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맞춤> (시편 2편)
인생의 모든 것을 노래하는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시편은 하나님 자신을 보여주는 노래입니다.
1편은 복 있는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합니다.
자리가 아니라 자신을 내어주는 삶,
자리를 상징하는 채색 옷을 벗기고 찢기는 삶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관원들에게 군병들에게 옷을 벗기시며 조롱을 당하는 모습에서
자리를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삶,
자신이 맺은 과실을 온 세상을 위해 내어주는 사람,
그 사람이 의인의 길을 걷는 삶입니다.
의인은 없고 하나도 없는데 그 의인의 삶은 오직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시편 2편은 구약에서 시편 1편과 하나의 시편으로 읽히는 시편입니다.
2편은 왕이 즉위하는 즉위식에 읽히던 시편입니다.
다윗의 왕조들이 왕위에 오를 때 읽혔던 시편인데
후에 이 시편이 결국 메시야 예언시임을 알게 됩니다.
결국 시편 1-2편은 하나로 메시야의 모습을 상징하는 예언적 시라는 말이 됩니다.
<1-3절>
세상의 군왕과 관원들 즉 <자리>를 차지 하고 있는 자들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맨 것과 결박을 벗어 버리자고 말합니다.
그의 맨 것과 결박은 그분의 구속 사역을 의미 할 것입니다.
세상은 그분의 사역을 벗어 버리자고 말하고 결국
그의 사역을 파괴했다고 생각하는 십자가에 처형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다윗의 왕족들이 왕위에 오를 때 조롱을 하는 것을 일차적으로 기록하지만
결국 이 노래는 예수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세상의 관원과 왕들의 조롱을 의미합니다.
세상의 자리에 앉은 자들의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멸시와 조롱입니다.
한마디로 시편은 의인의 길을 설명하면서
세상이 조롱하고 욕하고 그분의 길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세상 자리에 앉은 자들은 하나님이 세우는 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인의 길을 조롱합니다.
그들의 힘과 그들의 자리와 그들의 능력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그리스도의 길,
믿는 자의 길을 조롱합니다.
그 조롱에 하나님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4-6절>
그들의 그 조롱과 멸시에 하나님은 비웃음으로
그리고 분노로 대답합니다.
내가 내 왕을 스스로 세우시겠다고 하십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세운 왕들을 조롱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그 세상이 조롱하는 자리에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6)
세상의 조롱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 인정한 왕을 시온산에 세우십니다.
그리고 세워진 기름부음 받은 왕이 스스로에게 대답하십니다.
<7-9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7)
하나님이 인정한 세상의 왕인 기름부음 받은 자가
스스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너를 낳았도다 라는 말씀을 선언하고 나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게 구하면 이방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겠고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며
철장으로 세상을 심판한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세상의 모든 권세를 주시며
세상을 심판할 권세도 주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왕들을 조롱하던 세상 자리에 있는
왕과 관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12>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
여호와께 피하라고 결론을 맺으십니다.
이것이 악인의 길과 의인의 길로 시작한 시편1,2편의 결론입니다.
세상의 자리에서 세상의 방법으로 살려는 자들,
하나님의 길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는 이야기는
그의 아들에게 입 맞추라는 것입니다.
입 맞추는 것은 그를 경외하고 섬기고 떨며 즐거워 하라는 말 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1)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고 12절을 말씀합니다.
세상의 마지막 자리인 왕들과 관원들이 하나님이 세운 기름부음 받은 자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믿음의 방법과 하나님의 길을 인정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길,
그분의 방법,
하늘의 뜻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리의 논리로 살지 않음을 말합니다.
자리를 위해 살지 않음을 말합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가 아님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작은 복 있는 자로 시작을 합니다.
그 복 있는 자는 여호와가 인정하시고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는 길이며
의인의 길을 말합니다.
그 길은 오직 하나님의 길과 뜻과 식인데
그것은 자리를 버리고 오직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만을 인정하는 길입니다.
그분이 사는,
그분이 걸으려는 길입니다.
그 길은 자리와 힘으로 살지 않고
가난한 자와 작은 자와 힘 없는 자와 눈물 흘리는 자와 함께 하는 길입니다.
세상의 왕, 세상의 관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자리로 시작된 죄악 된 세상에 자리의 법칙으로 그들을 스스로 하나님으로 증명하려 합니다.
힘으로,
자리로 자신을 증명하려는 세상에
자리가 아니라
자리에 해당하는 옷을 벗음으로
자리를 박차고 가장 힘 없고 가난하고 연약한 인생들과 함께하고는 길을 걷으며
내 인생을 하나님이 인정하심을 믿고 사는 길,
그 길이 의인의 길임을 시편은 노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와 죄인,
의인과 악인의 길,
그리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자와 세상의 왕과 관원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면서 본능적으로 세상의 왕과 관원의 논리로 예수를 믿으려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한 의인의 길은
자신의 과실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주고
자신의 삶의 방향이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며
자신의 높아짐이 아니라 다른 이를 세우는 인생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절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길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1-2절 말씀처럼 조롱하고 대적하고 그분의 길의 방법과 식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 세상에 대하여 하나님은 오직 그분과 입을 맞추는 자,
즉 그분과 화평하며 그분의 길과 방법을 따르는 자가 복이 있다고 기록합니다.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12)
그분의 가는 길과 마음이 맞고,
그분이 원하는 삶의 방식과 같은 것이 입 맞추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복이 있는 삶입니다.
복 있는 자의 시작이 복으로 끝을 맺습니다.
하나님이 인정하는 삶의 방식을 인정해야 그분과 화평할 수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아들을 인정하지만
그분이 원하는 삶의 방식,
그분이 원하는 삶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 것이 입 맞추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자리에 있는 자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이 세운 기름부음 받은 왕의 방법을 벗어 버리자 라고 말합니다.(3)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이 살고 살아가기 원하는 의인의 길을 내가 따르는 것을 말합니다.
그냥 그분이 나의 구주로 입으로 고백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왕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분의 법과 질서와 방향을 인정하고
그분이 선포한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시편은 오늘 그 왕,
기름 부음 받은 그분을 인정하라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의 자리를 내어놓지 못하기에 포기하지 못합니다.
결국 망함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길과 방법을 따르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이 그분과 입 맞추는 자에게 허락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다면
그분의 길과 방법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이 정한 길입니다.
자신이 세운 법입니다.
그것을 다 버리고
오직 여호와가 세운 기름부음 받은 자의 지혜와
그분의 길과
그분이 앉은 자리에 함께 앉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그분을 인정한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유일하게 세운 기름 부음 받은 메시아가 걸어가신 길과 식과 법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살아 온 것은 없습니까?
그것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입을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그분의 길과 식과 법을 인정하고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분께 <입 맞추는 것>입니다.
* 한인교회 구역에서 카밀리어교회와 워터발교회를 방문했습니다.
130 여명이 참석을 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위해 살지 않고
낮고 천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삶의 자리를 던지고 찾아오는 삶이
기름부음 받은 자와 입맞추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위해 가롯유다와 예수님의 입맞춤을 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입맞춥니다.
아닙니다.
자신의 길과 식과 법을 버려야합니다.
예수님이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그분으로 입 맞추는 삶 만이 생명이 됩니다.
찾아오신 구역 여러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적용-
1.예수님이 원하는 입맞춤은 자리를 차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리를 내어주는 삶입니다.
내가 인정하지 못하고 내가 내어주지 못한 자리는 없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권위, 하나님이 인정한 자리의 사람들을 내 마음으로 내 생각으로
내어주지 않고 갈등의 구조를 가진 것은 없습니까?
함께 고백해 해봅시다.
2.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길인 예수님의 방식과 길을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내가 싫어하고 내가 외면하는 이유가 내가 정한 방식과 길을 포기하지 못해서는 아닙니까?
편한 자리, 힘의 자리, 권력의 자리를 놓치기 싫어서 하나님의 방식을 요구할 때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은 아닙니까?
3.시편 1편의 복 있는 자는 2편의 입맞추는 자의 복으로 연결됩니다.
우리는 내 뜻을 위해 가롯유다의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드리는 향유를 부은 여인의 입맞춤을 하고 있습니까?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4.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고, 인생의 자리를 예수님의 방법으로 내어주지 않는 모든 것은
가롯유다적 입맞춤입니다.
내 뜻을 위해 이용하는 입맞춤이라는 말입니다.
향유, 즉 자신의 전부를 내어놓는 부음의 입맞춤으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내 안에 걸림돌이 되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과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함께 나누고
그것을 포기 하기 위해 함께 기도하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