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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0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2 >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0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2 >

아프리카 추장의 <시대를 말하다 10>

 

<사랑을 모르고 복음을 외치다 2 >

 

 

<복음의 평형수를 잃어버린 한국교회>

 

복음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위한 사랑입니다.

그래서 계명의 마지막 단어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사랑을 표현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은 <내가 되는 >이라 배웠습니다.

내가 되서 높아져서 훌륭해져서 많은 사람 앞에서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한마디가 사랑인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걸고 내가 잘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알고

나머지 한쪽의 균형인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전혀 배우지를 못했습니다.

 

기본적인 사랑의 세팅이 잘못되니 어떻게 말하는 것이 사랑인지

어떻게 함께 걷는 것이 사랑인지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사랑이고

복음이고 믿음으로 사는 것이 모든 균형이 깨져 버렸습니다.

 

세월호의 직접적인 침몰의 원인은 평형수 입니다.

아무리 크고 웅장한 배와 조직과 사람과 기술을 가지지만

그것을 잡아줄 평형수가 사라진 배는 침몰합니다.

 

복음의<평형수> <사랑>입니다.

우리는 , 화려한 , 되는 , 축복만 바라다

정작 복음의 평형수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아니 버렸습니다.

아니 몰랐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사니 나도 그렇게 살았습니다.

 

 

< 사랑을 배우지 못했나?>

 

세상의 유일한 대안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이 악하니 세상을 바꾸라는 말은 안하셨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일은 사랑이라는 것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오직 단어 <사랑> 주셨습니다.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는 압니다.

사랑이라는 것을!

그러나 사랑의 방향,

배의 목적지는 알지만

복음의 목적지는 알지만

삶의 이유도 삶의 목적도 알지만

정작 채워야 하고 신경써야 하고 체질화 되어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

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기술들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위해 죽으라고는 배웠고

사랑하라고는 배웠습니다.

꼴을 넣어야 한다는 것은 배우고

어디를 향하여 간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꼴을 넣으라고는 배웠지 공을 어떻게 차는지

공을 어떻게 전달하는지는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평형수,

사랑하는 법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에서 사랑을 외치지만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사랑을 어떻게 말하고

사랑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는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아는 사랑으로

각자가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방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로부터,

교회의 어른들로부터 복음을 배웠는데

사랑의 언어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원천! >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많은 세상에서 그런 놀라운 삶과 사역을 이루셨을까?

그것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요단강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공생에 시작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임재와 하나님의 음성.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사역의 근거는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분이 세상을 사랑하는 근거는 그분이 사랑이심과 동시에 육체로 오신

예수님께서 충분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순간,

세례를 받은 그리고 변화산에서 십자가를 준비하는 모든 중요한 순간에

예수님이 확인한 것은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라"

 

광야에서 시험을 받고 후에도 천사들을 통해 수종을 들게 했습니다.

섬세한,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이 축구 꼴문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꼴을 넣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을 어떻게 차는지 몰라서 넣지 못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꼴문을 보여주었습니다.

방향을 가르키고 어디가 목표인지는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정작 공을 어떻게 차는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모두다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삶에서 살게 하는지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 배웠지만

정작 삶의 작은 일상에서 사랑하는 표현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삶이 거치니 말은 거칠고

인생이 어려우니 감정은 격해져서

하는 말은 욕이고

하는 말은 전쟁이고

하는 말은 싸움입니다.

우리는 그런 인생의 전쟁터에서 자랐습니다.

 

사랑의 언어를 배우지 못하니 복음의 내용을 들고

거칠고 깨진 질그릇이 욕과 전쟁과 싸움의 언어로 세상에 나아갑니다.

 

사랑을 받은 아이

사랑의 언어와 표현으로 배운 아이들은 사랑하는 아이가 됩니다.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절제되고 훈련되고

표현되어진 사랑안에 자란 아이는 복음을 사랑으로 표현해 냅니다.

 

한국교회는 오직 비전만 외치고 하나님 나라만 외치다

진정한 복음의 섬세함과 고상함과 거룩함을 삶에서 배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너무 거칠고

너무 사납고

너무 강하게 복음을 주장합니다.

세련된 표현도

예의와 상식을 갖춘 복음의 언어를 사용할 모릅니다.

복음의 역사가 년이 넘었는데

복음이 빠지고 나니 사나운 언어와 거친 폭력만 교회에 남았습니다.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복음만 외쳤지

질그릇을 대하는 사랑의 표현을 알지 못합니다.

 

<거룩한 명분에 표현할 없는 사랑>

 

그러니 믿는 남자 일수록 사랑한다 말하는 것에 인색합니다.

믿는 여자일수록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가 착하고 좋은 여자로 인식되어 있습니다.

그냥 교회 일만 잘하면 신앙 좋은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한마디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모르고 자랐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아무리 열심히 예배를 드려도 절제된 사랑의 표현 안에서는

결코 자유함을 누릴 없고 하늘의 평화를 맛볼 없습니다.

 

우리는

위대함,

비전,

,

하나님 나라라는 명분에 속아 정작 위대함과 비전과 꿈과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마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표현하는 것에 자유롭지 못하게 훈련받았습니다.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은 죄입니다.

 

표현이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렇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일수록 사랑의 표현에 인색하고 어색합니다. 

한국은 사람 중심이 아니라 힘과 권력 중심으로 움직임을 직감적으로 압니다.

그래서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 표현은 억제되고 표현되지 못한 가운데 살았습니다.

 

페북의 친구를 끊었습니다.

왜요?

믿는 자들은 어떤 명분과 이유가 너무 많아 사랑을 표현할 모릅니다.

멀리서 지켜보는 ,

없이 기도만 한다는 것으로 사랑한다 착각합니다.

바꾸어야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 의미 없는 글에도 좋아요를 누르고

없어질 인기와 세상 문황의 정점인 연예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그들에게 사랑을 표현합니다.

 

 

<세상, 사랑을 표현하다>

 

세상은 사랑을 외치지 않지만 사랑의 표현을 잘합니다.

감정에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표현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억압된 가정,

야망이 숨겨진 비전에 의해 상처로 얼룩진 가정에서 자란 사람은 사랑을 표현할 모릅니다.

 

직분자 가정일수록 비전을 이뤄야 한다는 강박감과 경쟁과 비교 속에서 나온 상처가

그대로 자녀에게 흘러갑니다.

 

복음을 외칠수록

예수를 전할수록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외치는 사람일수록

사랑의 표현에 인색하고 어색합니다.

말은 사랑한다 말은 기도한다 하지만

정작 말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라는 명분하에 사랑의 표현은 억압되고

무시당하고 거룩한 명분에 비해

작은 사랑의 표현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취급 당해 왔습니다.

 

사랑의 표현을 경험하지 못한 아이는 사랑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입니다.

사랑의 표현입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는 사라진 복음의 평형수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급한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말한 세상을 위한 유일한 대안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최근 언제 복음의 평형수인 사랑을 채우셨습니까?

표현되지 못한 사랑의 언어와

마음과 삶은 결국 복음의 평형수를 빼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복음의 <평형수!>

목숨을 걸고 회복해야 우리 시대의 사명입니다.

 

 

 

Pastor Seo

Pastor Seo