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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1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3 >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1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3 >

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1>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3 >

<사랑! 예수님께 배우다>

 

우리는 사랑을 십자가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럼 십자가를 진후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나요?

예수님의 사명은 십자가만이라고 생각한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은 천국으로 바로 가시면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이지만 십자가가 삶에서 어떻게 녹아 듭니까?

 

십자가 후에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는 어떻게 나타납니까?

 

첫째,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의 표현은 찾아가는 것으로 말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삶이 그분의 목표이고 비전이지만 십자가는 결국 그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찾아가지 못하는 십자가는 십자가가 아닙니다.

엠마오의 제자를 찾아가고

의심하는 도마를 찾아가고

예수님을 찾는 여인들을 천사들을 통해 찾아가고

그리고 절망과 좌절에 있는 그분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의 서신 거의 모든 부분에서 부분을 언급합니다.

"너희 보기를 원함은" "심히 보기를 원하노라"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원하노라" "누구를 데레오라"

가지 못할 때에는

"안부를 전하노라""인사를 전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까?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까?

우리는 자신의 비전을 빙자해서 예수님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법과 길과 식은 보이지 않고

내가 세운 <내가복음>으로 기독교 아닌 기독교를 만들고 있습니다.

 

평생에 친구를 끊은 것은(물론 실제는 아니고 인터넷이지만) 예수를 처음 믿을때 이후에 처음입니다.

왜요?

복음과 상관없는 복음과 동떨어지게 사는 나의 사랑하는 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복음이 아니고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삶의 방식과 길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찾아가지 않는 십자가,

안부를 묻지 않고

그들에게 나아가기를 원치 않고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해 책상 깊은 곳에 숨겨둔 안부와 찾아감의 마음은

결코 복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비전이 강한 사람일수록

아픈 자들 좌절한 자들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외로움과 고독에 슬퍼하는 자들에게 안부를 묻고 찾아가는 일은 없습니다.

 

비전을 말하지 말고

당신의 가족에게 안부를 묻고

사랑한다 말을 하십시오.

고독과 외로움에 살아가는 처절한 피흘림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자들에게

당신의 비전의 녹아 흘러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내가 너와 동행한다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도대체 어떤 비전으로 살기에

선교의 가운데서 흘리며 싸우는

동기와 친구와 후배와 스승에게 일년이 넘도록 안부는 고사하고

날마다 올리는 페북의 글에 '좋아요' 누른단 말입니까?

 

자신의 야망을 숨긴 비전을 외치는 자는

결코 감정에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신의 삶에만 함몰되어 복음을 외치며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비전은 있지만

하나님 나라의 본질인 사람을 찾아감은 전혀 찾아볼 없습니다.

비전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초라하고 시골 한가운데 자신의 잃은 비전으로 살아가는 제자들을

묵묵히 찾아가는 예수님의 모습이 십자가입니다.

 

 

<비전에 묻혀버린 균형>

 

비전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안부와 찾아감의 일상에 섬세한 배려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은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너희를 보기를 원하고

너희에게 나아가기를 원하는 !

안부를 전하고 안부를 묻고 교회 안의 노예로 살아가는 종된 자들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불러가며 안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외치는 자일수록 예수님이 살았던 십자가의 방식,

하나님 나라의 길인 찾아감의 삶은 적습니다.

꿈을 가진 사람일수록 섬세한 배려와 일상의 작은 것을 포기합니다.

아니 그들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하나님 나라를 외치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고 교회를 위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일상의 작은 ,

아프고 힘들고 외롭고 인생의 길을 잃은자들에게 안부를 묻고

인생의 답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찾아가는 것을 별일 아닌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여러분의 비전,

여러분이 이루고 싶은 때문에

길을 치열하게 싸우며 간다고 정작 예수님이 돌아보고 찾아가고

만났던 작은 일은 포기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저의 청년 사역할때 출신 사역자가 많습니다.

청년회에서 30명이 넘는 사역자가 나왔다는 것은 축복이지요~

그들에게 말을 고합니다.

 

복음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외칠 때는

안부와 찾아감과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일상을 반드시 동반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너희의 비전에 성도를 희생 시키는 것은

안부도 찾아감도 없는 예수님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입니다.

 

담임목사를 꿈꾸고

교회를 꿈꾸고

나은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삶을 통해 복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외친다면

가까운 가족에게 사랑한다 말하십시오.

가까운 사람에게 안부를 물으십시오.

가까운 성도를 찾아가고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고

잊혀지지 않도록 그들에게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십시오.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님처럼 안부를 전하고 찾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준비된 식탁>입니다.

 

십자가의 사명이 끝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준비된 식탁>입니다.

 

절망한 제자들에게 주님은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을 이긴 예수님께서

절망한 제자들을 찾아가는 것도 감격인데

그들을 위해 친히 숯불을 피우십니다.

그들을 위해 친히 고기도 구우십니다.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랑의 질문은 사랑의 식탁으로 먼저 제공하시는 것입니다.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답을 얻기 전에 주님은 먼저 친히 그들을 위해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아 고기를 구워 준비된 식탁,

사랑의 식탁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식탁에서 질문하십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의 질문은 사랑으로 대답해야 합니다. 

인생의 불을 피우고 고기를 궂고 찾아오신 주님이 사랑으로 질문할

우리가 답할 것은 사랑의 언어입니다. 것이 아닙니다.

 

인류는 작은 과일 하나에 숨겨진 의도를 알지 못할 때 전부를 잃었다. 

하나님은 작은 냉수 하나에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걸었다.

작은 배려에 준비된 식탁과 언어 속에 영혼이 소생하고 그로 인해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죽으셨지만 그분의 하나님의 나라는

길을 잃은 엠마오의 두 제자였고

의심하는 도마였고

목적을 잃고 자신의 삶에 함몰되어 절망 가운데 고기를 잡던 베드로와 제자였습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이 피운 숯불이고 예수님이 굽는 고기였고

그분이 준비한 식탁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나라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길을 잃은 엠마오의 제자도 아니고

의심하는 도마도 아니고

목적을 잃고 자신의 직업에 함몰된 좌절한 영혼이 아니면 도대체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큰 꿈을 이루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까? 

내가 목표한 세상의 한가운데서 영광을 얻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까?

 

꿈을 좇던 제자들의 꿈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저 엠마오의 제자들과 함께 걷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의심하는 자에게 주님의 살아계심의 증거인 내 몸과 삶의 못자국과 옆구리를 보여주고

자신의 꿈이 좌절된 자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 불을 피우고

고기를 잡고 그들을 위해 식탁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같이 걷지도 않으면서 변하라 하고

의심하는 자에게 내 손과 옆구리의 믿음의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 찾아가지 않고

인생의 꿈을 잃은 그들의 삶의 현장으로 찾아가 그들만을 위한 숯불과 고기로 준비한 식탁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안 믿느냐고

왜 의심하느냐고

왜 세상에 목숨을 걸고 사느냐고 말한다면 

그건 그들이 아니라 사랑을 먼저 아는 자들의 책임 아닐까요?

 

사람은 사랑을 받는다고 느낄 만이 잡으려던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됩니다.

내가 차를 쌌을때 보다 더 행복할 땐 돌아갈 기름값 걱정하며 내놓는 만원 입니다.

차는 소유지만 만원은 사랑입니다.

그 만원이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일상의 상차림입니다.

그들을 찾아가 나누는 대화입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삶의 아픔을 공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준비된 사랑의 식탁 속에 나누는 인격적 대화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사랑을 받아야 세대가 가고 이제는 시대가 아픔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회복하려면 다시 세대가 걸립니다.

 

간난한 시절엔 <무례한 복음>이 통했습니다.

없으니까 못먹으니까 뭔가 붙잡을 것이 필요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도된 전도, 목적을 가진 선물에 세상이 질렸습니다.

 

사랑의 언어,

그냥 사랑해서 나누고 그냥 사랑해서 섬세한 배려와 찾아감과 준비된 섬김을 나누십시오.

 

엘리야의 회복은 냉수 한 그릇과 한끼 식사 그리고 세미한 하나님의 인격적 대화이다.

베드로의 회복은 인격적 대화와 그 사람을 배려한 한끼의 식탁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찾아감입니다.

안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섬세한 사랑의 표현과 준비된 식탁이고 인격적 나눔과 대화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방향만 외치지 어떻게 가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장로가 권사가 아니 목사가 선교사가 자녀에게 아내에게 사랑한다 표현하지 못하니

그들은 늘 허전한 마음 채우기 위해 세상을 기웃거립니다.
 

내 가족에게 내 이웃에게 사랑을 말하나 표현되지 않는 사랑에 믿음 과 복음이 아니라

의식과 허전함만 더합니다.

사랑의 표현을 받지 못한 자녀가 그 사랑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좋은 것을 찾고

자신의 가치를 사랑이 아니라 명품의 이름으로

학벌과 자리의 이름으로 자신의 존재를 대신합니다.

 

 

사랑을 받은 사람만 사랑하게 됩니다.

인생의 봄날에 받은 따뜻한 사랑의 햇볕이

거두어야 인생의 가을날 많은 열매로 다시 세상에 돌려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령이라고 말합니다.

오순절 성령을 받아서 그들이 변했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들을 마가의 다락방에 앉도록 것은

십자가의 명분과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일상으로 녹아

안부와 찾아감과 인격적 대화

그리고 그들을 위한 배려된 숯불과 구웠던 고기입니다.

엘리야가 다시 소생한 것은

로뎀 나무 아래에서 먹은 찬물 그릇과

천사들이 준비한 한끼 식탁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입니까?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는 것은 아닙니까?

 

감동이 사람을 바꿉니다.

말에 질린 세상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찾아감 그리고 사랑을 받았다라고 느끼는 준비된 한끼의 식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 청년 컨퍼런스를 드롱콥교회 주관으로 했습니다.

130여명의 모임의 모든 준비를 교회에서 했습니다.

음식에 드는 돈이 4000랜드(400$)인데 드롱콥교회 교인들이 모두 헌금으로 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오래되고 낡은 키보드를 바꾸기 위해

자매가 키보드를 기증했습니다. 이것은 자매의 한달 월급보다 많은 돈입니다.

 

한끼 식사를 위해 그들을 초청하고

차려진 식탁으로 지치고 힘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격려와 위로를 주기 위해

사역자 사례의 배를 교인이 헌금을 하고

컨퍼런스를 위해 자신의 월급보다 많은 키보드를 기증하는 !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문자로 전화로 SNS 안부를 묻고

가족에게 함께 가는 이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초청해서 함께 준비된 식탁을 나누는 !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