해 죄의 대가를 지불했는지 삼하12:10절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삼하12:10)

 

'업신여기다' 것은 하나님을 <멸시> 하고 <얕보았다> 것입니다.

밧세바를 범할 다윗은 하나님을 얕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을 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다윗의 죄의 본심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다윗의 죄는 하나님을 <업신여긴 > 입니다.

하나님을 쉽게 생각한 죄입니다.

 

오늘 다윗은 자신의 죄를 돌이켜보며 악인들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죄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5:10)

 

자신이 악인으로 죄를 지었던 때와

악인들이 어떤 상태로 있는지 비교합니다.

바로 <배역> 입니다.

주를 배역한다는 것은 반역한다는 말이지만 의미는 <마라> 입니다.

바로 <쓰다> 라는 의미입니다. 

'마라의 '에서 나온 <마라> 입니다.(15:23)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와 길을 못마땅하게 여겨 저항하고 반역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한 광야를 거부한 것이 마라의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인도를 거부하는 인생입니다.

 

<다윗과 악인의 다른점>

 

다윗은 죄로 인한 인생을 받아들입니다.

아니 받아 들일뿐 아니라 더더욱 엄마 품을 찾는 아기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구합니다.

왜요? 비록 죄의 대가를 받으나 하나님만이 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길을 것으로 여기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결국 악인은 배역하고

비록 다윗은 죄의 대가를 받으나 의인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죄의 대가 가운데서도 다윗이 기대한 것은

하나님께서 비록 의로우셔서 나의 죄에 대하여 심판을 하지만

심판이 하나님과의 <단절>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대가를 받으나 다윗이 바라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님 자신의 얼굴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이 부르짖음에 응답하시고

내가 살아 숨을 쉬고 호흡을 하는 순간이 하나님과의 교통의 전부라 해도

그것 자체를 감격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기적의 삶이 아니어도

중에 하나님이 나에게 얼굴을 드시고

기도를 들으시며

소리에 응답 하실 믿고 나아가는 그것이 중에 있는 자의 유일한 의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평생은 한번의 기적으로 살았습니다.

기적이 없고 죄의 대가로 고난 중에 살아가는 인생이더라도

오직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인생을 살겠다는 것이 다윗의 심정입니다.

 

의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을 벌하시되 멸망하지 않으시고

죄의 대가를 지불하셔도 끝까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붙드는 ,

그것이 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로 인정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의 결론은 가지 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5:11)

 

첫째, 주께 피하는 자입니다.

 

다윗이 중에 의인의 길로 것은 죄의 대가, 집안에 칼이 끝이지 않는 징계를 받으나

사랑하는 아들, 사생자가 아니기에 징계하시는 하나님께 끝까지 피하는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악인들과 자신이 다른 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인생,

죄의 결과로 쓰디쓴 잔을 마신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인생 속에서 하나님께 피하는 자만이 의인의 길을 가며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든 상황 가운데서도 주께 피하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비록 잠을 자는 것으로도

평안히 자고 일어나는 만으로도 감사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주께 피하는 자가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한다고 외칩니다.

 

다윗의 고백은 죄의 심판, 죽음의 심판 중에 생명이라도 건져 주시고

호흡이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임을 뼛속 깊이 깨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긍휼의 원천은 심판입니다.

호흡의 시작은 단절입니다.

생명의 가치는 나의 죄인됨 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고 생명의 가치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께 피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악인의 목적은 오직 한가지입니다.

자신의 <이름>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위해 살아가는 인생이 악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니다.

 

죄로 인해 자신의 인생에 자신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조롱을 받아도

오직 주의 이름이 높임을 받고

주의 이름만을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보호와 즐거움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윗은 죄인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이 악인들을 향하여 악인의 삶이 어떠할지 고백할 있는 것은

자신의 죄의 대가를 받고

그럼에도 끝까지 주를 붙들고 주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자신의 이름이 중요하지 않고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잘됨이 중요하지 않고

죄로 죽을 인생이

오직 여호와의 길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인생만이 의인의 회중에 들어가며

주의 집에 거하게 됩니다.

 

주의 사랑을 입은 다윗이 주의 이름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풍성히 주의 사랑을 입은 다윗이 악인들을 향하여

주께 피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고 말합니다.

 

죄를 지었던 다윗에게 없었던 것은 주께 피하지 않았던 자신의 영혼과

자신의 <이름>으로 여인을 가까이 했던 죄입니다.

 

그러나 다시 주께 피하는 인생,

다시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인생으로 섰을

다윗에게 사라졌던 기쁨과 즐거움이 회복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오직 주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이 최고의 가치입니다.

아무리 탐나고 유혹이 가도 내가 원하는 기쁨과 즐거움은 쾌락이고 향락입니다.

 

주님으로 인한 기쁨을 아는 다윗은 오늘 죄의 대가 속에서도

주님만을 바라는 의인의 삶을 보여줍니다.

 

주님만 바라십시오.

어떤 가운데 있더라도 나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며

주님께 피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우리의 삶을 덮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용서하신 사랑의 하나님!

하나님을 만났고 경험했고 알았기에 용서의 삶으로 의인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죄로 묶여 있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회복의 영이 기쁨과 즐거움으로 찾아오기를 기도합니다.

 

다윗에게는 자유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용서를 경험한, 사랑을 받은 자의 축복입니다.

 

 

 * 워터발교회가 거의 마무리입니다.

교회의 기초는 용서입니다.

용서의 기초 위에 의인의 삶이 보장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죄인임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아닌 다른 이를 용납하고 허용하고 서로를 낫게 여기는 섬김의 삶을 전제합니다.

용서의 삶을 아는 자는 의인의 길에 서고

용서를 알지 못하는 인생은 악인의 길에 서게 됩니다.

 

다윗이 가운데서도 의인의 회중에 서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의인의 길입니다.

자격 없는 인생을 부르신 곳이 교회입니다.

자격 없는 자가 자신의 자격을 찾고 자신의 능력을 찾고 자신의 이름을 찾으면 망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새롭게 세워지는 워터발교회가 주님의 용서 위에 아름다운 복음이 세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적용-

 

1.내가 당하는 고난과 아픔이 하나님의 버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이야기 해봅시다.

 

2.죄를 대가를 당하면서 심정을 알아달라는 다윗의 본심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하나님께 드리는 진심과 어떻게 다른지 나누어 보시기 바랍니다.

 

3.실제 다윗이 죄의 대가를 받은 근본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것은 행위 이전에 마음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어떤 마음으로 합니까?

 

4.고난을 당하면서도 다윗이 의인으로 남게 것은 심판이 단절은 아니라는 것을 다윗을 알았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가지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다윗은 죄의 대가를 받지만 끝까지 가지 자세를 가졌습니다.

우리 안에 마음을 가짐으로 주의 기쁨이 충만하도록 결단하고 기도함으로 나아가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도록 하지 않으십니다.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는 믿음과 그분을 바라는 소망을 원하십니다.

마음이 있다면 우리는 중에서도 소망이 있을 것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