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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시편 1편-Ⅱ)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시편 1편-Ⅱ)

 

 

 

 

 

 

 

<옷을 벗어 던져야 합니다> (시편 1-2)

 

 

형통과 복을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과 성도들의 개념은 자리이다.

나은 상태 자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예수를 믿는 궁극적 목적을 내가 나은 어떤 자리이다.

한마디로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직책이나 권력의 자리를 의미한다.

그래서 형통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셉의 꿈은 총리라는 자리를 생각하기에

예수를 믿으면 우리는 반드시 세상이 존경하고 세상이 인정하는 자리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한 세가지는 모두 <자리>이다.

배를 먼저 채우는 <자기 자리>,

내가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기적의 자리>,

세상의 권력과 힘을 가진 <능력의 자리>이다.

 

우리는 예수를 자리 때문에 믿는 것은 아닌가?

 

오늘 시편 1편이 말하는 있는 사람은 <형통함> 의미한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3)

 

우리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되기를 바란다.

나무가 되고 싶은 것은 형통함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시절을 쫓아 맺는 과실 많은 소유에 있다.

<자리> <소유> 연결되는 형통의 개념 안에서 예수를 믿는 신앙은

사단이 예수님을 유혹한 시험 안에 갇히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있는 사람으로 대표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소유가 결코 아니다.

소유로 형통이 대변되는 시대를 살기에 더더욱 개념이 그리스도인들 안에 가득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형통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형통이라는 말의 히브리어 '짜라흐'라는 원어의 의미는

'뚫고 나아가다''돌진하다'라는 의미이다.

, 이것은 겨울의 세찬 바람을 뚫고 나아오는 새싹을 의미하고

얼고 굳은 땅을 뚫고 돌진하는 푸른 싹을 의미한다.

 

사실 형통이라는 것은 이미 주어진 <소유의 자리> 아니라

굳을 대로 굳은 땅과 얼대로 얼어 도저히 사람의 손으로는 파지 못할 땅속에서

생명의 신비를 티 우는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이 <형통> 이다.

 

하나님이 환경을 바꾸시고

자리를 바꾸어서 내가 형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통을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축복으로 생각한다.

아니다.

 

형통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안에 뿌리 내린 하나님의 말씀의 생명으로

내가 뚫고 나아가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하며

어떤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도 돌진하는 안의 <생명> 의미하는 것이다.

 

바람의 나는 겨로 대조되는 악인의 형통은 스스로 싹을 틔우며

뚫고 나아가며 전진하는 힘이 아니라

속에 생명력 형통을 소유하지 못했기에

생명력을 찾아 떠나는 <자리의 이동> 의미한다.

 

시냇가의 심은 나무는 결국 스스로 생명과 함께 뚫고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고

악인으로 대표되는 바람에 나는 겨는 스스로 형통함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생명력 없는 상태이며

세상적 개념의 자리를 찾아 다니는 뿌리 없는 생명을 의미한다.

 

있는 사람,

시냇가에 심은 나무,

의인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환경이 좋은 자리 나은 자리가 아니라

겨울 바람의 세찬 시련과

세상의 모진 유혹과 편안히 살수 없는 환경에서도

안에 새겨진 생명의 말씀으로 어떤 환경이라도 뚫고 나아가며

돌진하는 <생명> 의미하는 것이다.

형통한 사람은   <생명을 소유한 사람> 의미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리를 찾아 다니지 않는다.

다만 안에 생명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여호와의 율법은 생명이다.

세상이 유혹이 되는 이유는 마음에 자리에 대한 <동경> 있기 때문이다.

나은… 이라는 어떤 자리가 나를 흔들게 한다.

시험에 드는가? 나은 자리에 대한, 나은 환경에 대한 동경이 있기 때문에

동경에 대한 좌절이 시험을 만든다.

 

바람에 나는 겨는 안에 생명이 없기에

좀더 나아 보이는 환경으로 대표되는 <자리> 택한다.

그러나 형통함으로 대표되는 있는 자는 자리가 아니라 율법,

생명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돈을 많이 준다고,

살게 된다고 자리를 선택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명이 아니라 자리를 택하는 시대는 갈등이 찾아온다.

 

요셉은 구약의 형통의 대명사다.

그는 오늘 시편이 말한 말씀 그대로를 보여준다.

그가 꿈은 자리이다.

절을 받는 자리..

자리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자랑하고 자랑하고 자랑했다.

 

자랑의 이유는 형통을 자리로 보았기 때문이다.

<형통> 자리가 아니라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을 택한 <선택>이다.

 

 

<형통> 시작은 <선택>이다.

자리를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선택한 결과이다.

 

형들에게 자랑한 요셉의 마음은 자리, 받는 자리이지만

하나님이 요셉에게 주신 것은 고난과 아픔과 눈물과 이별과 고통이다.

환경 가운데 요셉이 발견한 것은 오직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 자신>이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을 했다.

유혹이 떨쳐버리기 힘든 이유는 유혹은 <자리의 보장>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혹을 외면하지 못하는가?

세상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는가?

결국 편안한 자리,

힘의 자리,

권력의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한번 눈을 감으면

한번 외면하면 편안한 자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요셉이 대단한 것은,

요셉이 형통함의 대명사가 것은 편안함의 자리가 아니라

편안함의 자리를 버리고 감옥을 택하고 버림 받는 자리를 택한 이유가 번째이고

번째는 감옥이라는 불편함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명은 뚫고 나아가는 힘이 있다.

생명은 어떤 시련에도 돌진하는 능력이 있다.

요셉의 형통의 비밀은 바로 형통의 근원인 여호와의 생명을 날마다 붙들었기 때문이다.

 

 

시편을 시작하는 노래의 이유는 바로 형통의 근원인

<생명> 택하라는 것이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1:2)

 

우리의 죄의 근본은 생명을 버림이다.

하나님과의 <관계> <자리> 때문에 포기한 것이다.

 

자리는 생명을 걸고 벌이는 도박이다.

사단의 유혹의 핵심은 우리의 생명이다.

다만 <보기에 좋은> 자리를 미끼로 사용할 뿐이다.

그런데 자리는 결국 하나님의 것이다.

 

언제든지 자리를 먼저 선택하지 말라.

내가 편한 자리는 생명을 빼앗는 자리다.

세상은 나에게 자리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형통함의 근원인 생명을 빼앗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자리를 얻기 위해 생명을 포기한다.

그래서 형통함도 없다.

이기고 나아가는 생명력이 없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말씀을 포기한 자들,

그렇게 자리를 얻은 자들은 가장 중요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생명이 없는 악인의 길이고 망하는 길이다.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생명이 없는 자들은 결코 설수 없는 자리,

의인의 ,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자리의 유혹으로 생명을 포기한다.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이유는

생명을 포기하려는 자리에 대한 유혹이 그만큼 강한 세상이기 때문이다.

 

자리에 대한 유혹이 없을 때는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돈이 벌리는 자리,

내가 힘을 가지는 자리,

내가 권력을 가지고 배부른 자리에 서면

우리에게는 생명의 기쁨이 사라진다.

생명의 관계가 아니라 자리를 먼저 선택하기 때문이다.

생명의 관계를 포기하고 자리를 택한 나무는 보기에 크고 웅장하지만

열매 맺지 못하는 말라 죽어가는 나무다.

 

환경이 좋은 곳이 형통한 곳이 아니라

좋은 환경을 버린 세찬 비바람이 부는 불편한 자리일지라도

생명으로 살아가는 그곳이 뚫고 나아가고 돌진하는 형통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은

작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생명 대신 편안하고 다른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선택하는 마음 때문인 것이다.

 

형통은 자리가 아니다.

형통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감옥을 감수하고서라도

죽음을 내어 놓더라도 요셉의 옷을 벗어 던지는 <선택> 의미한다.

 

우리는 자꾸 <> 입으려 한다.

옷은 <자격>이다.

자격을 포기 하지 않으면

형통 생명은 없다.

 

요셉은 채색 옷을 억지로 벗겨지는 시작으로 인생을 시작하지만 

생명을 선택하기 위해 스스로 옷을 벗어 던졌다.

스스로 벗은 자만이 자리가 아니라 생명을 살린다.

 

예수님은 자신의 옷을 벗기우셨지만

실상은 잡히시던 밤에 친히 겉옷을 벗고 우리의 발을 씻기셨다.

 

우리에게 예수를 주신 것은 땅에서 옷을 입히심이 아니라

생명을 얻게 하려 하심이다.

자리를 얻기 위해 편안함을 얻기 위해

생명을 포기해서는 되는 이유이다.

 

 

오늘도 우리는 요셉과 같이 옷을 벗어야 한다.

형통의 시작은 자리를 보장하려는 곳에서 옷을 벗어 던지는

결단과 선택에서 시작된다.

 

 

 

옷을 벗어 던져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세상의 안락보다 하나님의 형통을 택하는 선택이다.

내가 옷을 벗어 던져야 하나님은 나를 통해 가족을 살리고

나라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형통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있는 인생,

형통한 인생이다.

그것이 있는 인생,

형통한 인생이다.

 

 

-적용-

 

1.나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입니까 바람에 나는 겨입니까?

자리 때문에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지 자신의 삶으로 이야기 해보기 바랍니다.

 

2.형통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봅시다. 형통은 자리가 아니라 생명 안에서 전진하며 뚫고 나아가는 힘입니다.

시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시련도 생명으로 이겨내는 인생입니다.

나에게 시련이 어떤 것이 있는지 함께 나누어 봅시다.

 

3.나에게 당장 옷을 입으면 보장되는 좋은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은 자리를 위해 하나님과의 생명의 관계를 순간 순간 포기한 것은 없습니까?

 

4.세상적 편안함이 아니라 하나니의 형통을 위해 내가 벗어야 유혹의 옷들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때문에 옷을 벗어 던지는 결단을 통해 시냇가에 심은 나무로 풍성한 열매를 맺기로 결단하고

그분의 도움을 구하기 바랍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